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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잎꿩의비름* 외 4편 / 김은자

 

 

움켜잡은 손에서 총소리가 들린다 창칼에 쫓겨 낭떠러지에 몸을 던진 여자 죽은 뿌리에 걸려 바위틈 몇 알의 흙을 부여잡은 여자 수직으로 날이 선 채 과부처럼 살아온 여자의 살결에서 살의가 빛나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실족이라 했지만 엄연한 개화였다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산 맨발을 보아라 흙을 딛지 못하면 살 수 없어 비탈에 집을 지었다 얼마나 많은 바람을 끌어안아야 했을까? 꽃잎이 어긋나 있는 것을 보니 수천 번 엇갈린 것이 분명하다 계곡의 습기를 모아 터지는 눈망울 마주나거나 돌려 난 녹백색 잎에서 밥 짓는 냄새가 난다 산비탈 아래 마을의 반짝이는 불빛이 진홍색 눈물처럼 짙다 아찔하면서도 고혹적인 자태 절벽 위를 날던 새가 둥근 저녁을 편다.

 

* 산비탈 바위틈에서 자라는 돌나물과에 속한 여러 해 살이 풀의 이름

 

 

 

 

 

폐염전

 

 

무너진 서른세 번째 소금창고가 그녀였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모른다

무거운 도시를 이고 풀썩 주저앉은

케케묵은 소금집이 애를 순산하고도 버림받은

소래 여인이었다는 것을 세상은 알지 못한다

풍경을 위해 이목구비를 지운 여자

풀숲으로 돌아가는 저녁이면

머리 위로 흰뺨검둥오리 날아오른다

바람만은 지우지 못하고 떠난 그녀,

번제를 위한 그녀만의 방식이었으리라

쓰러진 소금창고 정지된 시간 위에

여체는 광물처럼 누워있다

촛농처럼 녹아내린 발가락들이 바다로 쓸려갈 때마다

염전이었던 방은 파도소리를 토해 놓는다

축적된 것들이 소금처럼 고요한데

시체 한 구가 민물에 밀려갔다 밀려온다

습지의 갈대들은 느리게 돌아가는

무성필름처럼 동작과 대사가 맞지 않는다

과거를 알아듣는 사람은 없다

염부들이 팔뚝에 불뚝 솟은 힘줄 같은 전설을

말없이 바닷물에 밀어 넣는 밤

백야(白夜)다,

스러진 것들이 경계를 허물며 갈대숲을 피워 올리는 하얀 밤

소금창고 지붕이 바람에 휘날린다

오래 잊고 살았다

소금창고 양철지붕 위에 떨어지던 빗방울 소리를

비무장지대처럼 살다 바람이 된 갯골 여자를

 

 

 

 

 

화장

 

 

관이 불 속으로 들어가자 나는

죽을힘을 다해 엄마를 불렀다

안 보이는 영토가 썰물처럼 밀려들어 갔다

조금씩 어두워지면서 천착되어가는 시간의 무늬들이

탯줄이 끊긴 갓 태어난 아기처럼 오열했다

엄마와 나는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엄마, 편히 쉬세요’

엄마는 평소 화장을 지우던 저녁처럼

수건을 머리에 쓰고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장을 지우러 가는 거란다’

무거운 옷을 벗고 속뼈까지 태워달라는 엄마

흐린 날이면 하늘을 힘차게 날아가는

갈매기 눈썹 그려 넣었던 시절이 엄마에게도 있었다

슬픔과 웃음을 섞어 견고한 입술을 찍으며 살았던 시간

엄마의 귀는 접혔다가 펴지는 우산 같아

토란잎처럼 젖지 않았다

엄마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를 받아 쥐고 알았다

한 움큼의 웃음, 한 움큼의 울음, 한 움큼의 엄마

자리를 비운 사이 창 밖에는 겨울이 오고 있지만

하얀 맨발 엄마가 지금도 따스하다

 

 

 

 

 

버려진 집

 

 

버려진 것들은 구멍으로 살신하는 근성이 있다

구멍은 퇴화되어 바람으로 부활하는 마력이 있다

남겨진 것들은 모두 저 혼자 쓰러진 것들

혼자 우는 사이 구멍이 되고,

구멍이 통로가 되어 문으로 변한 것들이다

빈 창살이 바람과 몸을 섞어 부재가 되었다

행간마다 숨결을 놓지 않은 까닭이다

고독이 짐승처럼 뛰쳐나와 깨진 창문

버림받은 것들은 안으로 소리를 품고 있다

기울어진 빛들이 벽으로 위태롭게 쏟아진다

방목된 것들이 기원 속으로 스며드는 저녁

빛바랜 페인트가 몸을 추스르고 앉은 노파의 등처럼

허물어진 지붕 위로 쿨럭 쿨럭 마른기침이 새어나가고

침묵하던 것들이 흐르기 시작한다

떠돌던 새가 돌아올 징조다

이제 바람 소리를 기록하던 것들이 귀화하리라

마른 골격위에 별들이 휘추리처럼 매달려 있다

바람은 길게 누운 몇 세기전의 계절을 접신한다

방울을 세게 흔들며 버려진 자가 버린 자를 부르는 밤

한 뼘 열린 뒷문으로 스무 평 남짓 전답이 바다 같다

 

 

 

 

 

동태

 

 

동태가 생태보다 무서운 것은

토막 난 몸으로도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문객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사후의 눈

내 살 누가 파먹나 사력을 다해 노려본다는 것이다

핏발이 선 눈빛에 말없이 수저를 놓는다

용서 같기도 하고 포기 같기도 한 눈빛이

내공처럼 탱탱한 울음을 채워 넣고 있다

흐릿한 기억으로 생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꽝꽝 얼도록 시력은 흔들리지 않는다

살이 달콤할수록 등골이 오싹해진다

썩은 동태 눈깔이라고 누가 비웃었던가?

동태 눈깔 파먹는 재미 쏠쏠하다고 입을 모으는 저녁

시선은 골격을 허물지 않는다

남은 한 점의 살점까지 지켜본 뒤 버려지리라

지느러미 불태우고 내장이 뿌려지도록

마르지 않는 눈길이여

동태가 보고 있는 것은 허공이 아니다

마지막까지 쏘아보는 냉혈의 눈동자

 

 

 

 

붉은 작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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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친정어머님을 떠나보낸 지난여름 이후 얼마간 말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시를 쓰지 못했습니다. 숨을 거두시는 마지막 순간조차 곁에서 지켜보지 못한 딸로서 나 같은 사람도 시를 쓸 자격이 있는 것인가 한동안 먹먹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결핍의 연속이었던 이방에서의 시쓰기는 나의 시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지 알수없어 더욱 고독한 행진이었습니다. 의식 속에서 발효된 모국어가 이질 문화속에서 둥둥 떠다니는것 같은 날이면 그 모든것들이 고이지 않고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흐르다가 작은 돌뿌리 옆이라도 소신있게 피었으면 좋겠다고 꿈을 꾸었습니다.

