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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병 / 김기주

 

 

절간 소반 위에 놓여 있는

금이 간 화병에서

물이 새어 나온다

물을 더 부어 봐도

화병을 쥐고 흔들어 봐도

물은 천천히, 이게

꽃이 피는 속도라는 듯

조용하게 흘러나온다

아무 일 없는 외진 방안

잠시 핀 꽃잎을 바라보느라

탁자 위에 생긴 작은 웅덩이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꽃잎보다 키를 낮출 수 없는지

뿌리를 보려하지 않았다

 

한쪽 귀퉁이가 닳은 색 바랜 소반만이

길 잃은 물방울들을 돕고 있었다

서로 붙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물방울들에게,

가두지 않고도 높이를 갖는 법을

모나지 않게 모이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무릎보다 낮은 곳

달빛 같은 동자승의 얼굴이

오래도 머물다 간다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모른 척 걸어가듯 시 쓰겠다"

 

시는 결코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대단한 것 또한 아무것도 없다.’

 

다 솔직할 수는 없습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 아직도 사람을 알려면 오백년은, 사랑을 하려면 천년은 걸릴 거라고 믿습니다. 모른 채 태어나 모른 척 걷는 게 유일한 특기인 셈입니다.

 

하늘이 참 좋은 날. 은대 원준 영수 인태랑 사막에다가 오줌을 휘갈기고 싶은 것이 꿈입니다.

 

박찬일 선생님과 이형우 교수님, 이성혁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보다 더 기뻐해준 추계예대 동문들, 유정이 삼겹살 때문에 우리 많이도 웃었습니다. 승빈이의 지조와 그대들의 밝음에 감사합니다.

 

하이네 시집을 들고 웃는 어느 여인에 비하면 한없이 부족한 자격이지만, 역시나 침묵은 압제자를 돕는 것. 그만큼은 글을 쓰겠습니다.

 

 

 

 

 

[심사평] "여백과 침묵으로 상상력 확장한 수작"

 

청년신춘이라는 말에는 지금도 활발하게 형성되고 있는, 굳어지지 않아서 무정형인, 무엇으로 변화할지 모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직 자연 상태 그대로의 어린이가 살아있는 비밀스러운 힘이 있다.

 

선자들은 될 수 있는 대로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기성세대의 잣대로 가공되지 않은, 드러난 것보다는 앞으로 드러날 탄력이 더 풍부한 작품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물론 응모작에는 서툴고 거칠고 어눌한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함이라기보다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새로움을 한껏 내장하고 있는 가능성으로 보였다.

 

선자들의 이런 마음을 향해 한 작품이 걸어 들어왔다. 모두가 망설이지 않고 당선작으로 결정한 그 작품은 김기주의 화병이다.

 

이 작품은 조금도 화려하지 않고 신춘문예에 어울리지 않게 평범하고 어눌해 보인다.

 

그러나 대상의 작은 것까지 낚아채는 관찰은 섬세하고 정확하며, 묘사는 끈질기고, 표현에는 집중력과 응집력이 있으며, 어조는 차분한 정도를 넘어 무심할 정도로 건조하다.

 

당선자는 말을 적게 하면서 행간의 여백과 침묵을 한껏 활용해 시를 힘 있게 만들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말을 덜함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확장하는 법을 알고 있다.

 

함께 투고한 내가 내 속의 나보다 겉에 있다역시 죽음에 대한 블랙 유머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 작품들을 보며 당선자에게 아직 쓰지 않은 더 크고 풍부한 것들이 있으리라는 믿음과 기대를 갖게 됐다. ‘청년신춘에 어울리는 참신한 신인을 한경 청년신춘문예의 첫 당선자로 내보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소연의 나를 기포의 방에와 강산하의 티베트 노인들의 합창은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겨뤘으나 당선의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앞의 작품은 이미지가 발랄하고 신선하지만 일부러 꾸민 것 같은 작법이 거슬렸고, 뒤의 작품은 성실한 관찰과 재미있는 모순어법이 돋보였지만 성장을 위한 습작 기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심사위원 신경림·최승호·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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