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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 임주아

 

 

당신이 내 처음이야 말하던 젊은 아빠 입가엔 수염이 복숭아솜털처럼 엷게 돋아나 있었겠지 엄마는 겁도 없이 복숭아를 앙물었겠지 언제부터 뱃속에 단물이 똑똑 차오르고 있었는지 모르지 이상하다 이상하다 당신이 매일 쓰다듬은 곡선이 나였는지 
 

​그해 여름 홍수 난 집 마당에 떨어진 복숭아 두 알 막 태어난 아기 얼굴 같은, 산모가 위험하니 그냥 낳으세요, 그냥 나온 나는 태어나 백도복숭아처럼 물컹한 젖을 물고 눈을 끔뻑거렸겠지 눕혀두면 하루종일 잠만 자니 얼마나 좋은지 엄마는 말했지
 

​깨어나면 조금은 소란스러운 십 층집 어느 날 무선전화기가 날아다니는 종종 창문 밖으로 식탁 의자가 떨어지는 떨어진 의자가 일층 정원을 박살내는 동네방네 돌아다닌 소문이 햇볕을 꺾는 대낮 바람결에 모빌은 돌아가지 아이 좋아, 동해안 한 바퀴 시원하게 돌고 온 아빠 곰 같은 등 뒤에 서너 해 살다간 여자 풋복숭아 자국 돋아나는 눈두덩이 엄마 어디 가
 

​짓이겨진 과육을 뚝뚝 흘리면서 나는 천천히 무릎을 쓰다듬지 뭉게뭉게 피어나는 욕탕에서 오랜만에 만난 당신의 살을 만지지 복숭아껍질 따가운 살갗, 엉덩이가 반으로 쪼개지는 기분이야 붉은 속살,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온탕과 냉탕 사이에서 애인과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 놀지 더 이상 처음이 아닌 우리에게 또 한 철이

 

 

 

 

2015 신춘문예 당선시집

 

nefing.com

 

 

 

[당선소감] 아빠께 바친다, 슬프지 않게 열심히 쓰겠다

 

꿈을 꾸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였다. 그는 물에 빠져 오래 나오지 못한 사람처럼 몸이 퉁퉁 불어있었다. 왼쪽 이마는 어디 심하게 부딪쳤는지 불룩 튀어나와 시퍼랬고, 손가락은 마디마다 흰 뼈가 드러나 있었다. 물 위에 상반신만 내놓은 채 아무 미동도 없는 그가 가만히 내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오래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내가 너를 구했다. 핏방울이 관자놀이를 타고 그의 손가락에 떨어졌다. 그를 구하고 싶었다.

얼마 전 수첩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우리의 평생은 잘못된 자리에 놓인 모든 것들을 제자리로 옮겨놓는 데 쓰일 것이다. 다시 고쳐 쓴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나는 당신을 구하지 못했다고. 보고 싶다고.

아버지가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다 자랐으므로 그의 옆엔 늘 내가 없었으므로. 하지만 그가 이곳에 없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겠다. 떠난 사람을 바라볼 때, 그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 문장으로 복원해보려 애쓸 때, 다 쓴 베개에 울컥 쏟길 때, 등과 벽이 맞대어 질 때, 겨우 생각나지 않을 때, 문득 아버지는 꿈에 나타날 것이다. 살아 한 번도 보여드리지 못했던 시를 내민다. 슬프지 않도록 열심히 쓰겠다.

 

 

 

 

[심사평] 혼잣말에 귀 기울이게 하는 흡입력 뛰어나

 

공허하고 관념적인 진술 대신에 구체적인 삶에 언어를 밀착시키는 시들이 늘어났다. 그만큼 삶의 문제가 절박하다는 인식이 시를 쓰는 이들 사이에 공감을 얻고 있다는 뜻이리라. 현실의 문제로부터 멀찍이 달아나 몽환의 숲을 헤매던 언어가 조금씩 재정비되고 있는 것 같아 반가웠다.

당선작으로 고른 임주아 씨의 ‘복숭아’는 가족사의 한 단면을 명징하게 부조해 보여주고 있다. 시적 대상에 자신의 체험을 비벼 넣는 솜씨가 만만치 않고, 독자를 시의 안쪽으로 끌어당기는 능력이 뛰어나다. 요즈음 유행하는 시들이 혼잣말을 그저 혼자 중얼거리고 마는데 이 시는 혼잣말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시적인 흡입력이 각별하다. 축하한다.

끝까지 겨룬 응모작 중에 이인서 씨의 ‘말이 달아났다’는 “돌아갈 수 없다면 그곳이 낙원인지 모른다”는 첫 문장이 매혹적이다. 기억에서 끌어올린 소재를 시간의 경과와 중첩해서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는데, 매우 안정된 호흡이 오히려 불안스럽다는 게 흠이었다.

엄정숙 씨의 ‘외인출입금지’는 인적 끊어진 ‘빈집’을 자신의 호흡으로 노래하고 있는 시다. 묘사도 적절하다. 다만 시의 뒷부분에 등장하는 ‘나’의 역할이 시에서 지나치게 미미하게 다뤄졌다는 게 불만이다.

이삼례 씨의 ‘미용실 앞면과 뒷면은 서로 닮아가는 것이다’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미용실 벽면의 거울을 소재로 상상력을 펼쳐 보이는 시다. 때로 돌출된 이미지가 시 속에 용해되지 못하고 돌부리처럼 걸릴 때가 있다. 완벽한 퇴고에 소홀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밖에 이동한, 김형미, 허승호, 박미경 씨의 작품들을 유심히 읽었다. 한꺼풀만 벗으면 모두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는 분들이다. 습작시절에는 무엇보다 온몸으로 긴장할 줄 아는 능력이 필요하다.

심사위원 안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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