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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해가 아니다 / 박규현

 

 

친애하는 메리에게

나는 아직입니다 여기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눈이 흩날립니다 눈송이는 무를 수도 없이 여기저기 가 닿고요 파쇄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 넣으면 발치에 쌓이던 희디 흰 가루들 털어도 털어도

 

손가락은 여전합니다

사람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사람은 가장 보편적인 성격을 갖게 될 것입니다

 

녹지 않으니까

착하다고 말해도 되나요

 

의심이 없을 때

평범한 사람을 위해

 

젖은 속눈썹 끝이 조금씩 얼어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극야로부터 멀어지고 싶고

 

장갑을 끼지 않아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나에게도 손이 있다니 나무들을 베어 버릴 수 있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메리에게 답장을 씁니다

천사 혹은 기원이 있을 곳으로 눈은 그칠 줄 모르고 눈밭에 글씨를 써도 잊혀지는 곳으로 우리가 전부여서 서로에게 끌려다니는 곳으로

 

눅눅한 종이뭉치를 한 움큼 쥐고 있었는데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가 소원하고 희망해 온 사람

 

무겁고 불편한 폭설입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쓰러져 있어 그들의 눈을 빌립니다 그는 천 개의 눈을 가진 이가 될 것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메리, 나는 겨우 있어요

내일과 같이 여전히

 

 

 

 

 

[당선소감] 도망치긴 싫었다버티다보니 해볼 만했다

 

쓰고 싶은 시와 쓸 수 있는 시가 서로 달랐다. 당선된 시편은 그동안의 기록이다.’

 

고등학교 시절, 작은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을 때 작성한 당선 소감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늘 그런 마음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모든 걸 그만두고 싶던 내게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말해준 이가 있었다. 존경하는 동료인 그의 말을 들은 뒤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와 앞으로의 다짐은, 나를 버리지 않기 그리고 밀어내지 않기, 견뎌보기, 내버려 두기다. 이렇게 여기자 나는 조금 괜찮아졌다. 나는 내가 해볼 만한 것 같다!

 

때론 삶이 극도로 평범해 어떠한 사건이라도 각별히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에 대해서는 한참을 골몰해야 했다. 다 쓰기 전까지는 집에 갈 수 없는 기분. 집이면서도 그랬다. 집인데 왜 집에 가고 싶어지는 건지. 집이 진짜 있기는 한 건지. 그럴 때는 일단 누웠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고 나한테 모질게 굴던 사람들의 얼굴을 천천히 헤아렸다. 우는 게 싫고 부끄러운 것도 싫어서 울고불고하다가 이를 갈았다. 팔뚝을 깨물어 남은 잇자국을 만지면서 내 이야기를 더 잘하겠다고 다짐했다. 박규현은 그냥 박규현이므로.

 

나를 늘 응원해준 가족, 친구 그리고 서울과기대 교수님들과 아낌없이 지도해주시는 나희덕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내 시의 가능성을 믿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최선의 최선까지 밀고 나가는 사람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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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랭보의 시' 떠올리게 해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선정

 

2022년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다양한 세대의 목소리와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응모작이 많았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동시대인들의 절박한 생활, 희망을 찾고자 하는 고투 등이 반영돼 있었다.

 

본심에서는 네 분의 작품을 놓고 토론과 숙고를 거쳤다. 박서령의 재수강은 서사를 이어가며 감정을 표출하는 데 능숙했다. 그러나 편지 형식의 산문성으로부터 도약하는 힘이 부족했다. 박언주의 도둑 잡기에서는 생존과 죽음, 세계를 향한 질문들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 이미지나 음악성을 가려버리는 설명적 진술들은 아쉬움을 키웠다. 임원묵의 새와 램프는 끊어질 듯 이어가며 이동하고 합류하는 언어 실험이 새로웠다. 그러나 언어는 평이해 가능성을 측량하기 어려웠다.

 

만장일치로 박규현의 이것은 이해가 아니다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읽는 줄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흡입력에 놀랐다. 이어질 수 없는 문장과 문장들의 연접을 통한 긴장감, 착란적 비약, 예상을 건너뛰는 불연속성에도 다 읽고 나면 이미지가 선연히 발생하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그는 사소한 일상의 가치를 애써 찾아가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나는 겨우 있어요/내일과 같이 여전히라고 기록하는 시. 간신히 발설하는 이 미세한 약음이야말로 거대 담론이나 외치는 소리보다 시적 울림이 크다는 것을, 시는 침묵하기겨우 말하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새로운 시인에게 축하를 드린다.

 

심사위원 황지우 시인 손택수 시인·노작 홍사용 문학관 관장 김이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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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실수(有實樹) / 차원선

너의 눈 안에는 열매를 맺으려 하는 나무가 있다

너의 눈에 나무를 심은 사람이 저기 소각장에 앉아 있다

자신의 옷을 다 태우고도 헐벗은 너를 보고 있다

멀뚱히 있는 너와 떨어진 잎을 한데 덮는다

앙상해지도록

베고 누웠다

잔향 더미로 만든 모래시계

마른 낙엽을 주워 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왜 내 얘기를 듣고 있어요?

