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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는 도시 / 이형기

 

 

이 도시의 시민들은 아무도 죽지 않는다
어제 분명히 죽었는데도
오늘은 또 거뜬히 살아나서
조간을 펼쳐든 스트랄드브라그* 씨의 아침 식탁
그것은 위대한 생명공학의 승리
인공합성의 디엔에이 주사 한 대가
시민들의 영생불사를 확실하게 보장하고 있다
교통사고로 머리가 깨어진 채
오토바이의 액셀러레이터를 밟아대는 젊은 폭주족
온 몸에 암세포가 퍼져서
수술한 배를 그냥 덮어버린 노인이
내기 장기를 두다가 싸운다
아무도 죽지 않기 때문에
장사를 망치고 죽을 지경인 장의사 주인도
죽지 않고 살아서 계속 파리를 날린다
1년에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는 계산은
전설이 되어버린 도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누구도 제 나이를 아는 사람이 없다
젊어도 늙고
늙어도 늙고
태어날 때부터 이미 폭삭 늙어서
온통 노욕과 고집불통만 칡넝쿨처럼 칭칭
무성하게 뻗어난 도시
실연한 백발의 노처녀가 드디어 목을 맨다
그러나 결코 죽을 수는 없는
차가운 디엔에이의 위력
스스로 개발한 첨단의 생명공학이
죽음에의 길마저 차단해버린 문명의 막바지에서
시민들의 소망은 하나 밖에 없다
아 죽고 싶다

  
* 스트랄드브라그는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영생 불사하는 종족의 이름이다.

 

 

 

 

이형기 시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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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에 간행된 시집 〈적막강산〉에 수록된 시 〈낙화〉로 유명한 시인이다. 존재의 무상함과 아름답게 사라져가는 소멸의 미학을 특유의 반어법으로 표현해, 사라짐에 대한 존재론적·사회학적 미학의 정점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진주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왔다.

 

〈연합신문〉·〈동양통신〉·〈서울신문〉 기자 및 〈대한일보〉 문화부장, 〈국제신문〉 편집국장 등을 역임하고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때 언론계를 떠났다. 1981년 부산산업대학 교수를 거쳐 1987년부터 동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1974년 〈월간문학〉 주간을 지냈고 1994년부터 2년간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있었다.

 

1949년 고등학교 재학 중에 〈문예〉지에 〈비오는 날〉이 추천되어 최연소 기록을 세우며 등단했다. 초기 이형기의 시 세계는 자연을 응시하는 가운데 맑고 고운 현대적 서정의 세계를 추구했으며, 자아와 존재의 궁극을 추구하며 조락과 소멸의 운명을 수긍하는 전통 서정의 계보에 속했다. 시집 〈적막강산〉(1963)에서 그는 생의 근원적 고독과 세계의 공허를 일찍부터 깨달은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펼쳐 보인다.

 

1970년대 이후에는 투명하고 절제된 서정에서 벗어나 상투성과 모방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새로움과 시적 방법론의 갱신을 추구한다. 1980년대 중반 이후로는 인간 내면을 탐구해가는 경향을 띠게 되었고 사물을 관념화하여 우회적으로 서정의 세계를 드러내는 시를 썼다. 뇌졸중으로 투병 중이던 1998년 〈절벽〉에서는 소멸의 운명과 맞서 있는 단독자의 고독과 결의를 노래했다. 여기서 그는 소멸이라는 존재의 소실점과 생명의 궁극성에 대한 질문에, 삶이란 허무와 충만이라는 양가적 시간이 지속적으로 순환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평론으로도 주목받은 그는 1963년 이어령과의 문학논쟁에서 평론 표절과 모방문학론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당시의 예술가의 현실참여 논쟁에서는 예술가의 개성적 자유를 옹호하고 순수문학의 예술지상주의적 경향을 강조했으며 이 같은 문학세계는 이후 줄곧 견지되었다.

 

시집에 〈적막강산〉·〈돌베개의 시〉·〈풍선심장〉·〈그해 겨울의 눈〉·〈심야의 일기예보〉·〈보물섬의 지도〉·〈죽지않는 도시〉·〈절벽〉·〈꿈꾸는 한발〉·〈존재하지 않는 나무〉 등이 있고, 평론집에 〈시와 언어〉·〈감성의 논리〉·〈한국문학의 반성〉·〈시와 언어〉·〈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수필집에 〈자하산의 청노루〉·〈서서 흐르는 강물〉·〈바람으로 만든 조약돌〉 등 저서 20여 권이 있다.

 

한국문학가협회상,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예술원상, 은관문화훈장, 서울시문화상, 윤동주문학상, 공초문학상, 만해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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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녀들의 마을 / 이형기

 

 

내 소싯적 벚꽃놀이 때는

꽃나무 밑에 서면 웅웅대는 벌들의 날개짓소리

온몸 후끈후근 닳아오른 꽃들은 그 소리에 홀려

자궁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황홀한 꽃가루받이의 집단 오르가즘

부끄러움이 없었다

 

오늘 이 과수원에도

만발한 사과꽃을 토플리스로 치장하고 나서서

소싯적 그때처럼 홀려대는 그 소리 기다리고 있건만

벌 한 마리 날아오지 않는다

아 활짝 열어만 놓고

아무 것도 받아들일 게 없는 그녀들의 자궁

무참한 부끄러움!

