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달 소묘 / 조선의
한 끝을 힘껏 당겨 가만히 놓으면
다른 한 끝이 길이 된다
활시위는 지상을 향해 팽팽하게 유지되고 있지만
과녁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없다
아직 다 그리지 못한 한쪽 눈썹
마당 모서리에 반쯤 보이는 길고양이 꼬리
뒤꼍 항아리 돌아 핀 흰 철쭉꽃이거나
추녀를 넌지시 들어 올린 풍경소리거나,
어둠이 빛을 좇아 하늘로 오르기 시작하면
비어 있는 그늘에 풀씨들이 날아들어
지상의 벼랑 위에 피는 꽃들은
극한의 향기를 오로라의 남극으로 잇는다지
지하도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전리층의 프리즘 속으로 사라지고
한 시절 끝 간 데 없이 오로라와 연결된
달빛의 통로를 빠져나오면
활시위의 과녁 위다
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풍경소리가 추녀 끝 아래쯤에서 멈추기를 기다려
당신의 눈썹으로 달을 그리는 일,
그 끝이 다른
한 끝의 길이다
[당선소감] “나의 흔들림 묵묵히 지켜본 아내에 감사”
새벽 6시, 농원을 향하여 차를 달립니다.
아침햇살과 첫인사를 나누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해보다 먼저 일어나고 해보다 늦게 귀가하는 농부,
나무와 생활한 지 30년 세월이 지났습니다.
본격적으로 나무와 생활하기 위해 오래 몸담았던 언론사를 7년 전에 그만두고, 주목·영산홍을 전문적으로 기르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틈틈이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글쓰기의 매력에 고단함도 잊은 채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지는 삶의 늪 속에서도 여명처럼 밝아오는 그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릅니다.
나무는 땅에 심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심는다는 것을 알기까지 뼈를 깎는 많은 수업료를 지불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늘을 향한 나무가 하나의 몸짓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 나무 아래 수백 번 무릎을 꿇어본 사람은 압니다.
기다림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기다림이 얼마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글쓰기의 기초를 놓아주신 고 문도채 시인님과, 열린시 회원님들은 물론 기독신춘동인님들과 무엇보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농민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나의 흔들림을 지금껏 묵묵하게 지켜본 아내(성경낭송가 김정희)와 두 아들 신언, 신의에게도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이제 납작하게 엎드려 겨울나기를 하는 농부,
초봄이 올 때까지는 좀 게으르고 싶습니다.
[심사평] “시적 대상에 대한 진술이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워”
이번 신춘문예 시 부문의 본심에 오른 것은 모두 열두분의 응모작 60편이었다. 시적 형상성과 정서의 균형을 잘 지탱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하현달 소묘> <곡우에 들다> <내 이를 물고 간 새는 언제 오나> 등 3편이었다.
<곡우에 들다>의 경우는 시적 대상을 자기 방식대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런데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비약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어느 대목은 디테일에 집착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시상의 흐름에서 어떤 균형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내 이를 물고 간 새는 언제 오나>의 경우는 일상의 경험을 민속의 세계와 연결하는 상상력의 기발함이 돋보인다. 그러나 지나치게 서술적인 구절들이 많아서 시적 언어의 긴장을 해치기도 한다.좀 더 압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이번에 당선작으로 뽑은 <하현달 소묘>는 시적 대상에 대한 진술 자체가 섬세하면서도 날카롭다.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을 동시에 포착해내는 시인의 언어 감각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주적 공간과 그 질서에 대면하여 시적 주체의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을 이렇듯 섬세하게 표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앞으로 더 좋은 시적 세계의 성취를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김송배 시인, 권영민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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