 

뉴욕은 이번 겨울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추위를 견디느라 가시같이 변해버린 뒷 숲의 나무들을 보면서 잎이 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깊어졌을 무렵 당선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창밖을 보니 가시같던 나무가지에 어느새 봉우리들이 환하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시고 세워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한국문학방송에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떨리는 마음으로 시에 정진하겠습니다. 나의 시 쓰기에 묵묵히 뒤에서 응원해 준 가족들과 '붉은 작업실' 문학교실 문하생 여러분께 기쁨을 나누어 드립니다.

 

 

 

 

비대칭으로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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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경위

 

올해로 일곱 번째인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이번 응모자는 400명을 웃돌았다. 예심에서 8인의 작품 40(응모자별 5)을 선하였고, 40편에 대해 각각 응모자 인적사항(성명, 연락처 등) 모두를 완전히 삭제한 다음 무작위로 불규칙하게(뒤섞어) 편철했다. 그 후 곧바로 본심으로 넘겼다. 본심은 채점이 종결될 때까지는 심사위원끼리도 누구인지, 몇 명인지 알 수가 없도록 보안을 유지했다. 또한 집계(평정)된 점수에 대해 각 심사위원이 당선자 결정을 인준할 때까지도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응모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심사위원 전원이 당선자를 인준한 후에야 심사위원과 당선자 및 본선진출자들을 각 심사위원에게 공개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렇듯 한국문학방송의 당선자 결정방식은 심사위원간 작품추천 및 토론 형식이 아닌 것이다.

 

채점 기준은 시행 첫회부터 올해까지 한결같은 기준이 적용됐으며, 각 작품별로 문법 · 어법 · 표현의 적절성(15) 주제와 내용의 부합 · 일관성(20) 감동 · 느낌(20)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20) 작품의 신선감 · 독창성(20) 작가적 역량 · 성장가능성(5) 등 총 100점 만점으로 되는 구조다. 당선자 선정 기준은 각 심사위원별로 각 작품 또는 다섯 작품 모두의 합계점에서 차하(상위 점수를 장원, 준장원, 차상, 차하로 구분) 이상을 받은 사람 중 전체 총점이 최고인 사람이 당선되는 기준으로 평정이 됐다. 이번 당선자는 그 요건을 모두 충족하였으며, 총점에서 최고를 기록함은 물론, 그 이전에 심사위원 모두로부터 차하 이상을 득점한 유일한 사람이다.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응모 자격은 기성작가(시인)와 문인(시인)지망생(문학도)을 가리지 않으며(남녀노소ㆍ국적 불문, 누구나 응모 가능) 신인등용문 성격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기성작가(시인)에게 주어지는 재평가의 한 방편에 더 가깝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신인등용문은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가 아니라도, 국내에만도 3백여 개나 된다는 문예지와 중앙 및 지방 일간지(신문) 등 수없이 많다.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에는 해마다 응모자 중 상당수가 기성작가(시인)로 파악되고 있으며 아직까지 그 벽을 넘은 문학도(미등단 신인)는 없었다.

 

심사위원은 해마다 전원 교체 위촉함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번 본심은 정일남 시인, 쾨펠연숙 시인, 서상규 시인, 조영민 시인이,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맡았다.

 

올해도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한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매번 추구한다. 그래서 심사방식도 채점제인 것이다. 본선진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인비(人秘)키로 한다. 본선진출자나 낙선자 모두의 사기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진심 어린 큰 감사와 아울러 아쉽게도 낙선된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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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부족 외 4편 / 최재영

 

 

말(言)로써 그려진 지도가 있었다

아이의 첫 울음으로 운명의 등고선을 점치고

짐승들의 귀도 처음인 듯 열리던 곳

누대 몸속으로 유전해 온 길이 있어

아슴하니 눈길 닿는 곳까지 획을 그었는지

그들의 생을 축척해도 영역은 가늠되지 않았는데,

몸에 길을 들여 가는 곳마다

부족의 영토는 새로이 확장되곤 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좌표를 그렸으므로

어디에도 경계선은 없었으므로

간혹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탯줄의 울림으로 지도의 노래를 배우고

가장 먼 별자리에 방점을 찍어

매일 웅장한 족적을 기록했으리라

모든 문명이 부족을 비껴갔으므로

말(言)의 사원을 짓고 탑을 올렸으리라

무지개를 필사하여 후세에 전하기를 수백 번

몸으로만 익혀 온 지도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니,

태초 아름다운 지도는 멸실되었으니,

이로써 부족은 떠도는 것들의 기원이 되었다

 

 

 

 

필경사 Ⅱ

 

 

필력을 자랑하는 꽃들이

허공에 몇 점 획을 찍는 아침

말 못할 천기를 예감하였을까

누군가는 하늘의 전언을 필사하느라

지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도도하고 정교한 문장을 틔우는 중이다

바람의 어수선한 틈을 놓치지 말 것

두려움과 초조함을 감추느라

혹자는 애써 꽃받침을 활짝 열어 젖힌다

오래전부터 그들은 세상의 징후를 기록하였던 바,

기록에는 별다른 기교가 필요치 않다며

담장 밑 그늘만을 꼼꼼히 채록하기도 한다

개화는 이미 밀서가 아닌 평서(平書)인 것

그러므로 꽃들은 쉽사리 서체를 내놓지 않는다

형형색색 눈부신 필력을 드러내기까지

그 미궁을 빠져나오는데 평생이 걸릴 것이다

꽃들은 비밀을 간직한 두려움으로 몸을 연다

일필휘지 내리긋는 격렬한 몸놀림

새로운 필경사가 피어났다는 소식이다

 

 

 

 

꽃이 말하다

 

 

꽃이 열리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다

봄 그늘에 앉아

무심한 바람이 둥글 펴지고

향기로운 햇살 몇 줌 도르르 구르는 것을 지켜보다

그 아득한 멀미 속을 헤매이다가

끓어오르는 절정들을 그만, 복사하다

꽃의 이마는 늘 신열에 휩싸였으므로

뜨거움 속에서 종종 길을 잃다

매번 허탕만 치고 돌아오는 길은

무수한 통점이었느니,

돌아보니 푹풍처럼 지나왔노라고

지나온 길은 단숨에 지워졌노라고

꽃이 닫히는 시점 또한 눈 멀고 말아

모든 찰나는 숨가쁜 적요에 들다

하여 천 년을 피어있어도 순간이라 기록하다

한나절 봄볕이 붉게붉게 소멸해 가다

그리고 진실에 눈 뜬 자들은 이윽고 말하다

봄은, 오늘 또 몇 번의 허구를 재촉하였는가

꽃들이 기울어가는 봄날을 탁본하여 후일을 도모하다

다시 처음인 듯,

 

