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터너* / 우경주
무음의 협연이 시작되고 긴장이 흐른다
그는 연주자의 그림자
연주자와 한 몸이 되는 순간, 페이지가 넘어간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울려 퍼지고
여든여덟 개 건반을 눈으로 넘나들며
숨소리도 나지 않게
열 개의 손가락과 호흡을 맞춘다
그늘에 묻힌 그의 손끝에서
갇혀있던 갖가지 음표가 걸어 나오고
분위기는 날개를 단다
음악의 끝부분이 가까울수록
연주자의 두 손 보다 앞서가는 페이지터너의 눈
음의 선율에 발을 헛디딜까
악보를 넘기는 손끝에 진땀이 흐른다
드디어 절정이 고개를 꺾으면
피아니스트의 손이 건반에서 조용히 가라앉고
연주자의 머리위로
우레처럼 쏟아지는 관객의 박수소리
페이지는 제자리에 놓이고
그는 박수의 뒤편으로 밀려난다
* 페이지 터너: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
손가락 끈
- 노숙자들의 템플 스테이*
세상의 끈을 놓친 손가락이
끈 하나 붙잡고 한 발 한 발 짝을 지어가는 시간
오른쪽 둘째손가락 끝만 간신히 맞대고
눈 감은 사람이 눈 뜬 사람을 따라 간다
용주사 절 마당을 지나 다다른 돌계단
높낮이가 달라 서로 마음을 놓칠까
아슬아슬 손가락 끝에 온 마음을 매단다
눈을 뜨고도 깜깜한 세상
도시의 귀퉁이를 헤매던 바람들
어디서부터 엉켰는지
바람 부는 거리에서 몸 하나 뉠 곳 없었다
손가락 끝에 잠시 흘러간 시절을 묶어놓고
불운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
메마른 손가락에 힘을 준다
이젠 거리의 질긴 끈을 놓고 싶다는 듯
따뜻한 끈 하나 갖고 싶다는 듯
붙잡을 곳 찾아 이곳에 모인 바람 따라
도시의 그늘도 함께 따라 왔다
골목을 헤매고 다닌
저 바람에서 노숙의 냄새가 난다
* 사찰체험
거위벌레의 집
뒤꿈치를
들고 바람이 지나간다
나뭇잎 포대기 한 채
참나무가지를 붙잡고 대롱대롱 그네를 탄다
도르르 말린 나무이파리
그 속에 어린것이 잠들어 있다
저 편안한 반동
다디단 잠은 단단히 포장되었다
흠 없는 잎맥 골라 꼼꼼하게 재단하고
홈질에 박음질까지
정성어린 손끝이 야무지다
원통으로 마무리한 저 품에 어미의 기도가 쌓여있다
애벌레가 나뭇잎 뭉치 뚫고 땅 속으로 들어가고
하늘을 나는 멋진 성충될 때까지
더위를 등에 업고 참나무에게 빌붙어
혼신을 다하는 거위벌레
자식을 위한 生은 어미의 몫이다
버림받는 아이들의 눈물이
뉴스로 장식되고 따뜻한 요람은 사라지는데,
작은 거위벌레가
새끼를 위한 집을 짓고 마지막 숨을 거둔다
여름 숲속
둘둘 말린 나뭇잎 한 채
바람이 조심조심 어르고 간다
연두
다관 속에 아침을 담는다
여린 찻잎으로 숙우가 기울어지면 마른 잎이 오금을 펴는 소리
머금었던 하늘이 연둣빛이다
저 여린 찻잎이 토해낸 녹색의 피
뜨거움에 볶이고 수없이 주무른 손 끝에 덖여
밀봉된 입
그늘에서 서서히 말라간 찻잎의 마음들
이제야 찻잔 가득 속마음을 털어 놓는다
나 한때 다향茶香처럼 푸르렀으니
그 물기어린 시절은 연두였으니
내 몸에서 빠져 나간 시간들은 헐거나 눈이 멀어
모두 퇴색되었다
우러난 차 한 잔, 오래 마른 침묵이 열리고
녹차를 따던 여린 손과
바구니에 담긴 햇살이 이렇게 싱그럽다
연두 한잔으로 마음을 채워
걸쭉한 피를 걸러낸다
마음의 응어리를 다 풀어 놓는다
설화(舌花)
내 몸에 자주 꽃이 핀다
사철 봉긋 봉긋,
명절이나 집안 행사 때가
가장 꽃 피우기 좋은 시기
입안에 숨어 있던 꽃씨를 틔워
알알이 쓰린 꽃잎을 혓바닥에 피운다
까칠한 설화
맵고 짠 음식에 닿으면 벌겋게 만개한다
좋아하는 평소의 음식 모두 물리치고
매미처럼 한세상 청렴하게 살다가겠다고
찬물로 세치의 혀를 달랜다
일복 많은 종부, 나는 저 꽃의 속내를 알지만
어찌할 수 없어
칭얼대는 설화를 달래가며 밤을 지샌다
몸이 몸에게 보내는 붉은 메시지
나는 그의 경고를 무시한다
꽃 피울 곳은 오직 이곳
설화가 지친 몸에 뿌리를 내린다
[당선소감] "다시 일어나 걷겠습니다"
수술 통증이 가라앉을 때쯤 찾아온 당선 소식에 기쁘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합니다.
사물들에게 말을 건네도 흰 종이 위에서 계속 맴도는 나를 보며 글 쓰는 일은 가야 할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거듭 절망하며, 이제 이쯤에서 멈추고 싶었을 때 뜻밖의 당선 소식은 주저앉은 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힘을 내어 다시 걸어야겠습니다.
지나고 보면 어느 것 하나 그저 지나칠 것은 없었습니다. 긴 터널도 의미 있는 배경이 될 것이므로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무엇보다 시의 세계로 이끌어 주신 정수자 선생님. 마경덕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김진기 시인님과 시담회 문우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저의 부족함을 가능성으로 믿어주신 한국문학방송과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늘 힘이 되어주는 남편과 아들, 딸, 저를 아는 모든 고마운 분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 심사경위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당선자의 응모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한다. 응모작 중 단 한 편이라도 각 심사위원으로부터 낙제점수(소정의 채점 기준에 의거)를 받으면 당선이 불가능하다.
이번 응모자는 350명 남짓이었다. 예심을 통과한 5명의 작품 25편이 인적사항이 완전히 삭제되고 불규칙한 순서로 편철되어 본심으로 넘겨졌다. 본심사은 채점이 종결될 때까지는 심사위원도 다른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 전혀 알 수가 없는 상황으로 진행됐다. 심사중에는 오로지 심사위원 본인만의 채점(심사용으로 사전에 설정된 소정의 항목과 점수)이 있을 뿐이었다. 즉 일반적인 심사방식인 심사위원간 작품추천 및 토론 형식이 아닌 것이다.
이번 본심은 정일남 시인, 배찬희 시인, 서상규 시인이 맡았다.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이나 낙선작에 대한 의견 등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한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매번 추구한다. 그래서 심사방식도 채점제인 것이다. 소정의 채점 기준에 크게 미달되지 않고 단 한 편의 낙제 작품도 없이 골고루 좋은 점수를 받은 사람들 중 상대적으로 높은 점수를 얻어야 당선이 가능하다.
끝으로,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진심 어린 큰 감사와 아울러 아쉽게도 낙선된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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