낯선 사람인가 봐 쓸쓸하다고 하면 데려갈 텐데

그대로 있어요

반딧불이 무리지어 올리는 온도

올라가는 건물

빈 곳은 비어있었던 적이 없고

마지막으로 옮긴 불씨 조각이 다 자란 나무의 잎에 옮겨붙는다

오랫동안 그를 알았다

열매를 남긴 나무, 앨범에 적히고

눈 안에 마른 씨앗을 품던 자리가 바스러져 날아간다

몇은 땅으로 몇은 모를 곳으로

 

[당선소감] "내가 머물렀던 자리 돌아봐주변에 귀 기울일 것"

 

12월의 당선 소식은 그동안 내가 머물렀던 자리들을 되돌아보게 했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내가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했던 날이 있다. 그 사람에게 내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몰라도 나에게는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진심으로 떨리는 일이었다. 그 사람은 담담하게 내가 쓴 시를 읽어주었고 그때의 그 벅찬 순간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줬다.


어디에나 쓸쓸한 소식이 번지던 한 해가 지났다. 이겨내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시간은 흘러 새해가 밝았고 크게 변한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1년을 더 보낸 내가 조금 더 성장했음을 느낀다. 무언가를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삶의 순간들에 주목하는 시를 써나가고 싶다. 나와 함께하는 시간들을 담아나갈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기회를 준 한국경제신문과 내 시에서 가능성을 봐준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같은 자리에서 말없이 나를 헤아려준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도 감사드린다. 혼란스러운 날에 그들이 있어 말하고 싶은 것들을 변함없이 써내려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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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이미지가 눈에 생생기교와 비약 참신

 

본심에서는 네 분의 시를 다뤘다. ‘전래동화’ 외 네 편은 직설적인 언어로 기성세대와 맞서는 자세가 만만치 않았다. 다만 그것이 사회와 깊이 부대껴서 얻은 것은 아니어서 시야가 좁고 다소 막연해 보였다. ‘가장 내밀한 스펙트럼’ 외 네 편은 흡입력과 호소력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시에서 흐름을 끊는 직접 발화를 자주 사용하면서 자신의 장점을 잘 살리지 못했다. ‘어둠’ 외 네 편은 과감한 생략과 거침없는 반복 등 난숙한 화법으로 이목을 끌었다. 다만 논리가 시를 압도하는 지점이 가끔 눈에 띄었고, 최근 시의 스타일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침윤된 것은 아닌가 하는 혐의도 받았다. ‘유실수’ 외 네 편은 각각의 시마다 이미지를 극적으로 쌓아가면서 심화시켜 가는 상상력이 돋보였다. 본 적 없는 기교와 비약이지만 우리는 이 상실에 맞닥뜨린 자의 눈에 비친 낯설고 속절없이 슬픈 풍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유실수’ 외 네 편을 응모한 차원선 씨를 당선자로 정했다. 게임의 흐름을 바꾸지 못하면 아류가 되기 쉽다. 우리는 차씨가 익숙한 새로움을 되풀이하기보다 낯선 전환점을 만드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인숙 시인, 손택수 시인·노작 홍사용 문학관 관장, 장이지 시인·제주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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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의 전집 / 김건홍

 

 

그 집의 천장은 낮았다.

천장이 높으면 무언가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그 집에 사는 목수는 키가 작았다.

그는 자신의 연인을 위해 죽은 나무를 마름질했다.

 

목수보다 키가 큰 목수의 연인은 붉은 노끈으로 묶인 릴케 전집을 양손에 들고 목수를 찾아갔다.

 

책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커다란 관이 돼버렸다고

목수는 자신을 찾아온 연인에게 말했다.

천장에 머리가 닿을지도 모르겠다고 연인은 답했다.

 

해가 가장 높게 떴을 때 마을의 무덤들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목수는 연인이 가져온 책 더미를 밟고 올라서 연인과 키스를 했다.

목수의 입에서 고무나무 냄새가 났다.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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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매순간 불확실한 세계무한한 시점으로 포착하겠다

 

어디에서 어떻게 세계와 마주해야 하는지 늘 고민했다. 그런 고민 속에는 내 존재 또한 한 곳에서 정립되리라는 믿음과 동시에 마음 한편에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는 어쩌면 세대적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디서 세계를 보고 있는지, 아스팔트 위에 서 있는지, 허공에 떠 있는지, 바다 위를 부유하고 있는지 불확실하고 보이지 않았다. 이는 정작 눈앞에 놓인 세계가 아닌, 나 자신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시를 써나가면서 들곤 했다. 시를 통해 그 방향을 조금씩 틀고 있는 것 같다.

 

시는 내 위치를 때론 작은 의자 위로, 때론 발코니로, 숲으로, 이국으로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곳으로 옮겨 놓곤 했다. 시는 내게 무한한 시선과 시점으로 세계를 포착하는 즐거움을 알려줬다. 내 앞에 매 순간 달리 놓이는 세계에 눈을 돌리겠다. 축복처럼 주어진 현상들과 사물들을 깊고 차분히 감각해 보겠다.

 

부족한 글의 가능성을 믿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부족한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린다. 지난 1, 내 시보다 먼저 내 존재를 헤아려주신 김민정 선생님께, 흐릿하게 서 있는 나를 언제나 선명한 곳으로 인도해주신 이수명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드린다.

 

반짝이는 문학을 위해 함께 분투하는 명지대 원우들과 진심으로 서로의 시를 빚고 서로의 힘이 되어준 시 스터디 의 문우들에게, 마지막으로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 나 자신보다 한발 먼저 나를 믿고 응원해준 지영에게 감사드린다.

