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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씨창고 쉭쉭 / 이주송


멧돼지 한 마리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
산기슭이 들어있다

노루발, 뻐국새,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벌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

멀리 가고 싶은 풀씨들은 멧돼지 등에 올라타면 된다

제 몸에 눈 녹은 묵은 봄이 가려워
멧돼지는 부르르 온몸을 털어낼 터
씨앗들은 직파방식으로 파종될 것이다

북극의 스피츠베르겐섬에는 국제종자보관창고가 있다
먼 훗날의 구호(救護)를 위해 멧돼지 한 마리
그 쉭쉭거리는 씨앗창고를 기르고 싶다

이 산과 저 산
이쪽 풀밭과 저쪽 풀밭이라는 말
다 멧돼지의 등짝에서 떨어진 말일 것이다

그러니
너나들이로 섞이는 산
번지는 초록들은 멧돼지의 숨결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다

멧돼지 꼬리에서 반딧불이 날아오르고
꺼칠한 오해 속에서도
극지에서도 풀씨들이 움튼다

 

 

 

 

[당선 소감] “쉬지 않고 묵묵히 시의 길 걸을 것” 치유 위해 내디딘 걸음이 행운 전해줘 이끌어준 분들께 고맙다 말하고파

 

한해를 돌아보는 천변의 산책길에서 당선 소식을 받았습니다. 온몸의 통증으로 병원 순례를 하다가 무조건 시집을 읽었던 날들이 지나갔습니다. 시에 대한 첫걸음은 살기 위한 길이었고 고통의 유일한 탈출구였습니다. 치유로 시작한 글쓰기가 이렇게 큰 영광으로 이어지다니 아직도 얼떨떨합니다.

아버지가 개간한 산비탈 밭의 농작물은 늘 멧돼지들의 몫이었습니다. 형편없는 수확물 앞에 엄마의 하소연과 저들도 한식구라던 아버지의 뚝심이 엉기는 날이면 할머니 무릎에서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 날엔 멧돼지 등에 올라탄 채 산비탈을 오르내리며 농작물을 지키는 꿈을 꾸곤 했습니다. 멧돼지 발자국마다 애기똥풀이 피었고 개똥벌레들이 잡식동물들의 접근을 막아줬습니다. 잡초와 멧돼지랑 함께 먹고 살았던 유년의 밭은 이제 아버지와 함께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도심 곳곳에 멧돼지가 출현하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 산비탈 밭에서 한참을 서성이곤 합니다.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농민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쉬지 않고 묵묵히 걷겠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이끌어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응원해주신 공광규·이종섶 선생님, 시클 고맙습니다. 지켜봐준 가족들 사랑합니다. 오늘도 요양병원에서 자식들만 기다리고 있을 엄마, 당신의 기도대로 생의 가장 큰 선물을 안고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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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밀고 가는 역량 섬세하며 힘차 … 야생동물과의 상생까지 다뤄

 

예심을 통과한 21명의 작품은 일정수준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선자들의 손에 마지막까지 들려 있던 작품은 ‘그랴’와 ‘신기루’ 그리고 ‘풀씨창고 쉭쉭’이었다. ‘그랴’는 ‘그랴’라는 말을 통해 아버지와의 기억을 환하고 따뜻하게 더듬고 있는데, 시를 끌고 가는 힘이 남달랐다. 하지만 시적 긴장감이 아쉬웠고 다른 투고작에서 언어가 조금은 넘친다 싶었다. ‘신기루’는 독특한 비유와 이야기 방식으로 선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모호한 지점이 없지 않았고 동봉한 작품에서 편차가 느껴졌다.

‘풀씨창고 쉭쉭’은 강인한 생명력과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시였다. 그저 바람에 흔들리다 떨어지는 풀씨가 아닌 멧돼지의 등에 힘차게 올라타 대지를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씨앗의 모습은 당찼고, 시를 밀고 가는 역량은 섬세하면서도 힘찼다. 선자들은 몇번이고 행간의 여백까지 반복해 읽어나가며 이 시에 결정적인 흠결이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았으나, 마지막 행까지 다 읽고 난 후에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멧돼지의 “그 꺼칠한 털 속에는 웬만한 풀밭이나/산기슭이 들어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소 덜 다듬어지거나 서툰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노루발, 뻐꾹채, 지칭개, 복수초, 현호색, 강아지풀/ 질경이, 별개미취, 금낭화, 산자고, 쇠별꽃”의 이름을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묘한 서정성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이 “쉭쉭거리는 씨앗창고”의 풀씨는 “국경도 혈연도 지연도” 없이 극지에까지 초록의 생명력을 퍼트리고 있는데, 이 응모자는 말의 호흡을 나름의 방식으로 터득하고 있는 듯했다. 야생동물과 사람의 상생에 대한 고민과 질문까지 넌지시 덧붙여 던지고 있기도 한 이 시와 더불어 동봉한 다른 네편의 시에서도 신뢰를 주기에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어, 선자들은 논의의 끄트머리에 닿아 당선작으로 흔쾌히 동의했다.