 

 

 

빗살무늬

 

 

어제는 짐승의 시간이었어요

오랜 유목을 끝내고

수백 도의 펄펄 끓는 화기를 견뎌냈지요

어쩌다 가끔 순백의 쌀알을 받을 때면

온 몸 황홀해져 전율이 일곤 했지요

숨도 쉴 수 없는 암흑을 지나

날카로운 빗금을 몸에 두를 때까지

수천 년을 감당하기에는

나는 너무 소극적이고 협소하여라

폐허처럼 버려져 있을 때에도

수없이 겨울이 내리고 꽃이 다녀갔지요

그때 이미 소멸의 끝에서 당신을 알아버렸으니,

내게 유적의 냄새를 입히고

빗살 문양을 넣은 이는

자신의 빗장뼈를 갈고 다듬어

아직 오지않은 날들을 벼리었을까요

꿈에도 기교가 필요한 법이라지만

화려한 장식 따위 필요치 않아요

지금도 기원을 찾아 다시 태어나고 싶은

나는 끝이 뾰족한 빗살무늬 토기여요

 

 

 

 

목련 Ⅰ

 

 

창가의 목련이 흔들린다

이쪽을 기웃거리다 나와 마주치자

슬며시 외면해 버리는,

그 파문에 나도 잠시 흔들렸던가

목련의 한 시절이 내게 물들어

모두 북쪽으로만 가고 있나니

내 발걸음도 자연스레 북(北)으로 향할 밖에,

봄볕 몇 줌에도 꽃들의 좌우명은 바뀌나니

바람의 먼 기별에도

나는 자꾸만 눈물샘이 젖어들었으니

내 안의 그늘진 폐허도 한 번은 화들짝 피어날 것이니

나의 짧은 몇 걸음이

네게는 천 년을 견디는 일이어서

피고지는 주어들도 한 계절을 걷는 일이어서

봄날을 건너가는 그의 잔잔하고 기인 호흡이

얼룩처럼 어룽지는 몇 날

목련 안쪽의 세상을 내 더 이상 알 수 없으나

떨어지는 날들도 한 생일 것이니

지금 막 눈 맞추는 순간이

너와 나의 평생이다

이리 뜨거운,

밤새 천둥번개가 요란하였다

내밀한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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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다시 새해가 되었고, 여전히 신춘문예의 열병 속에서 응모를 했습니다. 아주 우연히 시작된 글쓰기는 내게 많은 실망과 좌절과 즐거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수없이 응모를 하고 낙담하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글쓰기의 노고와 번거로움, 그것은 기쁨이었고 환희와 같았으므로 기꺼이 낙방의 슬픔을 감내하였지요. 출 퇴근을 하는 매일의 일상 속에서 내 의식을 차지하는 가장 큰 부분은 바로 ‘글쓰기’였기 때문입니다. ‘글쓰기’의 어려움은 내게는 곧 즐거움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굴곡을 지나면서 얻어지는 한 편의 ‘시’...... 밤잠을 잊어도 좋을 향기로운 문장을 맞이하는 일은 어쩌면 내 평생의 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곧 봄이 오는 소리들이 사방에 가득합니다. 이 싱그러운 내음을 향유할 수 있게 해 주셔서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입니다. 응모 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한다는 심사방식이 새로웠으나 내 작품에 대한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용기를 내어 정진할 수 있도록 어깨 다독여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시’가 아니었다면 누리지 못할 호사입니다. 필시 내 다음 생도 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루파나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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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경위]

 

올해로 여섯 번째인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이번 응모자는 260여 명이었다. 예심에서 6인의 작품 30편을 선하였고, 그 30편에 대해 각각 응모자 인적사항(성명, 연락처 등)을 삭제한 다음 무작위로 불규칙 편철했다. 그 후 곧바로 본심으로 넘겼다. 본심은 채점이 종결될 때까지는 심사위원끼리도 서로 누구인지, 몇 명인지 전혀 알 수가 없도록 보안을 유지했다. 또한 집계된 점수에 의거 각 심사위원이 당선자 결정을 인준할 때까지도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응모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심사위원 전원이 당선자를 인준한 후에야 심사위원과 당선자 및 본선진출자들을 각 심사위원에게 공개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렇듯 한국문학방송의 당선자 결정방식은 심사위원간 작품추천 및 토론 형식이 아닌 것이다.

 

채점 기준은 시행 첫회부터 올해까지 한결같은 기준이 적용됐으며, 각 작품별로 △문법 · 어법 · 표현의 적절성(10점) △주제와 내용의 부합 · 일관성(20점) △감동 · 느낌(20점)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20점) △작품의 신선감 · 독창성(20점) △작가적 역량 · 성장가능성(10점) 등 총 100점 만점으로 되는 구조다.

 

심사위원은 해마다 전원 교체 위촉함을 원칙으로 하는데, 이번 본심은 문정영 시인, 서상규 시인, 천향미 시인, 김다희 시인이,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맡았다.

 

올해도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한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매번 추구한다. 그래서 심사방식도 채점제인 것이다. 본선진출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인비(人秘)키로 한다. 본선진출자나 낙선자 모두의 사기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진심어린 큰 감사와 아울러 아쉽게도 낙선된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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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터너* / 우경주

 

 

무음의 협연이 시작되고 긴장이 흐른다

 

그는 연주자의 그림자

연주자와 한 몸이 되는 순간, 페이지가 넘어간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울려 퍼지고

여든여덟 개 건반을 눈으로 넘나들며

숨소리도 나지 않게

열 개의 손가락과 호흡을 맞춘다

 

그늘에 묻힌 그의 손끝에서

갇혀있던 갖가지 음표가 걸어 나오고

분위기는 날개를 단다

 

음악의 끝부분이 가까울수록

연주자의 두 손 보다 앞서가는 페이지터너의 눈

음의 선율에 발을 헛디딜까

악보를 넘기는 손끝에 진땀이 흐른다

 

드디어 절정이 고개를 꺾으면

피아니스트의 손이 건반에서 조용히 가라앉고

연주자의 머리위로

우레처럼 쏟아지는 관객의 박수소리

 

페이지는 제자리에 놓이고

그는 박수의 뒤편으로 밀려난다

 

* 페이지 터너: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

 

 

 

 

손가락 끈

- 노숙자들의 템플 스테이*

 

 

