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이승수
아까부터 내 옆에 앉은 사내가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전철 바닥에
누런 갈매기들을 토해낼 때마다
그가 멸치떼를 쫓아다녔는지
오징어를 잡으러 다녔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지만
<과녁을 맞히려면 과녁 위를 겨냥하라*〉는
구절에 이르러 나는
마구 흩어지고 있는 활자들을
애써 끌어 모아야 했다 그는
과녁 대신 자신의 다리를 찌른 듯이
한참을 절룩대다 앉았기 때문이다
그가 유일하게 피워낼 수 있는 것은
솔기가 다 닳아 구지레해진 바지 주머니에서
떨리는 손으로 꺼내어 간신히 입에 문
<장미〉담배가 전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성한 무릎 위에는 어린 계집 아이가
마지막 남은 영토를 지키듯 그렇게 매달려 있었고
뒤돌아 노려본 창문의 하늘엔 새들이 잠시
내뱉아진 침으로 흘렀다 그의
두눈에선 독기오른 작살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
기어이 나는 책을 떨어뜨리고 또 활자들은 모조리
바닥 위에 쏟아졌지만 한남, 옥수, 응봉
세 개의 海域을 지나는 동안 웬일인지 그의
시선은 바닥에 꽂혀 있었다
기침 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크르릉대며 전철이 서고
혈흔 같은 그의 딸이 손도 잡아 주지 않는
아비의 발자국을 지우며 뒤따라 나간다
병들고 괴팍한 선장과 헤어졌으니
선원들의 불만 섞인 술렁임도 이제 더는 없으리
저 사내는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천 바다를 아주 떠나고 싶은 것일까
책을 주우며 무심코 올려다 본 전철의 천장은
묘하기도 하지, 궁륭 모양으로 부풀며
제 흰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시간은 자정을 향해 조금씩 깊어 가는데
남겨진 사람들
출렁이는 물살에 이리저리 내몰리다가
몇몇은 토해지고 몇몇은 그대로 잠이 든다
나는 가만히 책을 주웠다
* 에머슨
[심사평]
올해에도 1500명이 넘는 분들이 응모해 주셨다. 그 어떤 물질적 보상도 기약되기 어려운 일에 자신을 쏟아붓는 그들의 재능과 노고에 오늘의 우리 시는 크게 신세지고 있다.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20여명의 후보들을 놓고 우리는 적지 않게 고심했다. 저마다의 재능과 수련을 수긍할 수 있었지만, 또 모두 그만큼씩의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상력, 예민한 미적 균형감각, 시에 임하는 구도적 열정의 가능성을 신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필연이며 제도로서의 신춘문예의 사명은 그러한 새 재능의 발굴에 있는 것이다.
신덕환 이영주 김병기 김규 최한 신동언 양해기 이승수씨의 시를 우선 물망에 올려 검토했다. 신덕환씨와 이영주씨의 시는 그 안정감과 시선의 깊이에 패기와 긴장감이 보태졌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김병기씨의 독특한 문장과 팽팽한 결말들은 매력적이었으나 비문(非文)의 빈발이 지적되었다. 김규, 최한씨는 그 수준급의 시적 조형능력과 감각의 자유로움이 좀 더 깊고 신실한 내적 근거를 가질 여지가 있다고 보았다. 신동언씨의 후반부 시편들은 이의가 없을 만큼 높은 완성도의 것이었으나 전체적으로 자기 답습이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결국 양해기, 이승수씨로 후보를 압축한 후에도 결론은 쉽지 않았다. 양해기씨의 시를 깊고 어른스럽다고 한다면 이승수씨는 발랄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양해기씨가 견실하고 잘 정돈된 대신 어딘가 닫혀 있는 느낌이라면 이승수씨는 진취적인 만큼 일말의 산만함과 치기를 부담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우리는 진통 끝에 이승수씨의 ‘젊은 열정’을 앞자리에 놓기로 합의했다. 거기에는 양해기씨의 시들이 고르기는 했지만 ‘이 한편’이라고 집어 말할 만한 작품이 마땅찮았던 점도 크게 작용했다.
- 심사위원 김혜순, 김사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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