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관에서 / 박세인
몇 번이고 물어서 갔다
저물 무렵 차는 늦게 도착했다
강원도 옥수수 술을 마셨다
잎새 우수수 떨구는 바람, 삭풍인갑다
무너진 탄촌 바라보며 저문 강물소리 들었다
여행지에서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걸었다
그 생각의 끝에 늘 두고 온 사람들 있었다
추억은 잊어버리려 해서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진장 쏟아지는 저 청천 하늘
별 속에도 그 사람 있었다
토방에서 중늙은이 몇 화투를 치고
나는 낮게 엎드려
두고 온 도시와 지난 생을 생각하였다
세상이 받아주지 않으면
가끔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된다
검은 밤이 길고 길었다
강물 거센 물살 소리, 잠이 오지 않았다
허름한 여관 벽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래도 삶이란 살아 볼만한 것이다'
그곳을 나올 때 한 번 더 보았다
[당선소감]
아이 엄마와 계약한 '양육 합의문'에 기초하여 4년째 딸을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오고 있습니다. 바람이 몹시 불던 이번 겨울 어느 날. 차를 서해 갈대밭에 주차시키고 딸과 차안에 있었습니다. 딸과 나는 감기가 심하게 들어서 밖에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딸은 조수석 의자를 뒤로 젖혀 미끄럼을 탔습니다. 붉은 노을이 낀 서해와 갈대숲을 바라보던 딸이 말했습니다.
“아빠, 누가 저 아름다운 숲을 데려가면 안될텐데.”
사물을 바라보는 딸의 말이 시를 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딸은 벌써 아름다운 숲과 주체의 관계 맺기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삶 안에서 우주는 전개되는 것이며 우주사 안에서 이 삶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의 침묵을 하나의 이름으로 열매 맺게 하는 것이 시를 쓰는 일입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전체적 조망아래 사태를 바라본다는 것인데, 사태 그 자체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편견과 선행된 지식을 중지하는 것이며 그리스 회의학파처럼 판단 중지를 수행하는 일일 것입니다.
인간에게 진리나 진실 찾기가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시인이나 학자, 재판관은 선행된 편견에 판단 중지를 해야할 것입니다. 저에게 시는 사태나 사물을 반성적으로 보게 하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모든 인간이 선입관이 배제된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잘것없는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경인일보에 감사드립니다. 당선이 낙선보다 더한 경책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시를 쓰는 것은 쉬워도 시인으로 살기는 힘들다는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삶과 시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지급 받을 수 있습니다.
[심사평]
시에 있어 새로움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죄악이다. 새로움은 사물에 대한 인식의 문제이며 시정신의 문제이다. 사물에 대한 재인식이 없이는 새로움은 불가능한 것이며 자기 안에서의 혁신이나 실험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새로움은 실험정신에 가서 닿는다. 뿐만 아니라 새로움은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전통에 대한 부정,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 언어에 대한 부정, 삶에 대한 부정이 새로운 시세계를 담보하는 것이다. 이번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으면서 심사를 맡은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느낀 것 중의 하나가 새롭지 않다는 것이다. 오래 만난 사람처럼 혹은 오래 입은 옷처럼 편안하고 익숙한 시편들을 놓고 우리들은 고민했다. 결국 새로움이 엿보이는 시를 찾을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 다음 세 분을 최종심에 올릴 수 있었다.
'내소사, 그 어두운 전나무 숲으로'의 김선아, '다 쓸려간 모래밭이 상쾌하다'의 김해선, '타관에서'의 박세인이었다. '내소사, 그…'는 상상력의 신선함이 돋보인다. “스스로 새로워지는 나무들의 상처에선 어느새 버섯의 포자들이 자라 오르고” 같은 재생과 극복의 이미지들이 시를 읽는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시적인 분위기에 경도된 흠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다 쓸려간…'는 간결한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시적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북채를 든 바다파도는 한치씩 올라가고발정난 갈매기의 울음소리”와 같은 빼어난 표현이 보이지만 지나치게 사소한 것이 흠이다.
심사를 맡은 두 사람은 쉽게 박세인의 '타관에서'를 당선작으로 뽑는데 합의를 했다. 이 작품은 형식의 새로움과 삶에 대한 진지한 되돌아봄이 돋보인다. “잎새 우수수 떨구는 바람, 삭풍인갑다”와 같은 신선한 표현도 이 시가 흡인력을 갖게 한다. 함께 투고된 다른 작품들도 고른 수준을 보이고 있어 저력을 짐작케 한다. 삶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바탕으로 한 수없는 부정과 긍정의 모습 또한 이 시인의 잠재력을 읽을 수 있게 하는 요소이다.
그러나 언뜻언뜻 보이는 상투성의 나락을 경계할 일이다. 좋은 시인 한 사람을 새롭게 만난 기쁨이 크다. 대성하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 황동규·김윤배 시인
'신춘문예 > 경인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06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 심은섭 (0) | 2011.02.09 |
---|---|
2005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 정경미 (0) | 2011.02.09 |
2004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 성배순 (0) | 2011.02.09 |
200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 송정화 (0) | 2011.02.09 |
2001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 박명옥 (0) | 2011.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