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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 양애경

 

 

양잿물로 삶아

햇볕에 잘 말린 란닝구처럼

하얗고 보송한 여자

 

가슴팍에 코를 묻으면

햇빛 냄새가 나는 여자

머리칼에 뺨을 대면

바람 냄새가 나는 여자

잘 웃는 여자

 

낡은 메리야스처럼

주변 습기를 금방 흡수해

쥐어짜기만 하면 물이 흐르는 여자

잘 우는 여자

 

편서풍에 날아간 여자

빠른 시냇물에 둥둥 떠 급히 흘러간 여자

 

오래 입고 여러 번 빨아 얇아진

그 여자

 

지금 어디?

 

 

 

 

바닥이 나를 받아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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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비행운飛行雲 / 함기석

 

 

아픈 아이를 안고 창밖을 본다

내일이 어린이날인데 하늘엔 어두운 핏줄만 뻗어가고

내가 가꿔온 꿈이 사마귀처럼 사각사각

내 내장을 파먹고 아이의 웃음을 파먹고 있다

옆집 무화과나무 아래 싹튼 상추들이 모두

만 원짜리 지폐로 보인다 저 싱싱한 지폐에 구름과 삼겹살을 싸

배터지게 먹고 돼지가 되고 싶은 날이다

대문가 목발을 짚고 올라온 어린 나팔꽃이

환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저녁의 눈동자는 점점 커져 서녘하늘 전체가 붉은 갯벌로 변해가고

벼랑이 보이는 해안으로 새들이 날아간다

 

햇살 하나가 가만히 다가와 아이의 상처 난 뺨을 혀로 핥아준다

흰 이가 막 돋아난 햇살의 빨간 잇몸

공기들이 만드는 투명한 파도가 쉼 없이 일렁이고

아이는 약에 취해 잠든다

나는 아이의 등을 다독거리며 놀이터 모래밭을 바라본다

아침부터 온종일 허공을 날다 저녁에

모래밭에 떨어져 죽은 새

새가 남긴 마지막 무늬와 추상의 발자국들이

사람의 문장보다 아픈 저녁이다

나는 잠든 아이를 꼭 안고 속으로 울음을 삼킨다

 

점점 붉게 지쳐가는 하늘과 대지

저 두 장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검붉은 침묵들

거미의 입으로 들어간 벌레와 빗방울과 어둠이

환한 허공의 집이 되기까지

삶의 습한 저지대를 비행하는 아픈 비행운들

멀리서 석양에 젖은 새들이 하늘을 돌고

나무의 혼들이 죽은 나뭇가지 끝에서 빠져나와 찬 물결처럼 고요히

허공 저편으로 퍼져가는 것이 보인다

 

 

 

 

디자인하우스 센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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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인에게 문학상을 주는 이유는 특별하다. 뭔가 큰 성취를 얻었다고 칭찬하거나 더 잘하라는 격려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일반적인 상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한 시인의 시적 성취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잣대는 아무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상을 줘서 격려한다는 것은 문학적이지 않은 일이며 그것은 자칫 시인에 대한 모욕일 수 있다. 문학상을 준다는 것은 어떤 작품이 지금 이 시대에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상을 주고받는 행위를 통해 그러한 가치를 공유하자는 데 바로 문학상의 의미가 있다.

 

이번 애지문학상 심사는 바로 이러한 문학상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 작업이었다. 작년 겨울호부터 올해 여름호까지 <애지>를 포함한 여러 문학지들에 실린 작품 중에서 먼저 후보작들을 선정했다. 시인의 명망성이나 시적 표현의 시류성은 평가의 중요 기준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한 시인이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사회와 인간을 보고자 하는지 그 시선의 깊이를 가진 작품을 후보작으로 선정했다. 총 15편의 작품을 두고 심사위원들이 논의했으나 함기석 시인의 「저녁의 비행운」과 양애경 시인의 「여자」를 수상작으로 선정하자는 데 쉽게 합의하였다.

 

함기석 시인의 「저녁의 비행운」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가난과 비루함으로 점철된 일상의 삶을 시인이 열망하는 자유와 대비시킴으로써 그것이 가진 고통의 함량을 배가시키고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을 시인은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런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욕망과 욕망이 부풀리는 쾌락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아름다운 슬픔을 포기하거나 애써 피하며 살고 있다. 함기석 시인의 이번 수상작은 바로 이러한 슬픔을 다시 일깨워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쾌락이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인식의 깊이와 미학적 성취가 수상작으로 선정된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양애경 시인의 「여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도드라진 작품이다. 현대사회의 많은 문제는 다른 존재를 타자화하는 데 있다. 정치도 자본도 모두 인간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면서 발전해 오고 있다. 너는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는 나에게 무엇인가가 중요한 시대인 것이다. 양애경 시인의 「여자」는 그런 대상화가 대세가 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한 존재가 어떻게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가진 진정성과 허무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요설적이고 난삽한 언어가 주류인 세태 속에서 쉽고 명확한 언어가 어떤 깊이를 만들어내는지 이 작품은 잘 보여주고 있다.

 

두 시인의 수상을 축하하며 아울러 이번 수상이 두 시인에게나 우리 <애지>에게나 큰 발전의 계기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심사위원 반경환 이형권 황정산(심사평 황정산)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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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전문 계간지 <애지>가 주관하는 제10회 애지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애지문학상 관계자는 남자 시 부문 함기석(46), 여자 시 부문에 양애경(56)이 선정됐다고 밝혔다. 함씨는 「저녁의 비행운」, 양씨는 「여자」로 수상하게 됐다.
 
「저녁의 비행운」은 인식의 깊이와 미학적 성취를 높이 평가받았고, 「여자」는 쉽고 명확한 언어가 어떤 깊이를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준다는 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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