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집 근처 / 전다형
구서1동 산 18번지
무허가 간이 수선집이 있었네
의수족 아저씨는 십 수년 째
주일만 빼고 수선일을 했네
나는 팔 부러진 우산을 들고 찾아갔네
허름한 문이 굳게 닫혀 있는
단골집 돌아서다 어둠 속
우두커니 서 있는 입간판에게 물었네
수척한 얼굴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네
꺾어진 골목으로 어둠 몇 장 굴러다니고
영문을 모르는 바람이 틈새를 드나들고 있었네
맞은 편 산뜻한 수선집 미싱 요란하게
푸른 하늘을 박고 있었네
찾아준 은혜 잊지 못할 겁니다
헛걸음하게 해 죄송합니다
삐뚤한 글씨체가 손잡이 근처 붙어 있었네
나는 뜨거운 것을 목에 걸었네
발길을 돌려 건널목에 섰네
의수족 아저씨가
손때 묻은 연장을 메고 걸어가고 있었네
누가 맡겼다 찾아가지 않은 낡은 가방에
망치, 칼, 가위 쓰다 남은 실, 지퍼, 우산대 몇
땅으로 기우는 어깨 위에서 강물소리가 들렸네
아저씨가 자꾸만 되돌아보았네
신발 밑창에 친 못처럼 총총하게 박혀 있는
별을 올려다보며 헛기침을 했네
수선집 근처
굵은 주름살 떨어져 뒹굴고 있었네
[당선소감]
연필을 깎는다. 뭉텅한 연필 입구 깊숙이 들이민다. 빙빙 돌린다.
투명한 통에 잘게 부서져 쌓이는 나무들의 아픔 어디에 뿌리를 남겨둔 나무였을까. 또 다른 제 살들은 어디로 흩어졌을까. 나무의 아픔 끝에, 몸체 안에 숨은 심이 보인다. 그 단단함이 역사(歷史)같다.
뼈와 살을 깎는 아픔으로 세상을 건너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그런 삶만이 깊고 곧은 마음을 품을 수 있다.
내 삶을 연필 깎기에 넣어 빙빙 돌린다. 톱날이 신이 난다. 욕망과 죄의 비늘을 쳐내고 물관부의 투명으로 눈뜨고 싶은 것이다. 때로는 밤을 세워 섬세한 연필심으로 시(詩)의 행을 이어나가고 싶은 것이다.
연필이 깎인다. 뾰족한 심이 일어나 나를 찌른다. 아픔을 견딘 것만이 가장 아름답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 ‘시인의 명찰’을 달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내 시의 철자법부터 짚어주신 하현식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분들께도 감사드리며 함께 공부한 문우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묵묵히 내 시의 길을 지켜봐 준 가족들에게 이 상을 바칩니다.
[심사평]
200명에 이르는 응모자의 시들 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20명 시인들의 시적 수준이 모두 만만치 않았다는 점에서 심사자들은 아주 ‘기뻤음’과 함께, 단 한 편을 골라야 하는 ‘고통에 빠져야 했음’을 밝히고 싶다. 그러나 거의 전부 산문시라는 ‘시적 유행’에 물들어 있는 점은 심사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언어를 쓰는 솜씨, 또는 그러한 감각적 표현의 형상화는 모두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으나 그 감각의 표현 뒤에 숨은 사유라든가, 리얼리즘의 진정성, 따라서 肉化되어 있는 시를 찾기가 어려웠음은 결정적 흠이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들은 다음 네 편이었다.
‘해류와 노동’, ‘주먹만한 구멍 한 개’, ‘퇴행성 관절이 왔다’, ‘수선집 근처’- ‘해류와 노동’은 상당히 아까운 작품이다. 그러나 신선한 그 소재와 시적 세계에도 불구하고 아직 관념성이 농후했다. 그리고 리듬감이 없었다. 좀더 진정성으로, 리얼리즘의 무대를 세웠다면 리듬감이 살아나는 시를 이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먹만한 구멍 한 개’는 사유가 있는 시적 공간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그 사유의 깊이가 언어에 실리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언어와 사유가 따로 놀고 있었다고 할까.
‘퇴행성 관절이 왔다’도 진정성과 필연성, 구체성이 함께 하나의 시적 무대 위에서 형상되지 못하고 있었다. 상당히 육중한 세계를 세우려고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선집 근처’는 우선 리듬감이 있고, 시적 무대 위에 형상화된 세계가 아주 肉化되어 감지되는, 아름다운 시였다. 그리고 감각적 언어에 실린 그 사유의 깊이도 심사자들을 아주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또 이 시인의 시 중에 ‘구서동 신 서동요’가 지닌 리얼리스틱한 현장감의 언어도, 이 시인의 시에 대한 심사자들의 마음의 자를 간절하게 했음을 밝힌다. 따라서 심사자들은 위의 네 편 중에서 ‘구서동 신 서동요’를 쓴 시인의 ‘수선집 근처’를 당선작으로 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예심 정일근· 이성희 / 본심 허만하·강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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