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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 드라이버가 필요한 오후 / 정희안

 

 

우선 헐거워진 안구부터 조여야겠어 의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 네모난 메모는 너무 반듯했어 느슨해진 우리 사이에 필요한 건 떨림이잖아 사랑은 사탕 같은 것 길이와 깊이 중 어느 쪽이 좋을까 잠들지 않고 꿈을 꿀 순 없잖아 달리자는 남자와 달라지는 남자 수순은 잘못되었지만 수준은 비슷해 일용직 알바생의 심정을 너는 몰라 너는 내가 되는 경험을 해봐야 해 우리 모두 갑질 아래 새로 태어나곤 하지 사진을 정리하다가 시간을 정리해버렸어 미움은 미움에서 출발해 머리는 항상 미리를 준비했어 망설임은 사치야 네가 생일선물로 준 귀걸이처럼, 취업은 걱정 중 제일 으뜸이지 숲이 술을 대신할 순 없잖아 기능도 못 하면서 가능을 얘기했어 조직은 때로 조작도 해 유인하려면 유연해야 해 정말이지 절망스러웠어 그러니 우리 헤어지는 게 좋겠어 밀려서 여기까지 왔는지 빌려서 여기까지 왔는지 진절머리와 전갈머리는 무슨 관계인지 거울 속에 겨울이 있잖아 말 많은 세상 발밑을 조심해 그럼, 이제부터 그림 공부나 해볼까

 

 

 

 

2020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꿈과 현실 거리 좁히는 건 끈기라 말하고파

 

어둠이 벗어두고 간 불면을 끌어안고 응답 없는 편지를 썼습니다. 아침이면 민낯을 대하듯 실망과 의심을 거듭했습니다. 남편은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오기가 생겼습니다.

 

병원 다녀오는 길에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마구 떨리는 내 손을 내가 꽉 잡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울컥함은 참지 않았습니다. 겨울과 봄 사이 나에게는 또 하나의 계절이 있습니다. 다음 계절이 두려워 망설이다가 지각하는 학생처럼 늘 그렇습니다. 글쓰기의 출발점이었던 더딘 그리움을 이제야 떠나보낼 수 있겠습니다.

 

두 아들을 통해 보는 세상은 절대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느 소설의 한 구절을 빌어 당부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노력은 절대로 쓸데없는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꼭 믿어주세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믿어야 합니다.”

 

꿈과 현실의 거리를 좁히는 건 행동이라고, 끈기가 곧 재능이 될 수 있다고 늦게나마 말할 수 있습니다. 부족함을 채우는 데 게으름 피우지 않겠습니다. 부끄러운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먼저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항상 따뜻한 시선으로 이끌어 주신 신정민 선생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서로 머리를 맞대고 시를 나누는 동인 모두 고맙습니다. 뜨거웠던 여름을 함께했던 미정, 혜옥 선생님 즐거웠습니다. 환하게 밀려오는 편두통을 맞이합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심사평] 가벼운 언어와 무거운 현실 균형감 잘 갖춰

 

심사위원들은 대략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천여 편의 응모작을 살폈다. 첫째, 참신함이다.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시의 원형을 보여줄 수 있는 참신함이 있는가를 살폈다. 둘째는 정확함이다. 소통을 위해서도 공감을 위해서도 어설픈 시적 허용에 기대기보다 정확하게 문장을 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점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가를 함께 살폈다. 마지막으로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발견하는 시의 눈을 갖추고 있는가를 살폈다. 일상의 소소한 장면에서도 어떤 결정적인 순간을 발견하는 눈이 시적인 도약을 이룬다. 그것이 또한 시의 꿈일 것이다.

 

1차 검토 결과 이주호, 윤계순, 최동출, 정희안 등 네 분의 작품이 최종 논의 대상으로 남았다. 이주호 씨의 작품은 젊은 감수성이 넘치는 언어 감각이 눈에 띄었으나, 아직은 덜 숙련된 채로 시가 완성되고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윤계순 씨는 꽤 오랜 숙련의 시간을 거친 작품을 선보이고 있지만, 그것이 너무 안정된 길을 따르는 데 그치고 있다는 점이 아쉬웠다. 최동출 씨의 작품은 요즘 보기 드물게 웅장한 상상력과 언어가 눈길을 끌었으나, 마지막까지 확신을 줄 만큼 숙성된 세계라고 보기 힘들었다.

 

정희안 씨의 작품은 유사한 발음의 단어로 언어유희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면서도 삶의 세목을 깊이 있게 응시하는 시선을 담보하고 있는 점이 미더웠다. 특히 십자 드라이버가 필요한 오후는 한없이 가벼운 언어와 한없이 무거운 현실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감으로 말의 재미와 사유의 깊이를 함께 성취한 수작이라는 데 의견이 모였다. 논의 끝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한다. 당선인에게 축하를 드리며, 가장 가벼운 언어로 가장 무거운 세계를 지탱하는 시의 본령을 자기 기질대로, 자기 방식대로, 자기 고집대로 끝까지 밀고 나가서 또 하나 새로운 언어의 건축을 보여주실 것을 당부드린다.

 

- 심사위원 강은교 성선경 김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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