세상의 끈을 놓친 손가락이

끈 하나 붙잡고 한 발 한 발 짝을 지어가는 시간

오른쪽 둘째손가락 끝만 간신히 맞대고

눈 감은 사람이 눈 뜬 사람을 따라 간다

용주사 절 마당을 지나 다다른 돌계단

높낮이가 달라 서로 마음을 놓칠까

아슬아슬 손가락 끝에 온 마음을 매단다

 

눈을 뜨고도 깜깜한 세상

도시의 귀퉁이를 헤매던 바람들

어디서부터 엉켰는지

바람 부는 거리에서 몸 하나 뉠 곳 없었다

 

손가락 끝에 잠시 흘러간 시절을 묶어놓고

불운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

메마른 손가락에 힘을 준다

이젠 거리의 질긴 끈을 놓고 싶다는 듯

따뜻한 끈 하나 갖고 싶다는 듯

 

붙잡을 곳 찾아 이곳에 모인 바람 따라

도시의 그늘도 함께 따라 왔다

골목을 헤매고 다닌

저 바람에서 노숙의 냄새가 난다

 

* 사찰체험

 

 

 

 

 

거위벌레의 집

 

 

뒤꿈치를

들고 바람이 지나간다

나뭇잎 포대기 한 채

참나무가지를 붙잡고 대롱대롱 그네를 탄다

도르르 말린 나무이파리

그 속에 어린것이 잠들어 있다

저 편안한 반동

다디단 잠은 단단히 포장되었다

흠 없는 잎맥 골라 꼼꼼하게 재단하고

홈질에 박음질까지

정성어린 손끝이 야무지다

원통으로 마무리한 저 품에 어미의 기도가 쌓여있다

애벌레가 나뭇잎 뭉치 뚫고 땅 속으로 들어가고

하늘을 나는 멋진 성충될 때까지

더위를 등에 업고 참나무에게 빌붙어

혼신을 다하는 거위벌레

자식을 위한 은 어미의 몫이다

버림받는 아이들의 눈물이

뉴스로 장식되고 따뜻한 요람은 사라지는데,

작은 거위벌레가

새끼를 위한 집을 짓고 마지막 숨을 거둔다

여름 숲속

둘둘 말린 나뭇잎 한 채

바람이 조심조심 어르고 간다

 

 

 

 

 

연두

 

 

다관 속에 아침을 담는다

여린 찻잎으로 숙우가 기울어지면 마른 잎이 오금을 펴는 소리

머금었던 하늘이 연둣빛이다

저 여린 찻잎이 토해낸 녹색의 피

뜨거움에 볶이고 수없이 주무른 손 끝에 덖여

밀봉된 입

그늘에서 서서히 말라간 찻잎의 마음들

이제야 찻잔 가득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나 한때 다향茶香처럼 푸르렀으니

그 물기어린 시절은 연두였으니

내 몸에서 빠져 나간 시간들은 헐거나 눈이 멀어

모두 퇴색되었다

 

우러난 차 한 잔, 오래 마른 침묵이 열리고

녹차를 따던 여린 손과

바구니에 담긴 햇살이 이렇게 싱그럽다

연두 한잔으로 마음을 채워

걸쭉한 피를 걸러낸다

마음의 응어리를 다 풀어 놓는다

 

 

 

 

 

설화(舌花)

 

 

내 몸에 자주 꽃이 핀다

 

사철 봉긋 봉긋,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가

가장 꽃 피우기 좋은 시기

입안에 숨어 있던 꽃씨를 틔워

알알이 쓰린 꽃잎을 혓바닥에 피운다

 

까칠한 설화

맵고 짠 음식에 닿으면 벌겋게 만개한다

좋아하는 평소의 음식 모두 물리치고

매미처럼 한세상 청렴하게 살다가겠다고

찬물로 세치의 혀를 달랜다

 

일복 많은 종부, 나는 저 꽃의 속내를 알지만

어찌할 수 없어

칭얼대는 설화를 달래가며 밤을 지샌다

 

몸이 몸에게 보내는 붉은 메시지

나는 그의 경고를 무시한다

 

꽃 피울 곳은 오직 이곳

설화가 지친 몸에 뿌리를 내린다

 

 

 

 

시계들의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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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다시 일어나 걷겠습니다"

 

수술 통증이 가라앉을 때쯤 찾아온 당선 소식에 기쁘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합니다.

 

사물들에게 말을 건네도 흰 종이 위에서 계속 맴도는 나를 보며 글 쓰는 일은 가야 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거듭 절망하며, 이제 이쯤에서 멈추고 싶었을 때 뜻밖의 당선 소식은 주저앉은 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힘을 내어 다시 걸어야겠습니다.

 

지나고 보면 어느 것 하나 그저 지나칠 것은 없었습니다. 긴 터널도 의미 있는 배경이 될 것이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시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정수자 선생님. 마경덕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김진기 시인님과 시담회 문우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저의 부족함을 가능성으로 믿어주신 한국문학방송과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힘이 되어주는 남편과 아들, , 저를 아는 모든 고마운 분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경위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당선자의 응모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한다. 응모작 중 단 한 편이라도 각 심사위원으로부터 낙제점수(소정의 채점 기준에 의거)를 받으면 당선이 불가능하다.

 

이번 응모자는 350명 남짓이었다. 예심을 통과한 5명의 작품 25편이 인적사항이 완전히 삭제되고 불규칙한 순서로 편철되어 본심으로 넘겨졌다. 본심사은 채점이 종결될 때까지는 심사위원도 다른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황으로 진행됐다. 심사중에는 오로지 심사위원 본인만의 채점(심사용으로 사전에 설정된 소정의 항목과 점수)이 있을 뿐이었다. 즉 일반적인 심사방식인 심사위원간 작품추천 및 토론 형식이 아닌 것이다.

 

이번 본심은 정일남 시인, 배찬희 시인, 서상규 시인이 맡았다.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이나 낙선작에 대한 의견 등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한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매번 추구한다. 그래서 심사방식도 채점제인 것이다. 소정의 채점 기준에 크게 미달되지 않고 단 한 편의 낙제 작품도 없이 골고루 좋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 중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얻어야 당선이 가능하다.