 

 

 

 

[심사평] 문학적 상투성 답습 않는 시적 압축미 돋보였다

 

올해 한경 신춘문예 시 부문은 예년에 비해 응모작 수준이 높았다. 문학적 상투성을 답습하지 않은 새로움을 보여주면서 시적 압축미가 돋보이는 작품을 뽑고자 했다. 특히 고전적인 세계를 다룰 때도 그 고전적인 것이 과거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작품을 뽑고자 했다.

 

당선작을 놓고 끝까지 겨룬 것은 송은유와 김건홍 작품이었다. 송은유의 화분의 위의(威儀)’는 언어를 자기식으로 감각 있게 형상화하는 능력이 수준급이고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대의 풍경들을 그릴 줄 안다는 점이 매혹적이었다. 반면 부분 부분 문학적 상투성을 극복하지 못한 표현들이 아쉽다는 지적이 있었다.

 

숙고와 토론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한 김건홍의 릴케의 전집은 간결하고 압축적이면서도 비의와 상징성이 풍부하다는 점, 열린 서사 구조가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고 긴 여운을 남긴다는 점이 동봉한 시편들의 편차마저도 금방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이게 했다. 앞으로 한국 시의 새로운 지층의 결을 보여주리라 기대하며 흔쾌하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아울러 모든 응모자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송재학 시인 손택수 시인(노작 홍사용문학관 관장) 안현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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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의 잠 / 설하한

 

 

뜰채에서 튀어 오른 물고기가 수조로 돌아간다 물고기는 잠을 잔다 비가 수면을 두드린다 물살이 물고기를 조금씩 밀어낸다 한 물고기는 뭍에서 헐떡거리다 죽는다 물고기들의 미래에 놓인 것은 얇고 길고 번쩍이는 흰 것

 

물고기는 꿈을 꾼다 롤러코스터는 트랙을 달린다 정해진 낙차를 따르는 플롯 눈이 먼 늙은이는 젊었을 때 괴물이 낸 문제를 풀어 왕이 되었다 비가 끝없이 내렸다 그는 진창이 된 길 위에서 지쳐버렸다 자신을 이끄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눈물 흘린다 그는 쓰러져 숨을 몰아쉬다 죽었다

 

몸 위로 칼날이 떨어지는 꿈을 자주 꾼다 어떤 사람들은 물로 뛰어 내린다 바깥은 있습니까 나는 잠에서 깬다 마적 떼는 도착하지 않았다

 

비는 그치지 않는다 딸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오빠를 땅에 묻고 죽는다 죽은 반역자와 왕좌에 앉은 사람 하나의 트랙을 번갈아 달리는 열차들 비가 무덤의 흙을 다진다 나는 슬프지 않으면 두려워진다 우리가 신의 손등 위에 있는 공깃돌이라면 어쩌지? 끝도 없이 떨어지는 꿈을 꾼다

 

나는 하루에 세 번 약을 먹듯 떠올린다

 

죽은 늙은이의 볼에 비늘처럼 일어난 피부, 그것을 적셔주는 빗물 같은 것, 가축의 숨통, 물고기의

 

깊은 잠.

 

 

 

 

2019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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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세계를 다른 리듬으로 구부릴 수 있는 쓰고 싶어"

 

당선되면 기쁠 줄 알았다. 누군가의 몫을 빼앗아 버린 것 같다. 선진국에서 소비하는 일이 후진국을 착취하는 일임을 안다. 하지만 엉망으로 취하는 날이 많고 생활을 바꾸려 하진 않는다. 당선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도 나다. 나는 무언가 비틀린 것 같다. 관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주지 않고 적당히 살다 죽고 싶다. 친구와 술을 마시다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무언가를 먹을 것이고, 차지할 것이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나는 세계를 조금 구부려보려 한다. 글을 쓰다 보면 세계가 다른 리듬 쪽으로 조금은 휘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믿어보기로 한다. 누구를 위한 예의이고 누구를 위한 최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게 내 예의이고 최선인 것 같다.

 

좌절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 같다. 나 말고도 누군가가 쓰고 있다는 것, 읽고 있다는 것. 이런 사실이 글을 다시 쓸 수 있도록 도왔다.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하는 글에도 세계에 대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누구든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족한 시를 좋게 봐준 심사위원님들과 지면을 내어준 한국경제신문사에 감사드린다.

 

글을 읽고 쓰는 이들에게 감사와 응원을 보낸다. 지금까지 내 시를 읽은 사람들에게 감사를. 앞으로 내 시를 읽어줄 가족, 친구, 독자, 선생님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지금까지 첫 독자였고, 앞으로도 첫 독자일 애인에게 감사를. 그리고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심사평] 신화적 상상력을 이미지로 자신만의 세계 만들어내

 

2019 한경 신춘문예 응모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시적 존재를 증명했다. 특히 시에 대한 실버 세대의 관심이 더욱 많아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심사였다. 취업과 이력서, 알바, 고시원 등의 시어로 대표되는 젊은 세대의 고뇌와 실존의 깊이를 함께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응모작에서는 시의 잠언화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시는 한마디의 잠언을 위해 수만 마디의 시적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는 구체적 일상과 실존의 경험을 통한 살아 있는 이미지, 사물을 바라보는 번뜩이는 눈, 자신만의 문장을 가진 신인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을 공들였다.

 

본심에서 오랜 숙고 끝에 최종적으로 설하한, 신진숙, 이주호가 남았다. 이주호의 빙붕공항은 매력적인 작품이다. ‘펭귄은 지금 우리 사회 청년들을 가장 적확하게 은유하면서 빙하를 향해 날아오르는 비상의 욕망을 발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슷한 착상의 기성 시가 몇 편 있다는 점에서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신진숙의 ㅁ이 자라 ㅂ이 되도록은 발상이 새로웠다.

