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 모르가나 / 정채원
여름에는 내 피로 너를 만들었고
겨울에는 뼛가루로 너를 만들었다
아니,
여름에는 얼음으로 너를 만들었고
겨울에는 모래로, 모래바람으로 너를
만들었다, 되도록 빨리 지워지는 너를
길 잃은 사막에서 쓰러지기 직전 나타나는
신기루 속의 신기루
달려가 잡으면 가시풀 한 줌으로 흩어지는
너를 알면서도
그런 줄 알기에 더 놓지 못했다
철창에 갇혀 온종일 커피 열매만 먹는 사향고양이는
오늘도 피똥 아니, 커피똥을 싼다
수도 없이 창자벽에 제 머리를 박으며
캄캄한 내장 속에서 발효된 내 편지는
차가운 혀를 사로잡을 만큼 중의적일까
하늘에 뜨는 태양과
바다에 뜨는 태양이 서로 마주보며
너, 가짜지?
얼굴을 붉히는 동안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뒤로 물러나다
내장을 거칠 겨를도 없이
해가 지면 모든 게 지워지고
주름진 백지만 남게 되더라도
북극 얼음바다 위에 떠 있는 마법의 성을 향해
구절양장을 건너가는 우리에게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오늘은 얼음을 뚫고 뜨거운 커피가 솟구칠지도 모르지
* Fata Morgana : 마녀 모르간 또는 신기루라는 뜻.
서울시와 송파구의 무형문화재 49호 「송파산대놀이」와 무형문화재 3호 「송파다리밟기」복원 및 제정에 기여한 공로로 1993년에「송파를 빛낸 얼굴」로 지정된 한유성 님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제2회 ‘한유성문학상’ 수상자로 정채원 시인이 선정되어 시 전문지(도서출판) 포엠포엠(대표한창옥)과 송파구(박성수구청장) 주최로 27일 송파구청 4층 대강당에서 시상식을 개최한다.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심사평에서 예심을 거쳐온 시인들은 이미 우리 시단을 대표하는 중견들인지라, 각자의 미적 완결성과 위상을 두루 갖춘 분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심사위원들은 이들 작품에 대한 윤독과 토론을 거듭하였는데, 그 결과 시인으로서의 품격, 작품의 균질성과 지속성을 보여온 정채원 시인의 작품들을 수상작으로 선정할 수 있었다.
이번에 수상작으로 뽑힌 <파타 모르가나> 외 9편은 삶의 단순한 유한성에서 벗어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생의 여러 차원을 인식해가는 도정에 들어선 시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특별히 <파타 모르가나>는 신기루의 속성을 적극 차용하여, 피처럼 뜨겁고 뼈처럼 견고하지만 얼음처럼 모래바람처럼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존재의 불가피성을 노래한다. “차가운 혀를 사로잡을 만큼 중의적”인 시인의 사유와 감각은, 모든 것이 지워져도 남을 것은 남고, 우리 삶이 ‘가짜/거짓말’을 넘어 도달하게 될 삶의 실재와 눈부시게 만나게끔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정채원의 대표 시편으로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른 작품들도 예의 그 강렬한 색감과 살아 움직이는 끔찍한 기호들을 선명한 심상으로 부조하고 있어서, 정채원 시학의 절정감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작품 세계의 일관성과 한결같은 심화 과정에 가볍지 않은 격려가 얹혀야 한다고 심사위원들은 뜻을 모았다. 정채원이라는 이름 앞에 한유성이 겹칠 때 그 순간이 더욱 빛날 것이다. 거듭 수상을 축하드리면서, 정채원 시인만의 언어적 연금술이 지속적 진경으로 거듭 나타나게 되기를, 마음 모아 바라마지 않는다고 밝혔다.
심사를 맡은 위원들은 이건청(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전 한국시인협회 회장), 박형준(시인, 동국대 교수),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님이었다.
정채원 시인은 수상소감에서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등단 후 지금까지의 22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한순간 머릿속을 용암처럼 흘러갔습니다. 그 시간은 제겐 어쩌면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없이 긴 시간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껏 청탁을 받으면 매번 마감 시간까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끝까지 저를 짜내고 또 짜냈습니다. 마감을 하고 나면 제 안에 더 이상 피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은 듯 탈진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짬만 나면 모니터 앞에 앉아 미발표작을 다듬던 저는 좋은 엄마도 다감한 아내도 훈훈한 친구도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시에 중독된, 시 외에는 아무 데도 쓸모없는 사람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쓸모없는 우울과 쓸모없는 슬픔을 고독 속에 숙성시키면 단단하게 빛나는 그 무엇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늘 궁리했습니다. 시가 저를 버릴까봐 매 순간 전전긍긍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길, 어쩌면 미쳐도 미치지 못하는 길, 예술은 그런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니 한 집안의 가장인 한유성 선생의 길은 얼마나 험난했을까 조금은 짐작이 갑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불길 같은 예술혼 사이에서 얼마나 큰 갈등과 중압감을 견뎌야 하는 길이었을까요.
주변의 칭찬이나 비난에 구애받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 그들이 진정한 예술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그들만의 길을 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건 누가 뭐래도 그 길을 가지 않곤 살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험난하고 고독한 길일지라도 그 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삶은 원래 허공이라지만 그래도 그 허공에 잠시라도 빛을 뿌리는 일, 그게 예술창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혼신으로 불태우면서 한순간 지상으로 내리꽂히는 별똥별처럼 말입니다. 떨어지면서 획을 긋는 일이지요. ‘커다란 용기란 빛을 향하여서도 죽음을 향하여서도 눈을 크게 뜨는 일’이라고 까뮈도 말했습니다. 세상의 밝은 부분보다 어두운 부분, 소외된 부분에 눈을 더 크게 뜨는 예술가들은 진정 용기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값진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고통과 고독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삶은 우연이라는 얼굴로 오는 필연이라고도 합니다. 제 등단작이 「가면무도회」였고 대표작 중 하나는 「변검쇼」인 것도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새워 탈을 만드시고 송파산대놀이를 하셨다는 한유성 선생의 이름으로 오늘 이 상을 받는 저도 어떤 인연인가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술의 장르를 초월해 치열한 예술혼을 가진 작가에게 주는 이 상을 제가 받을 자격이 있는지 한참 망설였습니다. 주변에는 혼신으로 작품창작에 매달리는 선후배님들이 여러분 계신 걸 알고 있기에 송구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혼신을 바쳐 각고의 길을 가는 예술가들, 자신들도 피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하는 길일지라도, 이따금 작은 불빛이라도 그들을 비추어주기를, 탈진해 쓰러지기 직전의 그들에게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술의 길은 고통의 길, 저주의 길이라지만 때로는 그 길이 축복의 길, 구원의 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뜻깊은 상을 제정하신 포엠포엠과 심사위원 선생님들, 후원해주시는 송파구청 관계자 여러분께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고 말했다.
수상자인 정채원 시인은 서울출생으로 이화여대영문과를 졸업하고 1996년‘문학사상’으로 등단했으며 시집<나의 키로 건너는 강>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일교차로 만든 집> 등이 있다.
'국내 문학상 > 한유성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4회 한유성문학상 / 김두안 (0) | 2021.07.17 |
---|---|
제3회 한유성문학상 / 문현미 (0) | 2021.07.17 |
제1회 한유성문학상 / 김신용 (0) | 2018.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