 

끝으로,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진심 어린 큰 감사와 아울러 아쉽게도 낙선된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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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오르며 외 4편 / 천향미

 

 

길에 대한 명상은 첫 호흡부터 숨이 가빠왔어 초고속 엘리베이터로 오른 타워 전망대에서 산복도로가 있는 마을을 내려다 본 적 있었어 비늘을 세운 뱀 한 마리 산허리를 휘돌아 바다 쪽으로 꼬리를 감추었어 가난한 사람들의 공화국은 산의 칠 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예고 없는 쓰나미에도 흔들리지 않았어 방주 같은 마을버스가 실어 나르는 소식은 자주 덜컹거렸어 유리창에 표기된 937번 번호표는 평화의 상징이 되지 못한지 오래 되었고 창틈으로 새어나온 소음이 자동차 바퀴에 깔려 불구의 언어로 너덜거렸어 소화되지 않은 날 것, 비탈길에서 체증을 앓을 때

 

막다른 골목이 허공을 지우고 계단을 만들었어

 

 

 

 

모노레일

 

 

전신암검사(PET-CT) 진료기가 사내를 스캔하기 전

의사는, 눈을 감고 두 팔을

머리위로 올리라고 지시한다

영락없는 항복의 자세

불온한 영혼이 지구를 베고 누워

비로소 겸허해지는 시간이다

X-Ray조사기 조용히 스크리닝되면서

사내의 몸이 영상으로 치환된다

별안간의 불안한 심중(心中)까지 읽어갔을까

감은 눈 속에서 의식이 흔들리자

영혼의 중심 경고 없이

방향 잃은 채 궤도를 이탈한다

폭풍을 만나 비틀거리던 몸을 세우듯 불안하지만

곧은 직선 위를 달리고 싶은 사내

손상되어 폐기하려던 마음의 횡단면 한 장

마그네틱에 재빨리 입력한다

검사를 마치고 공명통 속을 빠져나오며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아내의 두 손을

모노레일에 달라붙듯 꼭 붙잡는다

자기부상열차처럼 마찰 없이 팽팽한

평행선을 그으며 내닫고 싶은 싸늘한 겨울 한낮

신발등에 안착한 눈송이들 금세 녹지 않는,

 

 

 

 

반시

 

 

운문사 가는 길목 국도변

사내가 씨 없는 감을 팔고 있다

바구니 마다 그렁그렁 설익은 눈망울

잠시 몽상에 잠기는 동안

주홍빛 질펀하게 절집 앞에 풀어 놓는다

맞배지붕 받치고 서 있는

배흘림기둥 오래 바라보던 사내

이태 전 배불러 집나간 아내를 떠올리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다

늦가을 햇살을 밀치며 일주문이 열리고

밀짚모자 속에 붉은 볼을 숨긴 탁발승

가사장삼을 손차양 삼아 바삐 길을 나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깨에 멘 바랑이

풍경처럼 가볍다

사내의 눈빛, 잠시 바랑위에 얹혔다가

시계추 되어 흔들린다

더 이상 새가 날아들지 않는 감나무 한 그루

까치밥 연등처럼 높이 매달고

비구니 청정 수도도량을

밤새 비추며 서 있다

 

 

 

 

허수아비와 자전거

 

 

딸아이와 함께 간 허수아비 전시장은

추억이 뉴스가 되는 현장이다

귀밑머리 희끗한 여자가 떠올리는 그림은

어린 시절 채마밭을 지키고 서 있던 키 큰 허수아비

허름한 베옷에 밀짚모자를 쓴 허수아비를 배경으로

다섯 살 딸아이가 V자를 그린다

즉석에서 현상되는 디지털 사진처럼

고욤나무 그늘 드리워진 언덕을 내려오는 아버지,

선명하게 현상 된다

거슬러 올라 바퀴가 멈추는 채마밭 부근

허수아비 멱살을 잡고 공회전 하는 아버지

끊어진 체인이 기억 속에서 이어지고

까르르 내 웃음이 아버지의 안장을 차지하고 앉는다

헛돌던 은륜의 바퀴가 속력을 얻는다

아버지가 밟던 힘찬 페달의 힘으로

 

 

 

 

그림자를 캡처하다

 

 

그림자 하나가 왼쪽 뇌를 갈고 있다

몸을 갖지 않은 4차원의 기호로 표기되는 이름

나는 가끔 그림자의 안부가 그리울 때 있다

기억해낼 수 없는 형체를 어둠에게 물어

더듬이를 붙이고 시크릿 코드로 기록해 둔다

길게 혹은 짧게,

빈번한 입맞춤은 수신규칙이 생략되어 전송된다

몇 개의 점과 선으로 타전되는 모르스(Morse)부호

··· --- ··· --- ··· --- ··· --- ···

내란(內亂)의 징후는 말줄임표로 요약되어

다급한 당신 심장으로 타전 된다

지류를 벗어난 물소리 스며든 골짜기

빛의 발원에 관계한 적 있던 그림자

이끼로 자라고 있다

풀어보면 해독불가의 암호는 없다

12월을 뜨겁게 살았던 순교자의 흔적

골목마다 길게 핏빛으로 새겨져 있다

 

 

 

 

바다빛에 물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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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길에 대한 명상은 첫 호흡부터 숨이 가빠왔다. 한 줄의 시와 만나는 일도 그랬다. 수많은 갈래 길, 그 중에서 내가 가고자 하는 시의 길은 우윳빛 안개에 덮여 일정한 거리만을 보여주었다.

 

시란 어쩌면 미지의 안개 속을 더듬어 내가 또 다른 나에게 도달하는 길, 희붐하던 길이 세밀화 그림처럼 가깝게 다가온다 여리디 여린 실핏줄인 길들과 만나야겠다.

 

멀게만 느껴지던 죽음이 내 가까이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잦은 부고와 병문안, 예기치 않게 수술방에 들어가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시어머니를 바라보던 일,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3개월 째 투병중인 시숙님···.

 

절박함을 눈앞에 두고 시에 매달렸던 일이 당선의 영광으로 돌아오자 나는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불온한 영혼이 지구를 베고 누워 비로소 겸허해지는 순간이다.

 

TV 뉴스에서 대설(大雪) 소식을 알리고 있다. 세상의 모난 것들 둥그렇게 순해져 길을 잃겠다. 두렵지 않다. 막다른 골목이 허공을 지우고 계단을 만든다.