 

설하한의 물고기의 잠은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 설하한은 큰 스케일과 자신만의 문장을 가진 응모자였다. 신화적 상상력을 육화해 시의 소재로 삼고, 떠돎과 회귀라는 서사를 시의 구조에 장착할 줄 안다. 이런 이미지와 진술의 조직력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그의 시는 이미지가 살아 있었다.

 

심사위원 유안진, 손택수,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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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살 / 조윤진

 

 

입 안 무른 살을 혀로 어루만진다

더없이 말랑하고 얇은 껍질들

 

사라지는 순간에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세계들이 뭉그러졌는지 세어본다

당연히 알 수 없지

 

시간은 자랄수록 넓은 등을 가진다

 

행복과 안도가 같은 말이 되었을 때

배차간격이 긴 버스를 기다리지 않고 타게 되었을 때

광고가 다 지나가버린 상영관에 앉았을 때

나는 그렇게 야위어 간다

 

뚱뚱한 고양이의 부드러운 등허리를 어루만졌던 일

운동장 구석진 자리까지 빼놓지 않고 걷던 일

그런 건 정말 오랜 일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린 우유의 하얀 막처럼

손끝만 대어도 쉽게 쭈그러지지

 

톡 건드리기만 해도 감당할 수 없어지는

만들다 만 도미노가 떠올라 나는

못 다 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잘못을 빌었다

 

눈을 찌푸릴수록 선명해지는 세계

 

얼마나 더 이곳에 머무르게 될지

아직 알 수 없지

 

부드럽게 돋아났던 여린 세계들

그런 세계들이 정말 있었던 걸까

 

 

 

 

201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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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휘청거려 두려워도, 로 이야기하는 시인 될 것"

 

나는 너무 작고 약해 번번이 휘청거렸다.

 

언젠가 끝내 무너져버린 나를 발견하게 될까봐 무서웠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자주 울었다. 열심히 살지 않았다고,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많았다. 못다 한 최선 때문에 자주 울었다. 그저 그 모습 그대로의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진심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시라고 생각했다. 온전한 나를 시에 담고 싶었다. 늘 진심이었다.

 

이런 나의 진심을 읽고 최고의 날을 선물한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시를 쓰는 마음가짐을 가르쳐주신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님들께도 감사 인사를 드린다. 포기하지 않도록 기다려주고 이끌어주신 모든 선생님께 이 기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지금까지 나와 보폭을 맞춰 옆에서 걸어준 시모임 문우들, 문학을 품은 명지대 학우들, 온 마음을 다해 안아준, 나의 반짝이는 장면들에 함께한 모든 이에게 벅찬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내 가족들에게 믿어줘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말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는, 내가 아는 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보낸다.

 

나는 아마도 삶이 지속되는 한 계속해서 휘청거릴 것이다. 휘청거리다 무너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까봐 두려워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늘과 같은 순간을 믿어보려고 한다. 그저 내 자신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여기 있다고 끊임없이 말해보려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늘 진심으로.

 

 

 

 

[심사평] 젊음의 비애가 눈앞에 생생, 소박하지만 진실해서 감동적

 

‘2018 한경 신춘문예응모자가 작년에 비해 두 배 정도 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들으며 심사에 들어갔다. 이번 응모작들은 대체로 실감이 사라진 아득한 세계, 점차 희미해지는 너와 나의 존재감, 그것의 기묘한 알레고리화(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양식) 등을 공통 배경으로 삼고 있었다.

 

1차 관문을 너끈히 통과한 응모자는 박현주, 박은영, 양은경, 안정호, 전수오, 김보라, 이서연, 전명환, 서주완, 조윤진이다. 뒤의 세 명을 최종 집중토론 대상으로 삼았다. 전명환의 도출한 적 없는 윤리성은 못을 박다가 벽이 전부 무너져 버린 상황의 아이러니가 인상적인 작품이었으나 제목이 생경했고, 알레고리의 타점이 불명확했다. 서주완의 인간적인 새들의 즐거움세계는 좀먹은 탁자에 불과했지만/나는 어떤 것도 올려놓지 못했다는 좋은 구절이 짜임새 있게 변주·확장·의미화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숙고와 토론 끝에 조윤진의 새살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못다 한 최선잘못이 되어 버리는 현실에서 존재감을 확인할 길 없는 젊음의 비애를 선명한 이미지로 그리는 능력이 좋았다. 상처 뒤 새살을 꿈꾼다는 뻔한 상투성을 극복해내는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는 전개도 인상적이었다. 소박하지만 진실했고 그래서 감동이 있었다. 심사자들의 몫은 여기까지다. 새로운 시인에게 무한한 축복이 함께하기를.

 

- 심사위원 : 김수이(문학평론가) 문태준(시인) 박상수(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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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시간 / 주현민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치며 싸락싸락 소리가 났다.