 

꽃들이 모두 석녀가 되어버린 마을

위생적으로 멸균(滅菌) 처리가 된 무기질(無機質) 침묵

침묵만 가득 찬 마을 한복판에

심약한 레이젤 카아슨*’여사가 새파랗게 질려 있다

가을에 사과가 열지 않으면 어떡하지요?

걱정도 팔자군, 수입하면 그만이지!

 

* 레이젤 카슨 : 미국의 과학자이자 녹색 운동가. 침묵의 봄의 저자. 1964년 작고.

 

 

 

이형기 시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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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사와 공초오상순선생숭모회(회장 구상)는 선생의 서른 번째 기일을 맞아 3일 상오 11시 문인·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수유리 빨래골 묘소에서 기제를 올린다. 이와 함께 하오 4시부터 서울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올해 처음 제정한 공초문학상시상식을 개최한다. 1회 수상자로는 이형기 시인이 선정됐다.

 

오상순 선생을 기리는 공초문학상의 첫 번째 수상자 선정된 이형기 시인은 시단의 선비로 후배들에게서 존경받는 이형기 시인(60·동국대 국문과 교수)상의 가치는 수상자에 의해 결정되며 그 상의 이미지의 팔할은 첫 수상자에 의해 지워진다는 통설을 되새기는 듯 기쁨에 앞서는 두려움의 심경을 토로했다.

 

이 교수는 경남 진주산으로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16살 때인 1949문예지를 통해 등단, 천재 소리를 들었다.적막강산」「심야의 일기」「예보」「풍선심장등 시집을 펴냈으며 감성의 논리」「한국 문학의 반성」「시와 언어등 비평집을 갖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를 신문기자 이형기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서울신문 정치부 기자를 거쳐 고 이병주 선생이 주필을 맡고 있던 부산 국제신문에서 폐간 당시 마지막 편집국장을 지내는 등 20여 년을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서 잔뼈가 굵은 특이한 경력 때문이다.

 

이번 제1회 공초문학상 수상 후보에 오른 시인으로는 성찬경· 박재삼· 박성룡· 김남주 ·고은· 박희진 씨등 쟁쟁한 한국 시단의 중진들이었다.

 

심사는 박두진· 이근배· 설창수씨 등 시인 3명과 박철희(서강대)교수, 신동욱(연세대)교수 등 문학평론가 2명 등 모두 5명이 맡았다. 선정이유는 공초문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에 대한 연구에도 일가견을 가진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공초는 그의 문학성뿐만 아니라 근대정신사에서도 특출난 인물이었습니다. 무소유· 무정처의 그의 생애 자체가 시를 뛰어넘는 한 편의 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신 공초와는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이씨와 공초의 인연은 서울 명동 청동다방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유명한 공초의 청동문학속에 자신의 단상도 몇 점 들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10여 년 전부터 공초문학에 관심을 가져 오상순의 시와 공사상이란 논문을 남겼다. 게다가 이번에 고인을 기리는 문학상까지 타게 됐으니 공초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굵다란 인연의 동아줄로 얽혀 있었던 셈이다

 

 

 

* 공초와 공초문학상

 

“공정성, 객관성, 작품성은 문학상의 권위를 지킬 수 있는 3대 조건이다. 공초문학상은 이것을 다 갖추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렇기에 수상자들은 이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시인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 공초 오상순

이근배 시인의 말이다. 20년 동안 이어 온 공초문학상의 의미를 적확하게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공초 오상순(1894~1963)은 1920년대 한국 신시운동의 선구가 된 동인지 ‘폐허’를 결성하며 서구의 폐허 의식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이후 ‘허무흔의 선언’ ‘방랑의 마음’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 등 명시를 발표하고 지론이던 독신주의를 지키며 혈육 한 점, 집 한 칸 없이 그득한 담배 연기처럼 살다 간 기인이었다.

공간을 초월해 시간 속에 영원히 산다는 의미로 ‘공초’라 불렸고 즐겨 피운 담배 연기 속에 묻혀 있다고 해서 ‘꽁초’라 불리었다고도 한다. 무일푼, 무소유로 일관하며 문학을 교리처럼 설파하고 세계 평등사상과 인간 해방의 꿈을 품은 뜨거운 지식인이자 ‘시를 몸소 체험한 유일한 시인’으로 불린다.


공초문학상 역시 공초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상자들을 냈다. 1993년 첫 수상자인 이형기 시인부터 박남수, 홍윤숙, 김여정, 박제천, 신경림, 오세영, 이탄, 정진규, 김종해, 김지하, 정현종, 천양희, 성찬경, 이수익, 조오현, 신달자, 이성부, 정호승 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에 대한 열정과 인간과 삶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로 문학적 절정에 올랐다고 평가받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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