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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 문나원

 

 

아침 열시, 여자는 '주름'하고 입속으로 뇌까린다
블라인드로 스며든 몇 장 햇살이 일렁임조차 없이 마룻바닥에 고인다
여자의 삶은 곧 삶은 빨래처럼 표백되곤 한다
주름 팽팽하게 당겨 올라가 집게에 집힌 채 집게발을 들곤 한다
세 아이를 키우며 꼭두서니처럼 잘게 썰린 여자는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는다
여자는 이제 너무 많이 읽힌 문장이어서 시들 수도 없다

청소기 안 먼지들이 머리끄덩이를 잡고 실뱀처럼 엉긴다
부엌에서, 여자는 알약을 삼킨다
"이것 좀 봐!"
아이가 유리병을 흔든다
병속의 벌이 붕붕거린다
쓰레기통 옆 죽어가는 생쥐 위로
우울증 환자의 머리에 덧씌워진 비닐봉지 같은 햇살이 고인다

값싼 비닐처럼 추억은 야윈다
여자를 잘 따르던 비숑 프리제는 이유 없이 밥을 굶기 시작하더니 보름도 채 안되어 죽었다
남편의 사업은 말린 고사리처럼 불어나고 아이들은 옥수수처럼 자란다
비교적 순조로운 날들이다, 여자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단단했던 어제의 눈망울들은 어디서 물기를 버렸는가

그러나 저 살찐 햇살은 그늘의 혈연이다, 햇살은 그늘을 살찌운다
여자는 다시금 뇌까린다, 그나마 다행스런 날들이지 않은가
병속의 벌처럼 숨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만 빼면,

 

 

 

 

[당선소감]

 

내 안에 핀 꽃을 도려내었다. 내 것이면서 결코 내 것일 수 없는 것, 하지만 내 것일 수밖에 없는 것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왜 모두 상처 입은 것들일까. 진물을 흘리고 있을까.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달라던 어머니가 몹시 그리운 날이다. 술이 다 깨도록 새벽까지 창(唱)을 하시던 아버지도 그립다. 두 분의 한(恨)과 쓸쓸한 낭만이 나에게 시를 쓰도록 종용하였다.

내가 버린 것들과 나를 버린 것들, 그 불가피한 사이의 간극을 시로 쓰고 싶다.

이름 잃은 것들과 이름 없는 것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수술 후 회복 중에 당선소식을 들었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격려하고 지도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오늘 아침 시를 쓴 사람만이 시인'이라고 하신 장옥관 선생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다. 축하해준 가족과 지인들께 고마움을 전한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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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여성 특유의 현실 감각에 주목

 

예심을 통과한 30분의 작품을 읽고 모두 여섯 분의 응모작을 다시 가려 뽑았다. '아빠가 돌아온다' 3, '우리는 바다를 떠도는 노숙자들' 4, '동학사' 4, '거짓말 공책' 2, '연습을 훔쳐보다' 4, '괜찮은 날' 3편이 그 작품들이다. 경쾌한 상상력과 낯선 이미지들, 언어의 숙련도가 눈에 띄었다는 사실을 먼저 밝혀 둔다. 작품들을 다시 검토한 후 우리는 이 후보작들 중 '연습을 훔쳐보다''봄날'에 주목했다. '연습을 훔쳐보다'를 투고한 분의 언어 솜씨는 매우 우수하다. 명확한 시적 결말은 언어의 힘을 충분히 드러내 준다. 그러나 언어적 재기에 치여서 통제력을 잃는 게 흠이다. "꽃잎 하나하나 빼며 허무는 허무虛無/요 며칠 허물어진 발자국들"과 같은 표현이 그렇다. '봄날'을 응모한 분의 작품들에는 전체적으로 일관된 주제와 시선의 힘이 있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주제의식이 그것이다. 이 특징은 여성들이 현재 갖고 있을 여러 각별한 현실의 양상들로부터 나오는 것일텐데, 이에 대한 응모자의 인식도 뚜렷하다. "여자는 이제 너무 많이 읽힌 문장이어서"라는 구절은 상투적인 것인데 이 구절을 "시들 수도 없다"라는 표현으로 이어서 새롭게 반전시키는 능력 또한 주목할 만하다. 본심위원들은 이 작품과 함께 투고된 다른 작품들의 일정한 수준을 고려하여 '봄날'을 올해의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아깝게 낙선한 분들에게는 격려의 말씀을 보내면서 새 시인의 탄생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김명인(시인박수연(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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