 

 

 

[심사경위]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당선자의 응모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심사과정에서부터 작가의 역량을 보다 광범위하게 체크하여, 당선자를 보다 자신감 있게 세상에 선보이면서, 정말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공모에 당당하게 당선될 만한 수준인지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로부터 평가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번 신춘문예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공지시 응모작품수를 5편으로 안내했으며, 접수과정에서 5편을 초과하거나 미달한 응모자에게는 보완토록 주문하는 등 응모자 1인당 정확히 5편씩을 접수받았다. 심사의 형평성 때문이다.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응모자수가 많건 적건 그 수를 일체 밝히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양적(量的) 우월감 과시 또는 단순한 숫자놀음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심에서 거르고 또 걸러진 5명의 작품 25편이 본심으로 넘겨졌다. 본심으로 넘어가는 작품들은 응모자 성명 등 인적사항이 완전히 삭제됐다. 올해 심사위원은 세 분이었는데, 채점(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심사는 심사위원간의 작품추천 및 토론방식이 아닌, 심사위원 개별적으로 매 작품마다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각각 점수를 매겨나가는 채점방식이다)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의 심사진행 중에는 심사위원끼리도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모르게 진행됐다.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담당했으며, 본심은 권순자 시인(심상등단,주변인과 시편집위원), 신지혜 시인(현대시학등단, 뉴욕예술인협회장), 하상만 시인(문학사상등단, 1회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당선) 등 초·중진을 가리지 않고 선발·위촉된 분들이 맡았는데, 주어진 시간을 초과하면서까지 참으로 신중하고 꼼꼼한 평가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들 심사위원은 모두 시단에서 촉망받는 비교적 젊은 문재로써 응모작품에 대한 보다 신선한 시선, 예리한 관조,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할 정도의 집중력 등으로 심사에 임해 '원 오브 뎀(One of Them)'을 선택하는 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고 평가된다.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이나 낙선작에 의견 등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한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어떻게 둘 것인가를 놓고 매번 크게 고민한다. 심사방식도 타 매체들과는 달리, 매 작품마다 '문법·어법·표현의 적절성', '주제와 내용의 일관성', '감동·느낌',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 '작품의 신선감·독창성', '작가적 역량·성장가능성' 등을 구체적 평가항목으로 설정하고, 그 항목들에 미리 배점을 하여 매 작품마다 똑같은 방식으로 채점 테이블을 삽입한 가운데 채점해나가는 방식으로 심사를 진행한다. 이러한 방식은 초회부터 해마다 동일했다. 이번 당선작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각 항목들에서 타 응모자들의 작품보다는 상대적으로 골고루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가 누구인지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인비(人秘)키로 한다. 문단에 적지 않게 이름이 알려진 문인들을 포함하여 기성작가들이 상당수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프라이버시 고려가 주된 이유이다.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진심어린 큰 감사와 아울러 아쉽게도 낙선된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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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외 4편 / 서상규

 

 

그도 포유류의 유전자로 태어났다

검게 때 낀 옷을 비막(飛膜)으로 접고

막대그래프로 다리를 세워 발자국들이 지나는

지하도 바닥에 거꾸로 매달려있다

생이 뒤집힌 빈 주머니로

허기가 일상이 되어

쥐의 몸통으로 엎드려있다

햇살이 고양이털무늬로 발톱을 숨긴

바깥세상을 피해 그림자의 동굴 속에서

마른 쥐꼬리 같은 손을 내밀고 있다

손금에 절망의 궤적이 음각된

굴레를 드러내놓고 있다

 

마치 잠에 빠진 듯 미동도 없는

그가 꿈속에서 날개를 펼친다

철길에 뻗은 회귀선을 따라

관자놀이에 새파란 정맥을 일구며

유년시절을 향해 날아간다

밤하늘이 따스하게 품은 달빛으로

앙상한 흉곽 가득 양력을 부풀려 닿은 간이역

어둠의 발음으로 쉰 목젖을 감싸며

사투리가 정겹게 흘러나온다

어머니가 청색으로 물든 눈물을 닦아주며

어린 왕자의 귀한 혈통인 양

젖 냄새가 흥건한 가슴으로 안아 준다

태반 속 아기처럼 낮게 엎드린

그도 포유류의 유전자로 태어났다

 

 

 

 

술패랭이꽃

 

구겨진 지폐처럼 파도가 인다

세월의 바람에 접힌 구김살이

서러운 곡절로 실려온다

아픔을 견디다보면 추억이 되듯

상처의 무늿결을 곱게 펼쳐

한 떨기 꽃을 피운 술패랭이,

보랏빛 그늘을 드리운 얼굴에

술기운이 붉게 번져있다

쌍꺼풀수술로 초승달 눈을

보름달로 열어놓았지만

세상이 그믐달로 더 어두워졌다고

지난 시절의 흉터를 휘갑친다

구차한 목숨을 세우기 위해

지독한 돈 멀미에 휘돌리며

홀씨로 날려 섬까지 팔려왔지만

장보고 같은 남정네가 없었겠느냐

속눈썹 한 짝을 뭍에 떨군

인연의 그리운 한때를

꽃술에서 자아낸 무명실로

이불홑청을 시치듯 박아나간다

명치에 말린 응어리를 더듬으며

한 땀 한 땀 풀어놓는 첫사랑에

홍자색 낯빛을 수줍게 물들이며

분내를 폴폴 퍼트린다

사내의 거친 근육으로 일렁이던

파도가 욕망에 부푼 수작을 그치고

죄지은 듯 잔잔해진다

꽃향기에서 이는 파동이

가파른 어깨에 나비의 우화를 깨운다

몽환에 휩싸인 날갯짓으로

술패랭이 꽃품에 간곡하게 안긴다

그녀의 섬이 포근하다

 

 

 

 

마의태자

 

검은 상복처럼 입성에 때 낀

태자가 왕조의 노을빛에

긴 그리메를 늘인 채 걷고 있다

성골의 후예임을 드러내는

불거진 광대뼈와 첨성단 위에 뜬

북극성처럼 형형한 눈빛

은행나무가 단풍든 금관을 씌워주며

알알이 익은 눈물방울을 떨군다

천년 사직을 일으키소서

백성들을 굽어 살피소서

땅바닥에 그림자를 엎드려 통곡하는

가로수들이 한 발 한 걸음마다

곱게 물든 낙엽을 깔아준다

군왕은 눈물을 보이지 않는 법도에

가슴 속에서 성덕대왕신종이 울립니다

만 백성을 지키지 못한 죄인입니다

어찌 하늘을 우러를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깊이 숙인 걸음에 옥쇄가 찍힌다

왕조를 하직할 게 아니라

왕권을 부흥시키겠다는 결의가

발자국에 돋을무늬로 되살아난다

머리 푼 바람이 태자의 큰 뜻을 읽고

서라벌로 파발마를 달린다

햇무리를 두른 환두대도의 칼날을

어둠이 칼집 속에 고이 품는다

밤하늘에서 폭포가 용틀임하듯 쏟아지는 

황금달빛의 물보라가

선왕들의 별자리를 새겨놓는다

혈맥이 뜨겁게 파동치는 지문으로

역대 왕의 이름을 짚으며

노숙자사내가 금강산골짜기 같은

서울역 지하도의 유배지에 든다

 

 

 

 

오이꽃

 

느낌표로 자란 오이 끝에

바짝 마른 꽃잎이 붙어있다

일생의 굴레를 두른

꽃자리에 어머니가 보인다

 