라디오에서 전쟁의 종식을 알리는 앵커의 목소리가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쁨과 안도가 터무니없이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어두운 언덕을 넘어가고 있는 군인들의 긴 행렬을 떠올렸다

바게트 굽는 냄새가 식탁 위로 흘러 넘쳤다

 

하지만 불안이 커튼처럼 남겨져 있었다

 

어쨌거나 다시 자랄 것이다

식물이나, 아이나, 어둠 속에 수그린

수련이나, 오래 구겨져 있던 셔츠 같은 것이

교사나 수렵꾼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생활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뜯어진 커튼처럼 그렇게 남겨져 있었다

 

어머니는 인간이 물고기로부터 태어난다고 믿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끝내 믿을 수 없어 했다

 

이곳에 돌아오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반쯤만 돌아온 사람도 있었다

식은 총구에서 나는 싸늘한 냄새를 맡으며

수프를 먹었고, 기도를 했고, 달력을 넘기며

고작 이 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했다

 

칼로 가른 물고기 뱃속에는 구슬이 가득했다

종종 정신이 돌아오는 늙은 어머니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종려나무야, 다른 신발을 쥐고 태어난 깨끗한 발아,

이것을 좀 보렴, 이렇게 아름답잖니

 

신은 언제나 우리의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단다

 

어머니는 자주 누워 있었고 집 밖에 내어 놓은 의자는 비에 젖었다

전쟁이 끝나고 좀도둑 떼가 기승을 부린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곧 사월이 오면 먹을 게 좀 생길 거다

이웃집 사람들과 매일 대화를 했다

 

이 동네를 떠나세요, 아직 젊으니까 도시로 가면 여기보단 지내기가 나을 거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누워서 중얼거리는 어머니는 조금씩 물고기의 형상을 닮아 갔다

 

오빠 마구간에서 새끼 양들이 태어났어

이상한 일이다, 신의 증거 같은 것일까?

그 양들은 옆집에서 도망친 가난한 슬픔일 뿐이란다

 

사는 게 지옥 같구나

어머니가 말했다

아직 지옥엔 도달하지도 않았는걸요

 

사월에도 눈이 내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다시 학교에 갔고

곳곳에 무너진 건물이 다시 건축되고 있었다

 

가는 물줄기 안에서 물고기 몇 마리가

더 커다란 물고기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201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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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빚 갚아나가는 마음으로 쓸 것" 당선 통보를 받고

 

오랫동안 글 쓰는 걸 좋아했지만 의심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시를 포기하려고 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아무것도 쓰지 못한 시간도 길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쓰기 시작했을 땐 더 이상 의심하지 말고 그냥 쓰자, 내가 쓰고 싶은 것에 대해서만 고민하면서 쓰자고 생각했다. 잘 써질 때도, 그렇지 않을 때도 계속 책상 앞에 붙어 있으려고 했다.

 

당선 전화를 받았을 때도 지하철 안에서 내가 쓴 시를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이제까지 시를 써온 순간들과 시를 포기하려고 한 순간들이 한꺼번에 생각났다. 그리고 함께 시를 써온 사람들이 생각났다.

 

시를 쓰면서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까지 쓰지 못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지켜봐 준 문혜원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나도 나를 믿지 못할 때 계속 써보라고 말해준 김상혁 선배에게도 감사드린다. 그리고 함께 시를 쓴 숙희 모임 사람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밤새워 이야기하곤 했던 일곱시 모임 사람들에게도 감사드린다.

 

부족한 글이지만 가능성을 믿어준 심사위원들에게 감사드린다. 이제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라는 생각에 어깨가 무겁다. 앞으로 내가 쓰는 문장의 진폭과 깊이에 대해서도 고민하면서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믿어준 분들에게 빚을 갚아나가는 마음으로 오래 써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심사평] 끝난 듯 끝나지 않은 전쟁역동적인 서사 전개 돋보여

 

‘2017 한경 신춘문예는 작가 지망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나이 제한을 없애고 새롭게 출발했다. 신춘문예 응모자는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누구나 청년 작가이니, 좋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정학명의 는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서정의 굳건함이 장점이지만 자신의 정서에만 얽매이는 정제되지 못한 표현이 더러 눈에 띄었다. 하영수의 제빵의 귀재는 재기발랄한 감각적 발상법을 습득하고 있지만 이제는 혼자만의 길을 어떻게 개척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당선작을 놓고 겨룬 것은 김대일과 주민현의 작품이었다. 김대일의 옆으로 열리는 문은 현실을 다양한 맥락으로 중첩하는 시적 사고가 묵직했다. 다만 진실성에 비해 시적 완성도에서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당선작으로 정한 주민현의 전쟁의 시간은 방송에서는 전쟁이 종식됐으나 생활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계속 중이라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세계 내전과 국내 현실의 교직을 통해 서사적으로 전개된다. ‘물고기의 상징이 모호한 것은 약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역동성이 있고 의욕이 넘친다. 당선한 주민현에게는 축하의 말을 전하고, 아울러 모든 응모자에게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김수이(문학평론가) 박형준(시인) 이영광(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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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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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제 겨우 관문 하나 통과했네요"

 

이제는 탁희에 대해 말해도 될까? 탁희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탁희는 말을 못해, 탁희는 바보 같지.’ 칠판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던 탁희의 목소리가 한데 모였다가 흩어졌다. 탁희는 짧은 머리에 긴 바지를 입고 다녔다. 탁희의 그런 중성적인 이미지와 후천적 장애가 또래에게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호기심의 표현은 늘 엉망으로 이뤄지거나 철저하게 괴롭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일어나 먼지를 털며 웃던 탁희가 정말로 싫었다. 겨울이 왔고, 우리는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탁희는 말 못해, 탁희는 바보 같지.’ 이 말을 되풀이하며 묵묵히 교실을 나서던 탁희를 지켜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 뒷모습은 너무 고요해서 나는 내가 잠시 사라져 버린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는 탁희는 내 기억의 함정이 만들어낸 거짓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쓰오카 마사노리의 ‘가네다(金田)군의 보물’이라는 시를 읽었을 때 나는 탁희가, 탁희의 그 웃음이 너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린 서로에게 유령이기를 택함으로써, 철저하게 친구임을 숨겨왔던 것 같다.

