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재개발지구 / 한경선
매물로 나온 낯선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푸른 종이 속 세종대왕을 사랑한 삼촌은
강남로에 집현전을 차려놓고
그 안에 가득 바람을 풀어놓았다
이곳의 바람은
타워팰리스 하늘과 내통한 지 이미 오래다
집현전 내벽에 새롭게 나붙은 훈민정음을 보며
성층권에서 내려온 별똥들의 수다가 한창이다
별똥들의 방언도 이곳에서는
종종 새로운 훈민정음으로 인정된다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소문의 지도를 따라
북두칠성이 제 궤도를 돌 때
궤도를 벗어난 뭇별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각진 상자 한 귀퉁이에 지친 제 하루를 누인다
모양과 크기가 다른 상자 속의 상자
앰뷸런스 소리가 빈번한 이곳
곽에서 관으로 이동하는 길목에도 훈민정음이 있다
흐린 불빛을 달고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관은
언젠가는 땅속 깊이 스며들어 더 이상
길어 올릴 수 없는 검은 우물을 만질 것이다
노숙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이미 그 우물의 색깔을 알고 있다
종종 허름한 지하방으로 스며들던 그 우물의 예언을 사람들은 한때
언문이라고 불렀다는 것도,
순식간에 곽이 관으로 변하는 것은 집현전의 소관이 아니다
ㄱ자로 꺾인 길을 돌아 ㄴ자로 통하는 길은
강남로 후미진 골목 도처에 널려있다
나랏말싸미 세상인심과 달라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주위에 이상한 소문의 울타리를 친다
바람이 곽을 슬쩍 밀면 순식간에 관이 되는 이 새로운 골목에서
세종대왕을 사랑한 삼촌은 집현전 벽면에 새로운 훈민정음을 붙이고
네모난 상자곽 안의 잠을 사랑한 아버지는 오늘도
당신의 잠 속에 칠성판을 그려 넣고 일찍 잠자리에 드셨다
아버지에겐 종종 잠도 또 다른 언문이다
[당선소감]
시를 쓸 때마다 공복을 돌아 나오는 번지를 알 수 없는 시린 바람이 같이 불어왔습니다. 생업에 매달리면서도 시를 놓아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시는 간절한 기도이고 구원의 손길이며 숨어있는 신과 같았습니다. 절망의 끝에서 신에게 매달리듯 생활의 기대가 어긋나면 시심이 뭉글거렸습니다.
냉혹한 시의 밖에서 다시 시로 돌아오기를 거듭하는 동안 나 자신이 시를 배반한 것인지 시가 나를 배반한 것인지도 흐릿해진 지금, 이제 시를 진정으로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망설임의 끝에, 아주 떠나간 줄만 알았던 뮤즈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면 시라는 가난한 상자곽 안에서 버텨온 지난한 노숙의 시간이었습니다. 시라는 허름한 상자곽 안에서 죽음의 관으로 아주 떠밀리지 않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주신 전북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종종 무기력증에 빠지는 저를 용기로 일으켜 세워준 동국대학교 일산캠퍼스 시창작 교실의 박남희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 수년간 같이 공부하면서 아낌없는 질책을 해준 문우 여러분들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어젯밤 꿈속에서 제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시던 엄마! 그 손길의 기억 영원히 간직할게요. 미래를 알 수 없는 시를 쓴답시고 컴퓨터에만 매달려 젊음을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한 예쁜 두 딸 지연이 남경이, 묵묵히 엄마를 이해해줘서 정말 고맙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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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대칭적 소재들 유기적으로 화융… 시적 발상 절묘”
올해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응모자는 372명에 작품수는 1488편에 달했다. 지난 해보다 응모수가 증가되었으며 질적으로도 상승 기류를 탔다고 여겨진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10명 분 40편의 시를 고르고 골라 우수작품으로 ‘훈민정음 재개발지구’, ‘별이 빛나는 낮에’, ‘비문을 읽다’, ‘이음 베이커리’, ‘별이 의문부호로 떠 있는 바다’ 등으로 선별되었는데, 최종심에서 ‘훈민정음 재개발지구’가 당선작으로 결정되었다.
신춘문예는 그 반향의 민감성으로,문학계에 끼친 영향의 상징성으로 연유하여 이의 품격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다음 몇 가지 필요 조건을 내 걸었다.
존귀하고 경이로운 우리 모국어를 충분히 잘 승화시켜 빛내고 있는가. 아름다운 정서를 잘 빚어 냈는가. 내포된 메세지는 미래지향적으로 건강한가. 시의 본질인 기본 체제 갖춤이나 형상화를 비롯한 여러 가춤으로 시적 감동을 함유하며 언어 예술의 경지를 달성하고 있는가. 등등이다.
당선의 영예를 안은 ‘훈민정음 재개발지구’는 이러저러한 조건에 걸맞게 신춘문예 당선 작품으로 손색이 없다고 보았다. 훈민정음이라는 어휘가 담고 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문화 정신을 이끌어 와 시 전편에 한 사조로 굽이치게 하며, 여기에 얹어 현대의 세태적 실감을 풍자로 연출하고 있다. 대칭적 소재들이 유기적으로 화융하며 조화를 이루게 하여 서사적 스토리를 엮는다. 시적 발상이 우선 절묘했다. 세종대왕은 화폐로서 강남의 부를 창출하는 재화를 의미하며 또한 훈민정음의 정신을 함께 상징하여 중의적 표상으로 등장한다. 상층의 부류와 가난한 서민이 교차적으로 이야기 속에 끼여 든다. 곽과 관에 서로 넘나드는 이미지의 진화도 관심을 끈다. ㄱ과 ㄴ이 기호로 등장하는 교집합성과 대립성은 훈민정음의 정신 본연에 다가간다.
‘언문’은 집단 무의식, 거대한 민족 문화의 누적적 잠재 의식을 담지하며 이 시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인 셈이다. 말하자면 백성들을 이롭게하려는 훈민정음의 고유 정신인 나라 말씀인 것이다.
북두칠성과 칠성판은 마치 생과 사, 빛과 어둠, 운명의 지배자(하늘)와 고단의 삶을 펼쳐 가는 피지배자(땅)로 상호 대치를 보이며 함께 조화로움에 다가간다. 이 시에서는 고결하고 신성한 훈민정음 정신과 세속적 부동산 실태와 노숙에서 돌아 온 아버지로 표상되는 가난한 서민의 삶 등 세 타래의 얼킨 스토리의 영상이 교차적으로 오버랩되며 종결에 이른다.
결국 마지막엔 원융(圓融)을 표방하며 옹근 시 정신을 성취한다.“아버지에겐 종종 잠도 또 다른 언문이다.”
- 심사위원 : 유안진 시인, 소재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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