넝쿨로 뻗어 올라간 비탈에

밭 한 뙈기를 일군다

잎새의 호미질로 김을 매는

광합성에 땀방울이 돋아나

거름으로 발효되듯 뚝뚝 떨어진다

밭이랑이 뼛속 저리게 뻗은

지친 몸으로 노을을 끌고 와

초저녁별로 밥을 짓는다

달빛 분화구 같은 허기로

식구들이 밥 한 그릇을 비울 때

멀건 숭늉으로 끼니를 때운다

자식들의 열매꼭지가 자랄수록

목숨을 세우는 삶이 등을 짓누른다

강파른 세월의 궤적으로

마른 살에 주름이 늘어난다

관절이 닳은 무릎의 통증에

아무도 몰래 잠을 설치며

낮달같이 고된 일에 매달린다

변성기의 굵은 목청으로 여문

자식들이 푸른 화살을

세상 밖으로 쏘아 올린다

 

정수리의 백회혈(百會穴)에 뜬

어머니 별자리에서 번지는

오이꽃향기가 몸속 구석구석을

충만한 기운으로 밝힌다

 

 

 

 

푸른 논을 보다

 

막 떠오른 햇살로 촘촘히 짠

밀짚모자를 쓴 지리산이

섬진강의 물빛 흰 고무신을 신고

논두렁에 난 물꼬를 본다

지난밤 별빛의 꽃가루받이에

벼꽃이 하얗게 피어있다

배흘림줄기에서 입덧하듯

알슨 이슬이 청청 매달려있다

햇발에 돋아난 삽날로 고랑을 쳐

수로에 피돌기 기운을 채운다

잎사귀 푸르른 혈청과

물비늘의 백혈구가 무논에 일렁인다

오뉴월 볕이 거름빛으로 발효되어

굵은 땀방울로 맺힌다

지리산이 이맛전을 닦기 위해

모자를 벗은 선한 눈매가

황금이삭의 알곡을 닮아있다

간곡하게 풍년을 기원하며

산모같이 뱃구레를 부풀리는 논배미

뿌리 끝 태동이 잎줄기로 뻗친다

살여울을 일구며 돌아온 은어의

수박 향 비린내가 물살에 실려와

대궁 속 물관을 휘감아 오른다

하루의 충만한 노동으로

햇무리에서 노을이 풀린다

해거름에 꼴을 한 짐 진 아버지

고샅까지 마중 나온 아이의

작은 동산 그림자를 앞세워

천왕봉이 사립문을 들어선다

 

 

 

 

철새의 일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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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경위]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당선자의 응모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심사과정에서부터 작가의 역량을 보다 광범위하게 평가하여, 당선자를 보다 자신감 있게 세상에 선보이면서, 정말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공모에 당당하게 당선될 만한 수준인지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로부터 평가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번 신춘문예는 공지시 응모작품수를  5편으로 안내했으며, 접수과정에서 5편을 초과하거나 미달한 응모자에게는 보완토록 주문했다. 심사의 형평성 때문이다.

 

응모자수는 많건 적건 올해부터 한국문학방송은 일체 밝히지 않을 방침이다. 그것은 양적(量的) 우월감 과시 또는 단순한 숫자놀음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심에서 거르고 걸러진 5명의 작품 25편이 본심으로 넘겨졌다(2009년에는 10명이 본선에 올랐지만 심사위원들의 부담이 컸을 뿐만 아니라, 평가의 난맥상이 다소 감지되기도 했다. 하여, 이번에는 본선 상정 대상자를 크게 압축하였다). 본심으로 넘어가는 작품들은 응모자 성명 등 인적사항이 완전히 삭제됐다.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담당했으며, 본심은 김두한 시인(《현대시학》등단, 문학박사), 박남주 시인(《현대문학》등단), 이송희 시인(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최용석 문학평론가(문학박사, 전 중앙대 강사) 등 초, 중진을 가리지 않고 선발·위촉된 네 분이 맡아 참으로 신중한 평가 자세를 보여주었다. 초진급 위원은 보다 신선한 감각, 중진급 위원은 보다 폭넓고 깊이있는 관조 등으로 심사에 임하므로써 전체적으로 보다 객관적인 심사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이나 낙선작에 의견 등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했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어떻게 둘 것인가를 놓고 이번에도 크게 고민했다. 심사방식도 타 매체들과는 좀 달리, 작품마다 '문법·어법·표현의 적절성', '주제와 내용의 일관성', '감동·느낌',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 '작품의 신선감·독창성', '작가적 역량·성장가능성' 등을 구체적 평가항목으로 설정하고, 그 항목들에 미리 배점한 가운데 채점하는 방식으로 심사를 진행했다. 그렇기에, 당선작은 그와 같은 항목들에서 고루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가 누구인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인비(人秘)키로 한다. 문단에 적지 않게 이름이 알려진 문인들을 포함 기성작가들이 상당수 있기에 그분들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으로, 이러한 방침은 계속 이어갈 것이다.

 

당선은 되지 못했을지라도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과 진심어린 감사를 드린다. 다음 기회에도 큰 관심과 함께 도전장을 다시 꼭 던져주실 것을 아울러 부탁드린다.

 

―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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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의 흙 외 4편 / 하상만

 

 

땅을 한 삽 퍼서 화분에 담으니
화분이 넘친다
한 삽의 흙이 화분의 전부인 것이다

언젠가 길거리에서
물을 먹고 있는 화분을 지켜보았다
물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은
한 송이 꽃이었다

꽃에게는 화분이 전부였다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한 삽의 흙이면 충분했다

우리가 한 삽의 흙이라 부를 만한 것들이 있다
이를 테면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동요를
따라 부르던 시간,
열이 난 이마에 올려놓은
어머니의 손
그녀가 내게 전송해준, 두 개의
귤 그림
떨어져 있어도 함께한 것들을 생각나게 하는
짧은 문자 메시지들
그것들은 신이
미리 알고 우리 속에 마련해 놓은
화분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 속에서 꽃 피는 일은 자연스러웠다

 

 

 


따뜻한 종소리



보리차를 마신 후
컵을 두 손으로 안는다
 
컵이 아직 따뜻하다
내가 언제 이렇게 컵을 간절히
안았던 적이 있었나

컵은 보리차의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다

누가 잠시 머물렀던 기억으로
빈 컵이 나를 데우고 있다

이 기억을 나도 누군가에게로 옮겨 가야하리라

겨울이다
차가운 세상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
구세군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번 데워진 것은
식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전도되고 있는 것이다

따뜻한 종소리가 온 세상에 퍼지고 있다

 

 



간장

콩자반을 다 건져 먹은 반찬통을 
꺼내 놓는다. 반찬통에는 아직 
간장이 남아 있다. 
외로울 때 간장을 먹으면 견딜 만하다.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내가 일으키려할 때
할머니는 간장을 물에 풀어오라고 하였다
몸은 잔뜩 부어올랐지만 가벼운 영혼을
붙잡기엔 아직 덜 무거웠다.

