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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딜레마 / 최명란

 

 

오늘이 아주 가까이 아주 멀리 있다

고민하는 것은 고민하는 것만큼 중요치 않나

죽어라 태어났고

죽어라 먹었고

죽어라 사랑했고

죽어라 싸웠고

죽어라 아팠고

죽어라 죽었다

인생을 꽃이라 믿어야 하나

믿어지지도 않는 내일을 수많은 대중이 따라가고

오늘의 목소리는 호방하다

어정쩡한 예절을 배워

먹은 거 또 먹는 것이 필요하고

한 얘기 또 하는 것도 필요하나

가재도구는 있던 자리 이십 년 그대로 있고

고장 난 관악기에서 비명이 들린다

소리는 자리를 차지하지 않아

시계가 잠들어도 시간은 간다

어쩌나 오감을 흔들어놓는 오늘의 손을

놓아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명랑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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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천상명 시·문학상 수상자가 선정됐다.


천상병시인기념사업회 천상병시상운영위원회는 제 16회 천상병 시·문학상 수상자로 최명란 시인이 선정됐다고 밝혔다. 수상작은 시집 ‘명랑생각’이다.

이번 수상자 선정은 지난 2013년 3월부터 올해 2월까지 출간된 시집을 대상으로 진행됐으며 최종 후보로는 이병률과 복효근, 최명란이 올랐다.

정호승 시인 등 심사위원단은 “시집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비애의 정신을 역설과 반어를 통해 명랑의 정신으로 무애하게 승화시킨 데에 큰 장점이 있다”고 평했다.

한편, 시상식은 ‘제 11회 천상병 예술제’ 기간인 오는 4월 26일 의정부예술의전당 국제회의장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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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 최명란

 

 

늦은 밤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가 손님 전화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꼭 솟대에 앉은 새 같다

날아가고 싶은데 날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며 서성대다가 휴대폰이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재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또 언제 날아와 앉았는지 솟대 위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그의 날개는 많이 꺾여 있다

솟대의 긴 장대를 꽉 움켜쥐고 있던 두 다리도 이미 힘을 잃었다

새벽 3시에 손님을 데려다주고 택시비가 아까워 하염없이 걷다 보면 영동대교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적도 있다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은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마치 자기가

붉은 형광등 불빛에 알몸이 드러난 고깃덩어리 같았다고

새벽거리를 헤매며 쓰레기봉투를 찢는 밤고양이 같았다고

남의 운전대를 잡고 물 위를 달리는 소금쟁이 같았다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아니야, 넌 우리 마을에 있던 솟대의 새야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솟대 끝에 앉은 우리 마을의 나무새는 언제나 노을이 지면

마을을 한 바퀴 휘돌고 장대 끝에 앉아 물소리를 내고 바람소리를 내었다

친구여, 이제는 한강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물오리의 길을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새의 길을 함께 가자

깊은 밤

대리운전을 부탁하는 휴대폰이 급하게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사라지는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

오늘밤에도 서울의 솟대 끝에 앉아 붉은 달을 바라본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에 매달려 달빛은 반짝인다

 

 

 

 

200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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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솟대 끝 나무새처럼 날고 싶다

 

내가 새로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대부분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었고, 내가 안다고 믿고 있는 것들도 정녕 모르고 있는 것이었으며, 아래로 흐르고 있다는 것 역시 위로 흐르는 것인지도 몰랐다. 소통되지 않음에 절망하고, 절망으로 넘어질 때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서야 했다.

 

그런 내게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는 이는 솟대 끝에 앉은 나무새였다.

 

함께 날고 싶었다. 날고 싶은데 날개가 없었다. 그 막막한 상황을 뒤집는 박수소리는 바로 당선 소식이었다.

 

이제 단단한 등에 날개를 달았다. 내 딸 진이가 가는 손가락으로 얼굴을 묻고 까르르 웃는다. 나도 함께 웃는다. 웃음이 이내 눈물로 바뀐다. 이래서 우리 삶은 때때로 감동적인 것을! , 우리에게 이야기가 아닌 것이 어디 있으며 노래가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솟대 끝에 앉은 나무새 한 마리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날아간다.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새의 길을 나도 함께 가야지. 베란다 화분의 풍로초도 그 사이 또 한 송이 꽃을 피웠다.

 

 

 

 

이별의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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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적 형상화 탁월상상력 빼어나

 

당선작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외 네 편을 응모한 최명란씨의 작품들은 그 어느 시를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좋을 만큼 빼어난 것들이다. 탁월한 시적 형상화 능력과 적확한 언어 구사, 기발하면서도 활달한 상상력, 절제된 담백한 어조는 이 신인의 만만치 않은 문학적 내공을 짐작케 한다. 작품들은 주로 고된 삶을 다루고 있다. 노숙자, 보도블록 까는 청년, 꼬막 캐는 여자, 야간 대리운전사 같은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최명란씨의 시들은 감정의 표출을 자제하면서 어떤 안쓰러운 사실들의 풍경 앞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대상과의 거리를 요구하는 그 풍경은 소외된 인생들의 어두운 풍경이기도 하지만, 심미적 안목과 감수성으로 걸러진 언어들에 의해 언어예술로 승화된 풍경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당선작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승규씨의 대추나무 이력서2편도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승규씨의 시들은 맛깔스러운 언어들로 빚어낸 정감있는 이미지, 연기론적인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 긴장을 늦추는 산문적인 요소들이 흠이었다.

 

고원효씨의 작품 중에서는 미더덕의 맛코가 만들어지기까지두 편이 관심을 끌었다. 말의 우연성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시적 전개 방식은 재미있고 독특하다. 그러나 그것이 시적 울림을 이끌어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그리고 응모자 모두에게 정진과 향상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 심사위원 황동규·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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