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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뛰기 시작했다 / 임호

 

 
출근길,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

은행알들이 비좁은 그녀의 구두에 밟혀 터진다

 

"헬로 에브리바디~ 근데 내가 좀 바쁘거든요~!"

 

우리의 그녀는 바쁘다

우리의 그녀는 뛰지 않을 수 없다

어깨에 당겨 맨 앙증맞은 가방엔

있어야 할 약간의 센스와

없어도 될 약간의 의심을 담고

우리의 그녀는 뛴다

한꺼번에 많이 벌릴 수 없어 조금씩 뛴다

누군가에게 잡히지 않을 만큼씩 뛴다

먹이를 쪼는 비둘기처럼 뒤뚱거리며 뛴다

그녀는 뛴다

늦지 않기 위해, 울지 않기 위해, 모자라지 않기 위해, 같아지기 위해?

 

그녀의 치마는 그녀가 선택할 수 없는 바람에 흩날리고

그녀의 가슴은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안도로 출렁이고

그녀의 쇄골은 떡볶이처럼 흐느적거리고

그녀의 뺨은 뿌듯함으로 달아오른다

 

우리는 이런 그녀를 흐믓하게 바라본다

우리는 그녀의 페이트런

그녀의 협잡꾼, 그녀의 앞잡이

상처의 방향이 다를 뿐

우리는 한 이불에서 뛰기 시작했다

누가 그녀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명랑한 그녀의 부주의를

누가 그녀를 모른 체 할 수 있겠는가

자꾸만 예뻐지는 그녀의 미래를

누가 그녀를 손가락질 할 수 있겠는가

그녀만의 달콤한 모멸을

 

그러므로 우리는 그녀의 피앙세

도려낸 시간에서 흐르는 육즙을 받아 마시며

저 푸른 초원 위에 녹초가 되어 쓰러질 때까지 달리다가

돌아와 그녀가 사라진 엘리베이터앞에 앉아

포크를 움켜쥐고 그녀의 퇴근을 기다리는

우리는, 우리는 모두

그녀의 그녀

 

 

 

 

[당선소감]

 

기차 플랫폼에 앉아있다. 형형색색으로 머물러 있던 기다란 콘테이너 행렬이 서로 잡아당기는 소리를 요란하게 전달하며 다시 출발한다.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얼떨결에 끊고 한참 후에야 누군가 나를 잡아당겨주는 소리가 뒤늦게 심장에서 울려온다.

 

6년 전 마흔 중반을 훌쩍 넘어서며 웬지 이렇게 살면 안 될 것다는 불안이 밀려왔고,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이 되어보려는 방편으로 시의 문을 두드렸다.

 

출퇴근하는 광역버스에서 착상을 메모해놓았다가 주말 아침 일찍 동네 도서관에 들어앉아 시를 갈무리하고 다시 텃밭으로 나가는 일과가 자주, 꽤 오래 지속되었다. 신촌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시에 묶인 사람들과 합평하며 배운 오랜 시간은 아직도 문학과 시에 대해 막연한 감만 갖고 있는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다 쓴 시들을 뒤돌아보면 부끄럽다.

 

나는 왜 시를 택했을까? 시는 내게 무슨 의미인가? '시적인 것'들은 어디에 있다가 언제 나타나는가? 무슨 자격증을 따도 시원찮을 마당에 왜 이른 아침에 시를 쓰고 앉아 있나? 이런 질문들과 싸우다 그만두려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시가 설혹 내 인생의 장식물에 불과해지더라도 그냥 같이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 얼마 전의 일이다. 아마도 오늘 당선은 이대로 그 길을 떠나라는 재촉일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숙제를 다 풀지도 못했는데 '참 잘했어요'를 받은 느낌이다. 돌이켜보면 시의 꼬리를 쥐어잡고 끝까지 매달려 가 보지도 않았으며 주소 모를 시의 근처에서 늘 서성거렸던 것만 같다. 그러므로 '이제 여기서 어떻게 한 발 더 내딛어야 하나'가 앞으로의 크고 두려운 숙제이겠으나 그보다 먼저 못다 푼 숙제를 풀어 채워 놓는 것이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양심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앞으로도 시의 불빛이 내게서 깜빡거리는지 지켜봐 주신다면 고맙겠다.

 

시는 늘 경계에 서 있어야 한다고 자리를 찍어주신 김근 선생님과 시의 끈적끈적한 길을 함께 걷고 있는 이재은, 정희영, 조혜영, 정선율 그리고 미처 다 부르지 못하는 詩友들께 영광을 바친다. 뒷걸음 칠 때마다 등을 토닥여 주었고 당선소식에 핸드폰 너머 나 대신 울어준 아내 신경화와 사랑하는 두 아들, 그리고 가족들과 기쁨을 같이 하겠다. 책으로만 접한 시의 여러 큰 스승들과 언제나 무료로 나를 품어준 일산 대화도서관에도 감사를 표한다. 앞으로 내게 좋은 시를 내어 주리라 믿는 이 세상에도 미리 감사한다.

 

 

 

 

예스이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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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거쳐 모두 열여섯 분의 작품이 본심 대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전체적으로 고른 수준의 작품들이었다. 본심에 오른 응모자들의 작품에서는 대부분 서정시를 짓는 언어에 대한 충분한 수련이 느껴졌다. 삶의 희망을 노래하는 신춘문예용이라거나 언어적 공교함에 머물러 있다거나 하는 문학상 심사평의 많은 말들도 실은 일정한 수준에 오른 작품들에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작품 중 본격적인 논의 대상으로 세 분의 작품을 먼저 골라 냈다. 「떨림」 「연어를 읽다」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 세 편이 그것이다.

「떨림」은 사물들에 대한 정밀한 관찰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관찰력은 세계의 보이지 않는 면모에 대한 상상과 통할 터인데, 이는 서정시의 기본 중에 기본이다. 이 작품이 주목된 것은 그 능력을 기이한 세계나 어색한 낯설음으로 몰아가지 않고 응모자 자신의 독특한 정서로 수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독특한 정서가 관념의 아득한 아우라로 빠지는 경우가 있다. 이 관념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방법이 응모자 자신의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심사위원들은 우려하였다.

 

「연어를 읽다」는 세계의 생명과 그것의 순환을 생태주의라는 이념에 실어 묘사한다.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이 상상력은 시의 언어가 곧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의 이념에 연결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아름답다. 시의 편에서 보면 그 상상력은 설명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기준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마지막 연이 그에 대한 우려를 갖게 했다. 시를 이완시키는 해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뛰기 시작했다」는 언어의 공교함이나 감각적 이미지 제작 능력에 있어서는 위 두 작품보다 뛰어나지 않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이 응모자만의 세계와 시각이 살아 있다. 출근길의 조바심을 현대인 모두의 조바심으로 확장시키는 시의 진술들에는 경쾌하고 맑은 삶이 들어 있는데, 시의 언어에는 가벼움만 있는 것도 아니다. "늦지 않기 위해, 울지 않기 위해, 모자라지 않기 위해, 같아지기 위해"라는 구절은 저 가벼움과 삶의 비애를 적절히 결합시키는 언어적 능력과 정서 조절의 방법을 잘 보여준다. 심사위원들은 이 새로운 경쾌함과 비애에 가장 높은 점수를 부여하였다.

 

심사위원 이시영, 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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