이 작품들 외에도 ‘피싱’ ‘씨앗 열개’ ‘사후(死後)’ 등의 작품이 논의선상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끝까지 최선을 다한 분들에게는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곽재구, 박성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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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 / 이주송

 

 

바위 속에서

나뭇잎의 잎맥인 듯 빗살무늬인 듯

오래된 뼈가 걷고 있었다

참빗을 닮은 한 벌의 뼈

초식이었던 뿔공룡은 일억 일천만 년 동안

바위 속으로 스며든 빗물이나

몇 번의 지각이 이동하는 소리로 연명했다

살점과 내장과 표피를 버리고 온전한 바위가 되어

마지막을 증언하고 싶었을 거다

천적이 없는 단 하나의 계절 속에서 그 오랜 진화의 시간

단단한 근육과 푸른 이끼의 털을 갖고 싶었을 거다

그러다 광물의 구()속에서도 부화의 시간은 다가와

화석에게도 통점이 도졌을 거다

 

갯벌의 어패류들이 조금씩 달을 뜯어먹는 동안

공룡은 부리주둥이가 뭉툭해지도록

태초의 서식지를 감각했을 것이다

한 겹 두 겹 더위와 추위를 껴입고

돌가루를 되새김질 하며 온 몸에 밴 울음을

초원의 저물녘에 방류할 때를 기다리며

바위 속까지 헤엄치고 있는 신경배돌기를 방치했을 것이다

부러진 골반 뼈로 백악기의 유전자를 복원하고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의 낯선 이름을

뒤집어썼을 것이다

 

아직도 공룡은 진화중이다

크고 넓은 바위 속에는

부화를 꿈꾸는 공룡들이 은밀하게 살고 있다

 

* 2008년 경기도 화성시 전곡항에서 발견된 뿔공룡화석

 

 

 

 

​[당선소감]

​ 

현관문을 부수고갑자기 멧돼지 한 마리가 쳐들어왔습니다. 사납게 물어뜯는 멧돼지를 피할 수 없었고 온 몸이 피투성이 된 채 잠에서 깼습니다. 잔인했던 꿈속의 공포가 역설로 바뀌었습니다. 창문의 햇살이 반갑고 좋았습니다.

 

풀리지 않는 시를 붙잡고 무수한 단어를 대입해보던 중이었습니다. 적절한 시어를 찾지 못해 멍 때리며 앉아있던 차에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순간, 앞이 하얗고 아무 생각이 안 났습니다. 꿈속의 습격과 긴장처럼 아무리 도망치고 숨어도 결국엔 혼자서 견뎌야 할 언어가 시의 세계라 했던가요. 읽는 사람만이 단 한 줄이라도 쓸 수 있다는 교수님 말씀이 불현듯 지나갔습니다. 무조건 읽고 썼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이 감사한 순간입니다. 의미 있는 생태시문학상에 부족한 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 평택문인협회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자연과 사람의 공생에 관한 다각도의 시각을 키웠습니다. 한 발짝 더 전진하라는 응원으로 받아들이며 누가 되지 않도록 치열하게 걷겠습니다. 지칠 때마다 격려와 채찍으로 묵묵히 이끌어주신 선생님들, 냉철하고 기탄없는 합평시간을 즐거움으로 채워줬던 문우들 고맙습니다. 날마다 안부를 챙기는 친정엄마와 아낌없는 배려로 지켜봐 준 가족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심사평]

 

급변하는 지구촌 기후변화로 생태계 순환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자연과 인간이 공멸할 위기에 처해있다. 인간의 탐욕에 의하여 생태계 또한 질서를 상실하고 있으며 인간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 받고 있는 실정에서 우리는 당면한 현실적 문제의식을 갖고 창작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시하여 환경에 대한 의식을 환기하고 환경파괴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자 생태시 문학 공모전을 매년 실시하고 있으며 올해로 일곱 번째 공모전을 열었다.

 

환경에 관심 있는 많은 분들이 응모해 왔고 생태시 문학상의 심사기준은 인간에 의한 자연환경 파괴, 인간에 의한 사회 환경유린, 인간에 의한 인간 존엄성 상실 등 생태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현재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일깨워 주며 정서적인 힘을 지닌 작품을 선별해내는데 중점을 두었다.

 

생태시 문학상에 응모한 작품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고 생태시에 대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 많아 심사하면서 즐거웠고 생태문학에 대한 열정이 해마다 높아가고 있음에 우열을 가리는 일이 쉽지 않았다.

 

예선을 거쳐 네 분의 작품을 본선에 올렸다. ‘귀를 매달다’ 외 2편은 담쟁이가 철길의 소음을 받아내며 자라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철가루 달라붙은 훈장 같은 잎을 달고 흔들리는 것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하늘로 길을 내기 위해 나무들이 비질을 한다 로 시작하는 ’메타세쿼이아 길‘도 심사위원들의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함께 보낸 두 작품의 뒷심이 부족했다. ’포경‘ 외 2편의 작품도 끝까지 거론이 되었으나 수상작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주송의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는 한반도 최초의 원시 뿔공룡으로 경기도 화성에서 발견돼 코리아케라톱스 화성엔시스라 명명된 공룡을 주제로 밀도 있고 짜임새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사물의 구체성과 주제를 밀고 나가는 힘이 탁월했으며 개성적인 사유로 시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함께 응모한 작품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고 생태시의 특성을 잘 살려냈다는 심사자들의 호평을 받은 작품으로 제 7회 생태시 문학상 대상의 영광을 차지했다. 수상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좋은 작품을 보내준 분들께 감사드린다

 

- 심사위원. 배두순. 진춘석. 우대식. 김영자. 한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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