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을 오르며 외 4편 / 천향미
길에 대한 명상은 첫 호흡부터 숨이 가빠왔어 초고속 엘리베이터로 오른 타워 전망대에서 산복도로가 있는 마을을 내려다 본 적 있었어 비늘을 세운 뱀 한 마리 산허리를 휘돌아 바다 쪽으로 꼬리를 감추었어 가난한 사람들의 공화국은 산의 칠 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었으므로 예고 없는 쓰나미에도 흔들리지 않았어 방주 같은 마을버스가 실어 나르는 소식은 자주 덜컹거렸어 유리창에 표기된 937번 번호표는 평화의 상징이 되지 못한지 오래 되었고 창틈으로 새어나온 소음이 자동차 바퀴에 깔려 불구의 언어로 너덜거렸어 소화되지 않은 날 것, 비탈길에서 체증을 앓을 때
막다른 골목이 허공을 지우고 계단을 만들었어
모노레일
전신암검사(PET-CT) 진료기가 사내를 스캔하기 전
의사는, 눈을 감고 두 팔을
머리위로 올리라고 지시한다
영락없는 항복의 자세
불온한 영혼이 지구를 베고 누워
비로소 겸허해지는 시간이다
X-Ray조사기 조용히 스크리닝되면서
사내의 몸이 영상으로 치환된다
별안간의 불안한 심중(心中)까지 읽어갔을까
감은 눈 속에서 의식이 흔들리자
영혼의 중심 경고 없이
방향 잃은 채 궤도를 이탈한다
폭풍을 만나 비틀거리던 몸을 세우듯 불안하지만
곧은 직선 위를 달리고 싶은 사내
손상되어 폐기하려던 마음의 횡단면 한 장
마그네틱에 재빨리 입력한다
검사를 마치고 공명통 속을 빠져나오며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아내의 두 손을
모노레일에 달라붙듯 꼭 붙잡는다
자기부상열차처럼 마찰 없이 팽팽한
평행선을 그으며 내닫고 싶은 싸늘한 겨울 한낮
신발등에 안착한 눈송이들 금세 녹지 않는,
반시
운문사 가는 길목 국도변
사내가 씨 없는 감을 팔고 있다
바구니 마다 그렁그렁 설익은 눈망울
잠시 몽상에 잠기는 동안
주홍빛 질펀하게 절집 앞에 풀어 놓는다
맞배지붕 받치고 서 있는
배흘림기둥 오래 바라보던 사내
이태 전 배불러 집나간 아내를 떠올리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다
늦가을 햇살을 밀치며 일주문이 열리고
밀짚모자 속에 붉은 볼을 숨긴 탁발승
가사장삼을 손차양 삼아 바삐 길을 나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깨에 멘 바랑이
풍경처럼 가볍다
사내의 눈빛, 잠시 바랑위에 얹혔다가
시계추 되어 흔들린다
더 이상 새가 날아들지 않는 감나무 한 그루
까치밥 연등처럼 높이 매달고
비구니 청정 수도도량을
밤새 비추며 서 있다
허수아비와 자전거
딸아이와 함께 간 허수아비 전시장은
추억이 뉴스가 되는 현장이다
귀밑머리 희끗한 여자가 떠올리는 그림은
어린 시절 채마밭을 지키고 서 있던 키 큰 허수아비
허름한 베옷에 밀짚모자를 쓴 허수아비를 배경으로
다섯 살 딸아이가 V자를 그린다
즉석에서 현상되는 디지털 사진처럼
고욤나무 그늘 드리워진 언덕을 내려오는 아버지,
선명하게 현상 된다
거슬러 올라 바퀴가 멈추는 채마밭 부근
허수아비 멱살을 잡고 공회전 하는 아버지
끊어진 체인이 기억 속에서 이어지고
까르르 내 웃음이 아버지의 안장을 차지하고 앉는다
헛돌던 은륜의 바퀴가 속력을 얻는다
아버지가 밟던 힘찬 페달의 힘으로
그림자를 캡처하다
그림자 하나가 왼쪽 뇌를 갈고 있다
몸을 갖지 않은 4차원의 기호로 표기되는 이름
나는 가끔 그림자의 안부가 그리울 때 있다
기억해낼 수 없는 형체를 어둠에게 물어
더듬이를 붙이고 시크릿 코드로 기록해 둔다
길게 혹은 짧게,
빈번한 입맞춤은 수신규칙이 생략되어 전송된다
몇 개의 점과 선으로 타전되는 모르스(Morse)부호
··· --- ··· --- ··· --- ··· --- ···
내란(內亂)의 징후는 말줄임표로 요약되어
다급한 당신 심장으로 타전 된다
지류를 벗어난 물소리 스며든 골짜기
빛의 발원에 관계한 적 있던 그림자
이끼로 자라고 있다
풀어보면 해독불가의 암호는 없다
12월을 뜨겁게 살았던 순교자의 흔적
골목마다 길게 핏빛으로 새겨져 있다
[당선소감]
길에 대한 명상은 첫 호흡부터 숨이 가빠왔다. 한 줄의 시와 만나는 일도 그랬다. 수많은 갈래 길, 그 중에서 내가 가고자 하는 시의 길은 우윳빛 안개에 덮여 일정한 거리만을 보여주었다.
