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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 김상미

 

 

오렌지

시든, 시드는 오렌지를 먹는다

코끝을 찡 울리는 시든, 시드는 향기

그러나 두려워 마라

시든, 시드는 모든 것들이여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여

켰던 불 끄고 가려는 안간힘이여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나는 내 사랑의 이빨로

네 속에 남은 한 줌의 삶

흔쾌히 베어 먹는다

 

 

 

 

 

오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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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진보하기 위해 시를 쓴다

 

저는 진보하기 위해 시를 씁니다. 시로써 얼마만큼 제 자신을 진보시킬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시를 씁니다. 하여 제 시엔 아름다운 자연 풍광이나 컬러풀한 미사어구보다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인간 중에서도 제 자신, 제 주변의 이야기가 가장 많습니다.

 

이야기 사냥꾼. 그게 바로 제 시의 정체입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생각들의 나열. 저는 그 생각들이 저로부터 더 멀리 달아나지 못하도록 시로써 그들을 꽉 붙잡아 둡니다.

 

시는 제 자신의 다른 쪽 면에 심겨진 나무입니다. 저는 그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나도록 세상 곳곳의 이야기들을 사냥해 옵니다.

 

사냥은 제게 인생을 거꾸로 읽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물구나무서기도 가르쳐 줍니다. 앞만 보고 달리는 방법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확실히 아는 길들은 지름길로 다니는 게 더 낫다는 것도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제 시에는 언제나 사냥터 냄새가 나고,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립니다. 그러나 제가 그곳에서 가져오는 건 언제나 소금으로 만들어진 칼 한 자루, 저의 '시선'뿐입니다.

 

저는 그 시선으로 세상의 진실을 꿰뚫어보기도 하고, 무한대의 시간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제가 가진 한계이며, 제 시의 한계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저는 절대 서두르지도 않고, 낙담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진보해 나갈 것입니다. 시는 그런 제 이면에 심겨진 한 그루 나무입니다. 그 나무가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도록 더욱더 많은 노력과 땀을 흘리겠습니다.

 

<박인환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저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더욱더 다양하고 깊고 넓은 시선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응시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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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박인환문학상 선정이유서] 사랑과 욕망의 현대성

 

4회 박인환 문학상 수상작으로 김상미의 [오렌지] 4편을 선정한다. 올해로 4회가 되는 박인환 문학상은 1950년대의 대표 시인인, 특히 우리 모더니즘 시학을 발전시키고 전후의 암담했던 현실을 지적으로 노래하면서도 서정성을 잃지 않았던 박인환의 시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젊은 시인에게 주어진다. 박인환은 1926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1950년대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이 살아온 시대, 곧 해방과 6·25로 이어지는 시대를 정신적 혼란과 고통의 시대로 정의하고, 이런 시대를 치열한 시정신과 방법으로 극복한다.

 

이런 정신적 혼란과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젊은 시인들의 화두는 이런 혼란과 고통과 불안과 절망을 시적으로 극복하는 일이고, 특히 이 시대의 정신적 황폐와 공황을 새롭게 노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심을 거쳐 심사대상에 오른 작품들은 이런 시대적 현실을 모티브로 한다는 점에서는 지난해의 작품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다만 지난해의 수준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들이 눈에 띠지 않고 대체로 자기 스타일에 안주하는 느낌이고, 이런 현상은 최근의 우리 시가 보여주는 답답한 답보 상태, 상투적 상상력, 자연 찬미로의 퇴행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진정한 시인은 언제나 그 시대의 시적 인습에 도전하고 그런 점에서 새로운 감각, 새로운 세계인식, 새로운 정신을 추구한다.

 

이런 관점에서 심사위원들은 자신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고통스럽게 새로운 세계를 추구해온 김상미의 [오렌지] 4편을 이번 수상작으로 선정한다. 김상미는 1990년 계간지 작가세계로 등단한 이후 시집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를 펴내면서 이 시대의 정신적 외상, 트라우마를 지적이며 동시에 감성적으로 노래한 바 있고, 특히 이번 수상작으로 선정한 [오렌지], [담배 연기] 등에서는 이런 균형 감각이 한결 단단해지면서 우리시의 모더니즘을 새롭게 발전시킨다.

 

새롭다는 것은 주제와 방법의 두 수준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그가 노래하는 것은 현대인의 사랑과 욕망이다. 사랑만큼 오랫동안 시인들이 노래한 주제도 없지만 사랑만큼 새롭게 노래하기 어려운 주제도 없다. 그가 노래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고, 사랑의 현대성이고 이 현대성은 사랑에 대한 전통적인 감상적인 인식을 극복한다. 흔히 사랑은 고상하고 아름답고 순수하다고 인식되지만 그는 이런 인식을 부정하고 이런 인식과 싸우고 지치고 절망하고, 그러나 다시 사랑을 갈망한다. 사랑에 절망하고 다시 사랑을 갈망하는 아이러니, 사이, , 균열에 존재하는 것은 욕망이다. 사랑이 말이고 언어이고 의식이고 정서라면 욕망은 언어 이전이고 무의식이고 무서운 심적 에너지이다. 욕망의 대상은 무엇이고 누구인가? 언제나 다가가면 사라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상에 도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대상, 헛것, 환상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김상미가 노래하는 사랑이 그렇다. 그는 사랑과 욕망의 틈을 노래한다. 어떻게 노래하는가?

 

이번 수상작 [오렌지]는 우선 형식면에서 최근의 우리 젊은 시인들이 보여 주는 지루한 산문 형태를 말끔히 극복하고, 말하자면 지루한 수사학을 극복하고, 시든 오렌지, 시드는 오렌지의 향기를 노래한다. 오렌지가 아니라 향기가 문제이고, 이 향기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삶이란 언제나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때에도 남아 있는 법'이라고 노래한다. 오렌지는 시든다. 그러나 향기는 남고 그 향기가 바람에 날리듯이 우리의 삶도 향기를 남겨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향기는 '시들면서 내뿜는 마지막 사랑'이고 '안간힘'이라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의 이빨로 베어먹어야 한다는 것. 이런 인간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슬프고 고통스러운가? 이런 향기의 이미지는 [담배 연기]에서는 자신의 책을 말아 피우는 남자의 담배 연기로 변주된다. 한 세상 산다는 것은, 특히 시인들의 삶은 이렇게 자신이 쓴 책으로 담배를 말아 피우는, 그런 절망의 연속일 것이다.

 

심사위원 이승훈(시인, 한양대 교수) 박민수(시인, 춘천교대 교수) 원구식(시인, <현대시>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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