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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빌레라 / 이은채

 


거실에 홀로 앉아 차를 달인다

미수를 넘긴 백통 나비장에 기대어 그만 까무룩 잠이 든 사이

잠결에 양 어깻죽지가 순간 스을쩍 들리는 듯
겨드랑이 비밀스런 숲에서 일어나는 무슨 물결소리 찻물 따르는 소리
그러다가 귓속말처럼 잎 틔우는 소리

이윽고 그 잎새 화알짝 펼쳐지며 몸이 송두리째 붕 뜨는 찰라 어디선가 고양이 한 마리 쏜살같이 튀어나와 내 손을 덥석 베어 무는데

나빌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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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채의 시는 외견상 화려하거나 요란하지 않다. 특별히 현학적이라거나 심오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그 특유의 호소력으로 독자들을 향해 잔잔하게 다가선다. 거기에는 일상 속에서 마주친 사소한 사건들에 대한 내밀한 관찰의 기록이 있고, 흔히 지나쳐버리기 쉬운 존재물들과의 진솔한 대면을 통한 교감의 순간이 있으며, 그것들에 둘러싸여, 그것들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서민들의 삶에 겨운 눈물과 애환이 있다. 그 다양한 모습들을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솜씨 있게 갈무리하여 독자 앞에 펼쳐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감각적 방식으로 표현된 작은 우화寓話의 세계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김유중(문학평론가,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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