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철학 / 김은정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오늘 갑자기 이 시가 계속 되뇌어졌다.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나는 겨울의 한 가운데서…그리고 인생의 반토막 쯤 되는 곳에서 시를 쓴다.
살고 죽고, 싸우고 웃고 하는 것들이 다 남의 일만 같고, 나는 영악하지도 무르지도 못한 채 세상을 애초에 던져진 모습 그대로 살아내고 있다.
어떤 날은 이렇게 살면 안되는데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따스한 날이거나,
구름 그득 끼어 흐린 날이거나, 비나 눈이 마른 뜰 앞으로 훵 지나가는 날이면은
이대로 살아주자, 그냥 이대로 살아주자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별도 쨍하게 차가운 날 저녁이나 밤, 따뜻한 이불을 펴고 누워 말없는 천장을 보며
‘나는 나의 주인인갗하고 묻는 때도 있다. 그런가하는 생각이 떠오를 때 쯤,
묵묵히 벽을 지나가던 무늬들이 “아니야”라고 진실같은 소리를 내곤 하는데
그만 나는 울컥해져서 혼자 울기도 그렇고, 가만히 있기도 겸연쩍어져서는 그냥 잠을 청한다.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나는 검은 밤의 한가운데서……그리고 내 생의 마지막 날 같이 느껴지는 어둠 속에서
잠을 잃은 두 눈을 껌뻑거린다.
지나간 날들은 다 용서하고 잊어주고 하라는 어른들의 말씀에 예예 고개를 조아리다가도,
나는 아직 용서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또 혼자 시큰둥한 마음인데,
조그만 방안 나만 홀로 누워, 보는 사람도 없는데 울기도 그렇고 하여 맥없이 다시 잠을 청해 본다.
새벽은 길고도 멀리 있고, 나는 아무 할 말 없이, 밤이 외로운 신발을 신고 떠도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심사평]
작품 수준이 예년에 비해 훨씬 높았다. 특히 김정원, 유미경, 김정미, 송미혜, 김은정 등 다섯 사람의 시는 모두 당선작이 될만했다. 김정원의 시는 대체로 농촌을 무대로 하고 있는데, 우선 시들이 깨끗하고 선명해서 호감을 준다. 한데 그 시속의 농촌은 오늘의 그곳이 아니고 한 세대 이전의 그곳이라는 느낌이다. 유미경의 시 중에서는 ‘사랑을 덧입었네’, ‘그대를 보내놓고’같은 사랑시가 자못 일품이다. 소월 조로서 소월만 못하지도 않은데, 조금 구투인 것이 걸린다. 김정미의 시는 독특한 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장점이 되고 있다. ‘합성사진’이나 ‘먼지의 방’은 그가 일상생활을 어떤 시각으로 포착을 하면 시가 되는가를 알고 있음을 말해 준다. 좀더 정리가 되었으면 좋을 것 같다.
송미혜의 시는 말하고자 하는 것이 분명해서 좋다. 모호하고 불분명한 구석이 없다. ‘알미늄 제작소’나 ‘어떤 파산’은 소재도 요즈음 시공부하는 사람들과는 아주 색다르다. 삶에 대한 깊은 통찰 같은 것도 있고, 정리도 이만하면 깔끔하게 된 편이다. 한데 나머지 작품들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김은정의 시는 묘한 페이소스와 무드를 가지고 독자를 사로잡는다. 읽다보면 쉽게 시속의 분위기로 빠지게 된다. 그만큼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리다. ‘생의 철학’은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연상시키는데, 덜 궁상맞고 덜 처열해서 오히려 좋다. 조금은 가벼워서 시가 더 산뜻하다는 느낌이다. ‘내 스무 살에…’는 맑고 풋풋한 사랑 노래로서, 시에 넘치는 젊음이 좋다. 그밖의 시들도 다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그의 능력을 믿게 만든다.
이상의 시 중에서 심사자는 송미혜의 ‘알미늄 제작소’와 김은정의 ‘생의 철학’을 놓고 고심하다가 김은정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송미혜의 시들이 오르내림이 심하다는 점이 김은정을 선택한 이유 중의 하나였지만, 김은정의 시는 근래 다른 어떤 신문이나 잡지가 뽑은 신인의 시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음을 심사자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심사위원 유종호, 신경림
[당선소감] “남들에게 위안이 되는 시를 써서 주변인과 나누고 싶습니다.”
올해로 9회째를 맞이하는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작에 김은정(30·전주시 금암동)씨의 『생의 철학』이 선정됐다. 당선자 김은정씨(30·여·전북 전주시 덕진구 금암동 1553-25)는 당선 소식에도 별 흔들림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그의 직업은 도서관 사서. 책을 좋아한 탓에 대학(전북대) 전공을 문헌정보학으로 결정했고 직업으로 이어졌다.
어릴 때부터 글 쓰기를 좋아해 자연스레 시를 써왔지만 발표한다거나 응모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김씨는 “우연히 지용신인문학상 공모소식을 접하고 큰 기대 없이 응모했다”며 “처음 받는 상이라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당선작 ‘생의 철학’은 자신의 삶을 반성하다 떠오른 시.
“누구나 힘차게 살고 싶지만 잘 되지 않잖아요. 자유가 없는 것 같은 삶이란 생각에 약해지는 순간 나온 시입니다.“
그가 좋아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 류시화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명상적인 냄새가 짙다. 심사위원들은 그의 시를 일러 “묘한 페이소스와 무드로 사로잡는다”고 평할 정도다. 그 역시 이런 말에 부정하지 않는다.
“지인들은 저더러 이상하다고들 합니다. 말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들 하더군요.”
그의 여가 생활은 책 읽기와 명상, 여행 등이 차지하고 있다. 2001년 가을 15일간 휴가를 내고 네팔 히말라야에도 다녀왔다.
지나칠 정도의 차분함과 평온함은 이런 바탕 위에 놓여있다.
“행복해지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면 거기에 이르는 방법 중 하나가 명상입니다. 내가 편안하면 말이나 행동, 글에도 편안함이 깃들기 마련이지요.”
자유스러움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그는 평이한 언어로 표현하더라도 깊이 이해되는 시를 쓰고 싶어한다. 그렇기에 시집을 내거나 문학활동을 하는 것에도 큰 욕심이 없다.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서 오히려 송구스러울 정도입니다.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이 부족한데도 뽑아 줘 감사할 뿐입니다.”
심사위원을 맡은 신경림 시인과 유종호 문학평론가는 "김은정씨의 시가 묘한 페이소스와 무드를 가지고 독자를 사로잡아 쉽게 시속의 분위기로 빠지게 된다"라며 " 생의 철학은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연상시키는데, 덜 궁상맞고 덜 처열해서 오히려 좋다"라고 심사평에서 밝혔다.
전주에서 도서관 사서 일을 하고 있는 김은정씨는 전화통화에서 "첫 응모를 한 작품이 당선의 영광을 안아 얼떨떨하다"라며 "평소 시에 음율을 갖다 붙이면 바로 노래가 되는 소월과 지용의 시에 관심이 많았는데, 지용의 이름이 붙여진 신인문학상을 받게 돼 기쁘다"라고 수상소감을 말했다. 아울러 "이번 기회에 지용의 고향인 옥천을 방문해 지용생가와 지용제를 볼 수 있게 돼 더없이 좋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지용신인문학상에는 모두 306명이 2천90편의 시를 응모했다고 행사를 주관한 동양일보 관계자는 밝혔다. 시상식은 오는 17일 군청 회의실에서 열리며 당선자에게는 5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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