 

지금의 우리는 무엇일까? 나는 그런 시선이 되고 싶은데 내 눈은 점점 더 망가진다. 어두워지면 그냥 포기해버리고 “잘 가” 하고 인사하며 등을 돌린다. 하지만 나의 방관적 시선과 태도가 탁희와 수많은 탁희들에게 쓸모가 될 수 있다면 나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하나 똑똑하지 못하고 벅차기만 했던 제게 숨을 달아주신 김소연, 백가흠, 양연주, 장석남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저의 통곡의 문이 돼주신 권혁웅 선생님, 오래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저의 균열에 선로를 내어주신 김기택, 이원, 함돈균 선생님 감사합니다.

 

 

 

 

진짜 같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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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몸으로 기억하는 '상처'…문학적 낙천성으로 보듬어

 

2016 한경 청년신춘문예를 심사해 보니, 신춘문예로는 늦깎이지만 ‘청년’ 신인 문인의 등단에 초점을 맞춘 특성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늘어난 응모량도 그렇지만, 전년보다 젊은 감각을 지닌 언어들이 대폭 늘어난 것은 청년신춘문예의 앞날을 위해 고무적인 일이다.

 

‘달숲 공방’ 외 4편을 투고한 장우석 씨는 문장을 운용하는 단정한 품새가 돋보였다. 다만 물 흐르듯 논리적인 문장 흐름을 시적으로 전환시키는 문장의 분절, 사유의 모험이 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내던져지다’ 외 4편을 투고한 김형주 씨는 일상적 풍경을 반성적으로 포착하는 직관력이 눈에 띈다. 그러나 풍경이 직관적으로 ‘포착’된 뒤에 좀 더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시적으로 되새김질되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수생식물로 돌아가는 밤’ 외 4편을 퇴고한 최민서 씨는 내면적 상처를 일상 풍경의 ‘환상적’ 가공을 통해 변형시키려는 시도들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시가 되려면 말의 시적 변용 이전에, 사유의 시적 변용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당선작인 ‘므두셀라’ 외 4편을 투고한 이서하 씨는 당선작 ‘므두셀라’에서 보듯이 몸이 기억하는 상처를 ‘우주적 명랑함’으로 전환하는 위트와 자기 긍정성이 주목할 만하다. 삶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청년다운 문학적 ‘낙천성’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하고 싶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모든 응모자에게는 격려와 위로와 응원의 말씀을 전한다.

 

김기택(시인)·이원(시인)·함돈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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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커의 샤머니즘 / 김민율

 

 

굴러다니는 돌 하나 주워 주머니에 넣고 숭배한다

소원을 돌에게 말하고 우물에 던진다

 

대낮의 우물은 하늘을 번제하는 제단

저녁의 우물은 마력이 기거하는 당집

 

아이를 바쳤다는 소문에 이끼가 끼어 있다

물의 나이테를 열고 바깥을 엿듣는 누가 있다

두레박을 내려 몇 번이나 얼굴을 퍼올려도

제단에 바쳐진 아이가 사라지지 않는다

 

비커는 어린 시절의 설화

눈금에 다다를 수 없는 기억이 웅크리고 있다

 

수년 동안 던진 크고 작은 돌들이

내 뒤통수와 등짝을 닮은 기억을 보글거리며……

눈금 바깥을 초월하고 있다

 

물이 기포로 기포가 증기로 변하는 것은

아이의 주먹을 펼치는 주술일까

모든 손마디를 다 펼치면 아무것이란 게 우글거리는

 

이미 기억을 개종한 내가

한 손에 다른 비커를 움켜쥐고 있다

 

 

 

 

2015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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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가장 좋은 때, 가장 좋은 선물 받았다

 

시를 처음 만났을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열 손가락으로 나를 세기에 충분했던 무렵이었던 것 같다. 농부인 아버지는 십장생 그림을 잘 그리셨다. 그림 귀퉁이에 적어 넣은 글귀의 출처를 알게 된 것은 내 가슴이 한 귀퉁이였음을 눈치챌 무렵이었다.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와 노천명의 시 사슴의 구절은 꿈을 동경하듯 목을 젖혀야 읽을 수 있는 높이에 걸려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고개를 젖혀놓는 목침에 올라서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시구와 눈을 맞추곤 했다. 이것이 나와 시의 첫 만남이었던 것 같다.

 

시와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던 무렵, 주머니 속에서 웅크린 손을 꺼냈다. 잡을 수 없는 것까지 잡으려고 굵게 자라 있는 손가락이 보였다. 이 무렵 스승 오규원 선생님을 뵈었다. 내 글을 읽으시고 고개를 젖혀 내 눈을 보시며 말씀해 주셨다. “세계를 보는 눈이 있다는 한마디가 나로 하여금 나를 믿게 했고 비로소 웅크린 손이 아닌 주먹을 쥘 수 있는 손으로 시인의 첫걸음을 가다듬을 수 있게 했다.

