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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시끄러운 화단 / 김애란

 

 

엄마 지난 주말 백화점 쎄일 때 주문한 빨간색 원피스 어디 있어요? 글쎄 네 책꽂이에 보렴 책꽂이는 모름지기 삼단이 제일인데 네 지능은 너무 높아 내 가방엔 노란색 미니스커트 밖에 없어요 간밤에 성옥언니가 먹다 남긴 가스통 바슐라르는 내가 입기에 너무 무거운 걸요 미니스커트는 지나치게 가볍죠 큰언니 언니가 아끼는 주름치마 빌려줘 그거 철공소에 맡겼어 주름좀 피려고 한 시절 바람 잡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니 분식집은 오거리 분식집이 제일이야 거기 한쪽 말이 짧은 남자는 오늘도 화단 아래로 출근했어 작은 애야 그러지 말고 네 머리에서 좀 꺼내 입으렴 네 머리엔 문학 음악 설탕 쌀 없는 게 없쟎니 아니에요 엄마 제 서랍은 요즘 부재중이에요 이 나팔바지는 왜 이래요? 그거 너무 오래돼서 그렇다 자고로 사랑이란 건 오래 되면 빛이 바래거든 아니다 서글플 거 없다 세월이 흘렀거니 하면 그만인거야 얘 막내야 머리 좀 올려라 작은애 넌 손가락 좀 펴고 큰애는 얼굴 들어 안돼요 엄마 난 긴 문장이 좋아요 무릎이 안 펴져요 엄마 빨간색 메니큐어 좀 주세요 자꾸 발바닥이 갈라져요 모자를 써야겠어요 노란색 모자는 싫어요 엄마도 노란색은 싫어하쟎아요 우리 식구 모두 노란색이라면 모조리 토해내고 싶은 거잖아요 빨간색 원피스는 아무래도 모조리 토해내고 싶은 거쟎아요 빨간색 원피스는 아무래도 다른 집으로 잘못 배달되었나 봐요

 

햇살이 조명탄처럼 터지는 사월

나는 무도회 준비가 한창인 화단 옆을 지난다

개나리 가지가 나를 만진다

올해는 좀 색다른 옷을 입고 나올라나

혹 또 노란 미니스커트?

 

 

 

 

보란 듯이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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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개미 한 마리 길을 잃었는지 백지 위에서 긴 더듬이를 더듬거리며 횡설수설하는 내 혀처럼 황망히 움직이고 있다. 개미라는 움직이는 검은색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연필을 질질 끌며 나는 지금껏 누군가를 따라다니고 있는 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지는 온통 검은 색 길로 덮인다. 그물처럼 깔린 이 검은 색 길에 놀란 걸까. 개미가 갑자기 꼼짝도 않는다. 그래, 아무데로나 뻗어가던 내 이 물컹거리는 사유도 자주 검은 돌덩이처럼 굳어지곤 했지. 자신이 뱉아낸 길이 백지 안에서만 맴돌고 있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낀 걸까. 개미가 곧장 가느다란 허리를 질질 끌며 백지 밖으로 사라진다.

 

개미처럼, 내가 따라다니고 있는 누군가가 무엇이 내 생 밖으로 사라지는 건 아닐까. 두려울 때가 있다. 내가 뱉아낸 길이 원점으로만 회귀하는 길은 아닌지 의심하면서 믿으면서 나는 여기까지 왔다.

불면의 밤을 지켜준 내 안의 밖의 사물들이 웃고 있다. 눈물을 질질 흘리며. 기쁘다. 이제 웃음을 질질 흘리며 살아도 될까.

 

늘 꽃밭을 가꾸시던 어머니, 내 시는 그 꽃밭에서 싹텄다는 걸 새삼 말씀드려야 하나. 꽃밭 옆에 지게를 세워두시던 아버지, 그래요 지게 가득 흙을 져 날라야지요. 이 작은 몸 속 태초로부터 그리움의 소용돌이를 휘돌리시는 어머니 아버지께 드릴 것이 부유하는 꿈밖에 없다.

끈질기게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두 아이들과 따뜻한 손으로 그 행복마저 재워주는 남편에게 고맙다.

 

무엇보다 지도해주신 선생님과 부족한 글 뽑아주신 심사위원님 그리고 진주신문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좋은 글로 보답할 것을 감히 약속 드리면서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난 학교 밖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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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본심에 올라온 서른 네 분의 300여 작품 중 시선을 끌었던 작품은 박진성의 <론강의 별밤><빈집>, 김애란의 <조용하고 시끄러운 화단><매미가 나를 읽는다>, 강예림의 <7월의 도남리><산문(山門)이 열리다>, 그리고 박선영의 <냉장고> 등 네 분의 작품이었다.

 

이중 <론강의 별밤><빈집>은 금년도 선자가 타 문예지 심사에서 세 번 이상 만났던 작품이고 또 당선의 영예도 얻었던 분이다. <7월의 도남리><산문(山門)이 열리다> 또한 3회 걸쳐 만났던 작품이다. 사적 재산이 아니라 이미 유통화된 공적 재산이란 점에서 쉽게 부담 없이 제외시킬 수 있어 좋았다.

 

결국 맨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냉장고><조용하고 시끄러운 화단> 두 편이었다. 두 편 다 개성도 있고 자기 정체성도 뚜렷하며 현실을 보는 눈이나 이미지를 정박(定泊)하는 능력 또한 뛰어났다.

그러나 시는 무엇보다 정서반응의 언어고 지극히 사적이고 고백적인 언어란 점에서 <냉장고>의 경우는 그 주제 즉 곡즉전(曲卽全)의 삶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해도 사물을 장악하는 표현의 묘미가 다소 뒤져 심미적 정서를 일으키는 쾌감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용하고 시끄러운 화단>은 시에 나오는 그대로 바슐라르의 이른바 물질적 상상력을 통하여 인간 존재태를 꽃밭으로 가져가 본 것인데 감수성도 신선하고 표현의 능력도 결코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햇살이 조명탄처럼 터지는 사월, 무도회의 준비가 그런 경우에 해당된다. 조명탄처럼 터지는 새로운 언어와 도발정신은 늘 신인의 몫이다.

끝으로 당선자에게 드릴 말씀은 재능박덕이란 말이 있는데 요즘 시류를 타고있는 패러디나 재치놀음의 감각 유형에서 덫을 스스로 걷어낼 줄만 안다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다.

 

한국시는 지금 두 가지 방향에서 크게 오도되어 본말이 전도되어 있음도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현대시가 노래에서 비평의 체계로 넘어와 있다고 해도 결국 시는 노래일 수밖에 없고, 그 둘은 기발한 상상력에 의한 이미지로 선의 인지적 충격보다는 민족 정서를 회복하는 말가락이 시급하다는 점이다.

 

앞으로 더욱 좋은 시를 기대하며 당선을 축하한다.

 

- 심사위원 송수권, 박노정 송희복 김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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