시란 어쩌면 미지의 안개 속을 더듬어 내가 또 다른 나에게 도달하는 길, 희붐하던 길이 세밀화 그림처럼 가깝게 다가온다 여리디 여린 실핏줄인 길들과 만나야겠다.
멀게만 느껴지던 죽음이 내 가까이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잦은 부고와 병문안, 예기치 않게 수술방에 들어가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시어머니를 바라보던 일,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3개월 째 투병중인 시숙님···.
절박함을 눈앞에 두고 시에 매달렸던 일이 당선의 영광으로 돌아오자 나는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불온한 영혼이 지구를 베고 누워 비로소 겸허해지는 순간이다.
TV 뉴스에서 대설(大雪) 소식을 알리고 있다. 세상의 모난 것들 둥그렇게 순해져 길을 잃겠다. 두렵지 않다. 막다른 골목이 허공을 지우고 계단을 만든다.
[심사경위]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당선자의 응모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심사과정에서부터 작가의 역량을 보다 광범위하게 체크하여, 당선자를 보다 자신감 있게 세상에 선보이면서, 정말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공모에 당당하게 당선될 만한 수준인지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로부터 평가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번 신춘문예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공지시 응모작품수를 5편으로 안내했으며, 접수과정에서 5편을 초과하거나 미달한 응모자에게는 보완토록 주문하는 등 응모자 1인당 정확히 5편씩을 접수받았다. 심사의 형평성 때문이다.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응모자수가 많건 적건 그 수를 일체 밝히지 않는 것을 전통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양적(量的) 우월감 과시 또는 단순한 숫자놀음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심에서 거르고 또 걸러진 5명의 작품 25편이 본심으로 넘겨졌다. 본심으로 넘어가는 작품들은 응모자 성명 등 인적사항이 완전히 삭제됐다. 올해 심사위원은 세 분이었는데, 채점(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심사는 심사위원간의 작품추천 및 토론방식이 아닌, 심사위원 개별적으로 매 작품마다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각각 점수를 매겨나가는 채점방식이다)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의 심사진행 중에는 심사위원끼리도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모르게 진행됐다.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담당했으며, 본심은 권순자 시인(《심상》등단,《주변인과 시》편집위원), 신지혜 시인(《현대시학》등단, 뉴욕예술인협회장), 하상만 시인(《문학사상》등단, 제1회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당선) 등 초·중진을 가리지 않고 선발·위촉된 분들이 맡았는데, 주어진 시간을 초과하면서까지 참으로 신중하고 꼼꼼한 평가 자세를 보여주었다. 이들 심사위원은 모두 시단에서 촉망받는 비교적 젊은 문재로써 응모작품에 대한 보다 신선한 시선, 예리한 관조,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撤)'할 정도의 집중력 등으로 심사에 임해 '원 오브 뎀(One of Them)'을 선택하는 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고 평가된다.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이나 낙선작에 의견 등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한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어떻게 둘 것인가를 놓고 매번 크게 고민한다. 심사방식도 타 매체들과는 달리, 매 작품마다 '문법·어법·표현의 적절성', '주제와 내용의 일관성', '감동·느낌',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 '작품의 신선감·독창성', '작가적 역량·성장가능성' 등을 구체적 평가항목으로 설정하고, 그 항목들에 미리 배점을 하여 매 작품마다 똑같은 방식으로 채점 테이블을 삽입한 가운데 채점해나가는 방식으로 심사를 진행한다. 이러한 방식은 초회부터 해마다 동일했다. 이번 당선작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각 항목들에서 타 응모자들의 작품보다는 상대적으로 골고루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가 누구인지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인비(人秘)키로 한다. 문단에 적지 않게 이름이 알려진 문인들을 포함하여 기성작가들이 상당수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프라이버시 고려가 주된 이유이다.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진심어린 큰 감사와 아울러 아쉽게도 낙선된 분들께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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