 

홀로 걷는 밤길에 불 밝혀 주신 차주일 선생님, 늘 기도해 주시는 김효현 목사님, 무엇보다도 애태움이란 기도를 오랫동안 놓지 않으신 부모님, 첫걸음을 옮겨 심을 영토를 내어주신 심사위원 김기택, 이원, 권혁웅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된 것 같다. 첫걸음을 잘 기르겠다는 약속을 하며 고개를 젖혀 먼 곳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심사평] 우물과 비커 새로운 상상력으로 접목한 이종교배

 

한국경제신문만의 특징인 청년 신춘문예라는 타이틀답게 푸르고 뜨거운 청년정신이 깃든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투고작들을 읽으면서 낯설고 도전적인 작품이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청년의 언어에서 보고 싶은 것은 두려움이라는 불가능을 열정이라는 가능으로 바꾸는 마술이기 때문이다. 응모자들은 이 점을 한번 뒤척여보면 좋겠다.

 

김솔, 김민율, 배지영, 장우석의 작품을 두고 논의했고 최종적으로는 김민율과 배지영으로 좁혀 여러 논의를 거듭했다. 김솔의 바오밥 씨 이야기4편은 일상을 유머러스한 서사 구조로 만들어내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언어의 탄력이 약하다. 시적 긴장을 확보할 수 있는 언어를 고민해 본다면 좋겠다.

 

장우석의 이태리타월4편은 삶과 현실의 비루함을 과장 없이 풀어내는 면이 돋보였다. 심각한 진술을 언어유희를 통해 극복하는 감각도 있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약해졌다. 후반의 폭발력을 보강하면 좋겠다.

 

배지영의 크림5편은 상상력이 신선했다. 때로는 과감하고 때로는 간결한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 진술에 그치는 아포리즘이 걸렸다. 솔직한 언어와 솔직한 시적 언어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면 보다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김민율의 비커의 샤머니즘4편은 응모작 전반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집중하고 있는 세계가 보였다는 점에서 믿음이 갔다. 성실한 습작 기간을 거쳤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작인 비커의 샤머니즘은 구조가 튼실한 작품이다. 우물과 비커의 이종교배 상상력이 신선했다. 이 점이 새로운 서정성을 확보하게 했다. 우물-비커, -눈금, 기억-개종의 자연스러우면서도 정확한 전개가 내용의 설득력을 갖게 했다. 절제된 감정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니 보다 자유로운 시적 탐험을 시도해 보아도 좋겠다. 시인으로서 첫 호명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김기택·권혁웅·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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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태교의 기원 / 이소연

 

 

은빛 잠을 수집하는 뇌의 바깥에는 조용한 산책과 쇼팽의 음악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계의 관념으로 머리카락이 자라는 시간을 좋아해요 덩달아 창을 물어뜯는 별자리의 감성을, 나무 위에 앉은 곤줄박이의 감정을, 마당 앞의 바위의 감상을 좋아해요

 

그때 뇌는 주글주글한 감성과 지성을 가공하고요 나는 뜨개질 가게를 드나들기 시작합니다 바늘코에 걸린 실 한 가닥으로 일요일 붉은 공화국에 대해 점을 치는 거죠

 

그러나 굴뚝이 아름다운 공장지대로 출근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는 것은 피해야 해요 뇌는 풍경을 쪽쪽 빨아 먹고 조금씩 단단해지거든요 참 연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면 뇌가 더디게 어제의 풍경을 음미할지도 몰라요

 

뇌를 호두알로 생각하면 위험해요 뇌는 오 분간의 육류를 꼭꼭 씹는 것을 황홀해해요 하지만 나는 핏줄과 신경, 눈 코 입을 위해 십 분간의 채식을 하지요 식물성은 아이의 성격과 눈동자의 색까지 결정하니까요

 

나는 감상적인 욕조 속에서 돌고래들의 꿈을 꾸고, 뱃속의 아이는 벌써 뇌태교의 기원을 생각하는지 양수를 동동 차네요

 

 

 

 

2014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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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출산 통해 한단계 더 성장"

 

시는 가슴을 통해서 몸으로 온다. 내 몸에 잉태된 시만이 다른 나를 뱉어낼 수 있었다. 하나의 사물을 가지고, 그러니까 시가 되고 싶은 이미지를 품고 끙끙 앓지 않고서는 단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 나는 시를 잉태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그런 면에서 단 한 번의 임신과 출산이 나를 자라게 했다고 생각한다.

 

정말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당선 소식이다. ··고를 거쳐 대학과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나는 문학만 공부했다. 그런데 시인이 되는 길은 아득하기만 했다. 자주 나약해졌고 잦은 패배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좀 단단해졌던 모양이다. 이제는 두렵지 않다. 거침없이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

 

나의 따뜻한 지도교수이신 박철화 선생님과 이승하 선생님을 비롯해 중대 문창과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내가 쓴 허접한 소설을 읽어주셨던 정지아 선생님과 신상웅 선생님께는 면목이 없다. 그리고 사랑한다. 문우들은 내 전화를 받아준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받아줬다. 정말 고맙다! 다들. 당선 소식에 나보다 더 기뻐해준 전인철 선생님과 양가 부모님께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나의 사랑스러운 ‘1쇄 시인(아직 1쇄밖에 찍지 못한)’ 이병일과 아들 서진이에게 오랜만에 곰국을 끓여 먹이고 싶은 저녁이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시를 당선작으로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을 구원자라고 불러본다. 청년이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게 지치지 않고 쓰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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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음악이 깃든 전언과 정교한 문장 매혹적

 

나이 제한 탓에 응모작품 수는 여타 신춘문예에 비해 많다고 할 수 없었으나 뛰어난 작품들은 절대 적다고 할 수 없었다. 김선욱, 김선화, 박명린, 박세랑, 이소연, 임소라, 정수미의 시를 두고 고심한 끝에 최종적으로 다음 세 명의 작품을 두고 논의했다.

