[본상] 야생의 꽃 / 허만하
의미에서 풀려난 소리는 비로소 아름답다.
숲속에서 새의 지저귐 소리 들어보라.
물에 비친 가지 끝 섬세한 떨림을 보라.
의미는 스스로를 노출하지 않는다.
말이 되기 이전의 의미를 그대로 머금고 있는 꽃나무.
지는 꽃잎은 소리를 가지지 않는다.
침묵의 배후에 펼쳐지는 끝없이 넓은 들녘을 보라.
사람의 시선이 머문 적 없는 야생의 꽃들이 있다.
흰 색 가운데서 흰 꽃잎은 희지 않은 것 가운데서 흰 것보다 본질적으로 희다.
꽃들은 정직하게 미래를 믿고 있다.
흰 꽃은 순결한 미래를 믿기 때문에 희다.
이름 없는 들꽃들이 저마다 다른 빛깔의 꽃가루를 만들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씨앗을 보라. 목숨은 역사 이후의 다른 별까지 날아간다.
지구가 사라진 뒤의 낯선 천체 위에서 꽃들은 바람도 없이 온몸을 흔들 것이다.
불멸의 언어처럼 인류를 추억할 것이다.
[신인상]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 길상호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 있으면
낮 동안 바람에 흔들리던 오동나무
잎들이 하나씩 지붕 덮는 소리,
그 소리의 파장에 밀려
나는 서서히 오동나무 안으로 들어선다
평생 깊은 우물을 끌어다
제 속에 허공을 넓히던 나무
스스로 우물이 되어 버린 나무,
이 늦은 가을 새벽에 나는
그 젖은 꿈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때부터 잎들은 제 속으로 지며
물결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너도 이제 허공을 준비해야지
굳어버린 네 마음의 심장부
파낼 수 있을 만큼 나이테를 그려봐
삶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질 때
잔잔한 파장으로 살아나는 우물,
너를 살게 하는 우물을 파는 거야
꿈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면
몇 개의 잎을 발자국으로 남기고
오동나무 저기 멀리 서 있는 것이다
TBC대구방송이 제정한 제3회 육사시문학상 본상 수상자로 시집 '야생의 꽃'의 작가 허만하(74) 시인이 선정됐다. 이 상은 이육사의 생애와 문학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2004년 제정된 상.
시집 '야생의 꽃'은 "주체적 시선으로 자연과 사물을 지적으로 통찰하면서 고도의 사유 축적만이 일궈낼 수 있는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쳐보여 높이 평가된다"는 심사평을 들었다. 허 시인은 "중앙이 아닌 세상의 도처에 시를 벼리는 자가 있다는 걸 보여준 것 같아 기쁘다. 부산 시(詩)의 위상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묵묵히 시의 길을 가겠다.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1957년 '문학예술'을 통해 등단한 허 시인은 제32회 한국시인협회상, 제15회 이산문학상, 제5회 청마문학상을 수상했었다.
신인상에는 시집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를 냈던 길상호(33) 시인이 뽑혔다. 길 시인은 2001년 한국일보로 등단, 2004년 '현대시동인상'을 수상했었다.
시상식은 10월 13일 오전 11시 경북 안동시 이육사문학관에서 열렸다.
'국내 문학상 > 이육사시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6회 이육사시문학상 / 김형영, 류인서 (0) | 2011.07.23 |
---|---|
제5회 이육사시문학상 / 정희성, 신용목 (0) | 2011.07.23 |
제4회 이육사시문학상 / 이수익, 김선우 (0) | 2011.07.23 |
제2회 이육사시문학상 / 김종길, 손택수 (0) | 2011.07.23 |
제1회 이육사시문학상 / 정완영 (0) | 2011.07.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