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 / 조유인
실수로 들고 있던 유리잔을 떨어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리잔은 바닥에 부딪치며 단 한 번의 파열음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지요. 소리가 빠져나간 유리잔, 그것은 꼭 혼이 빠져나간 몸뚱어리 같았습니다. 어쩌면 깨어지는 순간에 들린 바로 그 소리가 부서진 유리조각들을 그때까지 하나의 잔으로 꽉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금관 역시 소리의 다른 모습일지 모릅니다. 금덩이를 천 번도 넘게 두드려 펴던 소리, 연푸른 경옥을 쪼개어 갈고 갈던 소리. 그 많은 소리들을 고스란히 쌓아 빛으로 일으킨 나무, 그 위에 따로 가린 고갱이들을 곡옥과 영락으로 빚어 찰랑찰랑 늘어뜨린,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소리의 변용 말이지요.
빛의 몸을 입은 소리, 그것을 머리 위에 두신 임금님에겐 그 빛이 온몸을 휘돌아 마침내 세상을 다스리는 자애로운 음성으로 화했을 법합니다. 정말 그래요. 그쯤은 돼야 소리가 소리를 부른다는 이치 그대로, 여항과 저잣거리의 태평가에서부터 깊은 산 험한 골짜기 이름 없는 백성들의 작은 탄식소리까지 비로소 그 사슴뿔 같은 입식 속으로 낱낱이 빨려들지 않았겠습니까.
가볍고 얕은 소리들만 웃자라 오래고 실한 믿음들을 하나둘씩 허물어 가는 나날들, 나는 곧잘 박물관을 찾아 금관 앞에 섭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은하의 가장 빛나는 한 부분을 옮겨 온 것만 같은 빛무리에 휩싸여, 까마득 흘러간 저편의 소리에 닫혔던 마음이 활짝 열리곤 하는 것입니다. 마치도 행방이 묘연한 만파식적을 다시 찾아 듣는 듯.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나이를 한두 살씩 먹을수록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도 한두 가지씩 사라진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운명이란 것도 겉으로는 거창하게 들리지만, 가능성의 한 갈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스물다섯 해 동안 내가 취했던 것은 모조리 다 열등의 갈래길들이었다. 살아가면서 찾아오는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오늘 내게 다가온 엄청난 가능성의 시작을 조금은 기뻐하며 받아들이고 싶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시인을 두고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시는 '가슴으로 하는 말'이 될 터인데, 당선 소식을 듣자마자 여태껏 내가 했던 말들은 모두 혀끝에서만 맴돌아 나온 가성은 아닌가 싶어 덜컹 부끄러워진다.
시는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나에게 찾아온 것일까? 그래도 내가 가냘픈 신음이라도 내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일까? 그러면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심호흡부터 해야겠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만들 때까지 피나는 노력과 발성 연습도 해야 할 것이다.
내 작품 최초의 고급독자인 부모님께 어리광을 부릴 수 있어서 신난다. 지난봄 교사로 발령을 받아 한집에서 살게 된 형과 착한 동생과도 어깨동무하고 싶다. 영문과 및 국문과 교수님들, 동국문학회, 누구라고 얘기하면 빼먹을 이름이 있을까봐 차마 말 못하는 친구, 선후배님들과도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도 졸작과 그 수많은 '의도적 오류'들에게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좋은 작품으로 꼭 보답해 드릴 것을 다짐해본다.
[심사평] 빛의 소리의 영롱환 합금 아름다워
자신의 내밀한 감정을 언어로 전달한다는 것은 클랙션 하나로 운전자의 짜증을 표현하거나, 두꺼운 코트 위로 등을 긁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겹고 답답한 노릇이다. 언어의 꽃인 시는 바로 그 힘겹고 답답한 느낌이 트이면서 은폐된 삶이 내장 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달리 비유하자면 그것은 우연히 팔을 들어 올리는 순간, 윗 도리와 아랫도리 사이로 트이는 흰 살결 같은 것이다. 해마다 신춘의 좋은 시들은 숨겨진 삶의 맨살을 응시하게 한다.
‘동해와 만나는 여섯 번째 길’(김희영)과 ‘땅은 제 속에 눈물을 가두고 살아간다’(임경림)는 비록 참신한 조망이나 색다른 관점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나, 전반적으로 안정감 있는 구성력을 갖춘 시들이다. 그러나 대개의 신춘문예 응모작들이 그러하듯이, 기성의 시풍과 범용한 수사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약점을 갖는다.
기형도의 말투를 연상케 하는 기이하고 황당한 어법으로 삶의 황폐와 좌절을 넋나 간 듯이 중얼거리는 한용국의 시들, 특히 ‘실종’과 ‘내성’ 등은 젊은 시의 새로운 물줄기를 가늠하게 하는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다만 군데군데 납득할 수 없는 애매한 구절들이 글쓴이의 언어 통제력을 의심케 하고 장인으로서의 신뢰를 가로막는다.
당선작으로 결정된 조유인의 ‘금관’은 고대 석관의 밀폐된 뚜껑을 여는 듯한 돌출한 상상력을 빛과 소리의 영롱한 합금을 빚고 있다. 물론 간혹 추상화된 말들이 관념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가느다란 국수 다발처럼 힘을 잃는 듯한 느낌이나, 마지막 네 번째 연이 시적 의미의 종결에 별다른 기여를 못하고 사족처럼 내걸린 듯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이는 빛으로부터 들리는 소리를 읽어내고, 깨어짐으로부터 만들어짐의 비밀을 탐색하는 특이한 눈길은 유망한 시인으로서의 전도를 예감케 한다. 아울러 나직하고 느릿하면서도 끈기와 뚝심을 갖춘 꼬깃꼬깃한 말솜씨는 사소한 곤경에 쉽게 꺾이질 않을 근성 같은 것을 짐작케 한다.
당대의 신뢰할 만한 글쟁이로 살아남아 매일신춘문예의 이름을 빛내주기 바란다.
심사위원 권기호(시인.경북대 교수) 정호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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