 

박명린의 쑥 인절미4편은 순결한 청춘의 기록이다. 자신을 그대에게 줄 인절미에 빗대는 마음이 그렇고, 밀어(密語)를 밀어(密魚)로 바꾸는 변환이 그렇고, 고백을 사랑과 동일시하는 시선이 그렇다. 그런데 청춘에는 본래 비교급이 없어서 자신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감상과 과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는 뜻이다.

 

김선화의 홈리스 소행성4편에는 단정한 말들 속에 풍요로운 사연을 쟁여 넣는 솜씨가 있었다. 사물들이 제 사연을 얘기하기 시작하면 시는 이미 다른 세계에 가 닿아 있다. ‘빛의 샤워같은 작품은 이 응모자가 풍경과 사연의 이질동상(異質同像)에 얼마나 민감한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말들이 제가 가야 할 마지막 경지까지 가지 못했다. 결구 앞에서 자꾸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이 점만 보완한다면 곧 다른 지면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소연의 뇌태교의 기원4편은 단번에 심사위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음악이 깃든 전언은 아름답고, 정교하게 구축된 문장은 매혹적이었으며 다양하게 변주되는 어조는 화려했다. 그러면서도 과장도 과소도 없이 제가 가야 할 사유의 목적지에 정확히 이르고 있었다. 시편들이 고른 성취를 보이고 있는 점도 신뢰할 만했다. 좋은 시인을 만나게 된 기쁨이 크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심사위원 최승호·김기택·권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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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 / 김기주

 

 

절간 소반 위에 놓여 있는

금이 간 화병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

물을 더 부어 봐도

화병을 쥐고 흔들어 봐도

물은 천천히, 이게

꽃이 피는 속도라는 듯

조용하게 흘러나온다

아무 일 없는 외진 방안

잠시 핀 꽃잎을 바라보느라

탁자 위에 생긴 작은 웅덩이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꽃잎보다 키를 낮출 수 없는지

뿌리를 보려하지 않았다

 

한쪽 귀퉁이가 닳은 색 바랜 소반만이

길 잃은 물방울들을 돕고 있었다

서로 붙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물방울들에게,

가두지 않고도 높이를 갖는 법을

모나지 않게 모이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무릎보다 낮은 곳

달빛 같은 동자승의 얼굴이

오래도 머물다 간다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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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모른 척 걸어가듯 시 쓰겠다"

 

시는 결코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대단한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다 솔직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 아직도 사람을 알려면 오백년은, 사랑을 하려면 천년은 걸릴 거라고 믿습니다. 모른 채 태어나 모른 척 걷는 게 유일한 특기인 셈입니다.

 

하늘이 참 좋은 날. 은대 원준 영수 인태랑 사막에다가 오줌을 휘갈기고 싶은 것이 꿈입니다.

 

박찬일 선생님과 이형우 교수님, 이성혁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보다 더 기뻐해준 추계예대 동문들, 유정이 삼겹살 때문에 우리 많이도 웃었습니다. 승빈이의 지조와 그대들의 밝음에 감사합니다.

 

하이네 시집을 들고 웃는 어느 여인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자격이지만, 역시나 침묵은 압제자를 돕는 것. 그만큼은 글을 쓰겠습니다.

 

 

 

 

 

[심사평] "여백과 침묵으로 상상력 확장한 수작"

 

청년신춘이라는 말에는 지금도 활발하게 형성되고 있는, 굳어지지 않아서 무정형인, 무엇으로 변화할지 모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직 자연 상태 그대로의 어린이가 살아있는 비밀스러운 힘이 있다.

 

선자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기성세대의 잣대로 가공되지 않은, 드러난 것보다는 앞으로 드러날 탄력이 더 풍부한 작품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물론 응모작에는 서툴고 거칠고 어눌한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함이라기보다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새로움을 한껏 내장하고 있는 가능성으로 보였다.

 

선자들의 이런 마음을 향해 한 작품이 걸어 들어왔다. 모두가 망설이지 않고 당선작으로 결정한 그 작품은 김기주의 화병이다.

 

이 작품은 조금도 화려하지 않고 신춘문예에 어울리지 않게 평범하고 어눌해 보인다.

 

그러나 대상의 작은 것까지 낚아채는 관찰은 섬세하고 정확하며, 묘사는 끈질기고, 표현에는 집중력과 응집력이 있으며, 어조는 차분한 정도를 넘어 무심할 정도로 건조하다.

 

당선자는 말을 적게 하면서 행간의 여백과 침묵을 한껏 활용해 시를 힘 있게 만들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말을 덜함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법을 알고 있다.

 

함께 투고한 내가 내 속의 나보다 겉에 있다역시 죽음에 대한 블랙 유머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 작품들을 보며 당선자에게 아직 쓰지 않은 더 크고 풍부한 것들이 있으리라는 믿음과 기대를 갖게 됐다. ‘청년신춘에 어울리는 참신한 신인을 한경 청년신춘문예의 첫 당선자로 내보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소연의 나를 기포의 방에와 강산하의 티베트 노인들의 합창은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겨뤘으나 당선의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앞의 작품은 이미지가 발랄하고 신선하지만 일부러 꾸민 것 같은 작법이 거슬렸고, 뒤의 작품은 성실한 관찰과 재미있는 모순어법이 돋보였지만 성장을 위한 습작 기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심사위원 신경림·최승호·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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