나는 들어서 알고 있다. 할머니가 젊었을 때
혼자 먹던 것은 간장이었었다는 것을.
방에서 할아버지와 시어머니가 한 그릇의 고봉밥을
나누어 먹고 있을 때
부엌에서 할머니는 외로웠다고 했다. 

물에 풀어진 간장은 뱃속을 좀 따뜻하게 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운을 주었다.
할머니가 내게 마지막으로 달라고 한 음식은
바로 그런 간장.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할머니는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었다.
수년 째 자식들은 찾아오지 않던 그 방
한 구석엔  검은 얼룩을 가진 그릇이 놓여 있었다.

내가 간장을 가지러 간 사이 할머니는
영혼을 놓아 버렸다. 물에 떨어진 간장 한 방울이
물속으로 아스라이 번져 가듯
집안은 잠시 검은 빛깔로 변했다.

비로소 나는 할머니의 영혼이 간장 빛이었다는 깨달았다

나는 할머니의 손자이므로 간장이 입에 맞았다
혼자 식사를 해야 했으므로 
나는 간장만 남은 반찬통을 꺼내 놓았다

 

 

 

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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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하늘
날아다니는 잠자리 날개 끝에
찍혀 있는 점이 없다면
잠자리의 날개는
가벼워 보이리라

바람을 제어하는 날개의 묵직한 힘은
저 점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손톱은 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손을 지탱하기 위해
살 속에서 나오는 뼈로 만든 점

어둠 속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첨탑 위의 불빛들
온몸을 세워 마침표를 찍고 있었다

나도 이렇게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에 점 하나 찍어 놓을 것이다

 

 



사막



띄엄띄엄 나무가 서 있어
여기는 사막이야
사막에서는 나무가 띄엄띄엄
서 있어야 해

사막에서의 생존법칙이란 그런 거지
뿌리가 닿지 않게
되도록 멀리 서는 것
그래서 각자 살아남는 것

우리 곁에 서서 연리지라도 되어 불까
너는 물었지

그러나 나의 토양은 사막인 걸
일주일에 한 번
또는 이 주일에 한 번
그것도 안 되면 한 달에 한 번
그렇게 만나는 것으로
족해

어디에 태어났는지가 중요해
뿌리를 가진 것들이
환경을 바꾼다는 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지구가 둥근 것도 나에겐 불행이야
저 멀리 나를 향해 흔들던
잎사귀 없는 너의 손만
볼 수 있었으니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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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우주는 점이었다. 그 점이 고온과 고압을 견디지 못하더니 터졌다. 빅뱅이라 부르는 이 사건으로 우주는 생겨났고 지금도 끝없이 팽창하고 있다. 

시골에서 보내던 몇 년. 봄이 오면 집 앞에 피어있던 목련을 자주 쳐다보았다. 목련도 점이었다. 그 점에서부터 몽우리를 만들더니 마침내 터지는 그곳에 꽃을 피웠다. 벌과 나비들이 꽃가루와 향기를 몸에 묻혀 날아갔다. 나는 그것이 우주가 팽창하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겼다. 

내 속에도 작은 점이 찍혔다. 그 점 역시 스스로를 견딜 수 없어 하더니 몽글몽글해졌고 가슴을 가득 채울 만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어느 날 뻥뻥 터지기 시작했다. 터져 나온 조각들이 시였다. 

과학책을 읽고 읽던 찰나 당선 연락을 받았다. 나는 아주 조금씩 붉게 변하던 별과 그 별을 매일 밤 관찰하고 기록했던 과학자를 떠올렸다. 그 별은 우주 팽창의 증거였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해 매일 밤을 지새우던 과학자는 내게 시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시 한편을 쓰기 위해 밤을 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나를 넓혀가던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직 몽긋몽긋 솟아오르는 점들이 내 속에 더 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도 그 점들을 스스로 눌러 터트려 버리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삶에 변명거리를 마련해준 심사위원님들과 한국문학방송에 감사드린다. 점이었던 나를 세상으로 터트려주신 어머니께 감사드린다.


 

 

 

[심사경위]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당선자의 응모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삼기로 애초부터 계획을 세웠다. 그것은 심사과정에서부터 작가의 역량을 보다 광범위하게 평가하여, 당선자를 보다 자신감 있게 세상에 선보이기 위함이다.

이번 신춘문예는 공지시 응모작품수를  5편으로 안내했으며, 접수과정에서 5편을 초과하거나 미달한 응모자에게는 보완토록 주문했다. 심사의 형평성 때문이다.

총응모자는 236명, 작품수로는 1,180편이었다. 예심에서 거르고 걸러진 10명의 작품 50편이 본심으로 넘겨졌다. 당초 5명의 작품 25편 정도만 본심에 부치려 작정하였으나 예상 외로 우수 작품이 많이 인지된 관계로 그 대상을 늘렸다. 본심으로 넘어가는 작품들은 응모자 인적사항이 삭제됐다.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담당했으며, 본심은 김신영 시인(동서문학 등단, 문학박사)과 배찬희 시인(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인천여성문학회 이사), 석정호 시인(월간문학 등단, e문학회 회장), 최용석 문학평론가(문학박사, 중앙대 강사 역임) 등 네 분이 맡아 참으로 진지하고도 꼼꼼한 평가 자세를 보여주었다.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이나 낙선작에 의견 등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했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어떻게 둘 것인가를 놓고 시종일관 많은 고민을 했다. 심사방식도 타 매체들과는 좀 달리, 작품마다 '문법·어법·표현의 적절성', '주제와 내용의 일관성', '감동·느낌',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 '작품의 신선감·독창성', '작가적 역량·성장가능성' 등을 구체적 평가항목으로 설정하고, 그것을 미리 배점한 가운데 채점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그렇기에, 당선작은 그와 같은 항목들에서 고루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이해바란다.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가 누구인지는 인비(人秘)키로 한다. 문단에 적지 않게 이름이 알려진 문인들을 포함 기성작가들이 상당수 있기에 그분들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으로, 이러한 방침은 앞으로도 이어갈 것이다.

이번 신춘문예에는 미국, 아르헨티나, 호주, 독일, 중국 등 다수의 해외동포를 비롯해 서울, 인천, 경기 등 수도권은 물론 부산, 경남, 울산, 대구, 경북, 광주, 전남, 전북, 대전, 충남, 충북, 강원, 제주 등 전국 각지로부터 작품이 접수됐다.

당선은 되지 않았을지라도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다음 기회에도 큰 관심과 함께 도전장을 던져주실 것을 아울러 부탁드린다.

―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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