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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성지순례 / 이공

 

 

세간에 바람이 제법 무르익었습니다

실수로 찻물 타 버린 커피 같은 세월도

이제는 아실만합니다

방부처리 된 뉴스로 창문을 닦을 시간입니다

유통기한 지난 영화가 싱겁게 끝이 났으니까요

빈 빨래즐에 마음 몇 장 빨아 널어놓고

투덜거리며 올라오던 아랫마을 내려다봅니다

함부로 밝고 올라왔습니다

성배에 입맞추려했던 십자군처럼

마주치는 사람들 모두다 적인 줄 알았습니다

물 위라도 걸울 수 있으리란 심장 때문에

허우적거렸던 날 많았습니다

여기 와서야 고개 숙여지다니요

연속극 틀어놓은 저 골목에서

날마다 최후의 만찬 열린다는 걸 모르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열 두 광주리 수북히 남도록

나누어 먹고 있다는 걸 나만 모르고……

바람도 내려가서 떡 한 덩이 얻어먹고 갑시다

손때 차곡차곡 쌓여가는 저기가 유적지 같습니다.

 

 

 

 

 

[은상] 마블링 / 김승훈

 

 

그는 하나의 결을 위해 태어난다 몸속에 꽃살문 무늬를 예쁘게 새기기 위해, 붉은 살점에 박힌 하얀 지방의 번짐을 위해, 한약방첩으로 처방된 국물을 마셔야만 했다 식욕을 돋우기 위해 쌀막걸리를 들이 키고, 늙은 소도 벌떡 일어선다는 참기름 두른 산낙지와 유기농 웰빙 바람을 타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가정식 볏짚을 쑨 여물 디저트까지 먹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콧구멍에 혀를 쓰윽 집어넣고 입 주변을 싹싹 다시는 걸로 마무리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아야만 했다 얼마나 능률적으로 살찌워지는지, 초음파로 속살을 점검받아야만 했다 이제 사람들은 그를 평가하기 전에 그의 비문을 읽는다 그의 내력에 대한 풍문이 혀끝에서 돌자 사람들 입맛을 다신다 이제 사람들 그를 먹는 대신 무늬를 먹기 시작한다 소문을 먹는다

 

 

 

 

 

[은상] 바람속의 잠 / 김정아

 

 

억새들이 서로를 껴안다가

기어이 출렁거리는 무덤이 되어버린 그곳

바람이 비닐 창을 움켜잡고 마구 흔들어댄다

돌멩이를 눌러 둔 천막은 왝왝거리며 멀미를 하고

덜컹거리는 문틈 사이에 뜯겨져 나간 햇볕이

먼지 바닥에 누런 가래침처럼 뒹구는 오후

손님이 온 줄도 모르고 타자 위에 엎드려 잠을 청하는 포장 집 여자

바람이 꿈속까지 불어가 그녀를 떠밀었는지

야윈 어깨가 흔들리고 숨소리가 서걱거린다

식은 순대 속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오래된 가난

출입구가 마른 명태처럼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다

마른 갈꽃이 혼자 떠돌다 돌아간 천막집에 남아 있는 것은

잠든 여자의 머리카락을 조용히 쓸어주는 갈대의 그림자

내 마음은 언제 긁혔는지 자꾸 따끔거렸다

 

 

 

 

2009 제1회 천강 문학상 수상 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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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감자를 묻다 / 유현주

 

 

상기된 감자싹이 상자 안에 가득하다

막힌 길 뚫지 못해 탱천한 분기가

실업의 암갈색으로 틈께로만 모였다

 

푸르게 돋아날 날 기다리며 와 줄까

응집된 독기 짜내 제 몸에 바르면서

상심이 주름질 때까지 밀어냈을 종이 벽

 

큰 자리 욕심 없이 지상의 한 뼘이면

몇 개의 알맹이를 건사할 수 있을 텐데

하늘 땅 어느 곳에도 이름 달지 못한다

 

정원 한쪽 손질해 싹을 세워 묻고서

놓친 길 잡아준 듯 흡족한 마음 들어

오늘은 내 길도 찾아질까 발걸음이 가볍다

 

 

 

 

 

[동상] 배추벌레 / 강명수

 

 

밤새 별을 따다 배추 치마폭에 장식을 했나보다

밤의 손가락이 늘어갈수록

우주의 원을 더 많이 조각해낸다

직선을 내지 않고 만드는 둥근 마음

도대체 이 공()판화를 만드는

조각가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얼마나 작업에 몰두하였는지

제 몸도 푸르게 물들어가는 줄도 모른다

배추 잎과 일심동체가 되어

삶의 흔적을 열심히 통찰해내는

! 워커홀릭

밤하늘의 숫자만큼이나

뭔가를 재개발해낸다

먹고 버리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지구의 둥근 몸이 안쓰러운지

이 미물은 삭아질 흔적만을 남긴다

속내를 비워내고 비워내서

저 광대무변 허공을 집삼아 살아가는

또 다른 마하보리

바람소리

빗방울소리

낙엽 부벼대는 소리

새들이 발자국 소리까지도

훤히 들릴 수 있도록

스스로를 가두는 집을 짓지 아니한다

마치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놓은 것처럼

 

 

 

 

 

[동상] 구절리 / 정일남

 

 

단풍이 대성통곡하여 에움길에 만판 부러진다

구절초가 구절리가 여깁니다 여기예요

기차는 더 갈 곳에 없어요 종착이예요

바람의 입을 빌려 알려준다

늙은 역장의 모자엔 금환이 번쩍인다

 

이젠 누가 기타를 치면서 오지도 않는 기차

석탄을 캐던 광부는 상한 폐를 싸안고 떠난지 오래다

50톤 화차가 녹슬고

흥청대던 호경기도 그림자도 남지 않았다

그 많던 술집은 온데간데없고

화장품 냄새 풍기던 단골집 여자

양상추 같은 부드러운 마음도 떠났다

돼지비계 놓고 술잔을 건네며 인생을 오판하던 낙관주의자

노동 속에 땀이 번쩍이고 무덤처럼 쌓이던 비애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보고 가는 것은

침엽수림이 촘촘하고 갱구가 상처로 버려진 곳

추억이 그리움을 핥고 있는 곳

다시 지난날을 생각하면

구절초야 미안하다

구절초는 구절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꽃이다

 

 

 

 

봄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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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군은 의병장 천강 곽재우 홍의장군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올해 처음으로 제정한 천강문학상 수상작들을 선정했다고 9일 밝혔다.

 

소설 부문 대상에는 재미동포인 주경로(58) 씨의 `여우별을 사랑하다', 시ㆍ시조 부문 대상에는 백점례(50) 씨의 시조 `물풀'이 각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아동문학 부문에서는 이순영(51) 씨의 `꽃시계', 수필 부문에서는 김희자(44) 씨의 `등피'가 각각 대상 수상작으로 뽑혔다.

 

이번 심사는 비공개로 엄정하고 공정하게 이뤄졌으며 수상자는 예심과 본심을 거쳐 최종 결정됐다.

 

71일부터 접수하기 시작한 제1회 천강문학상 작품 공모에 모두 800여명, 5000여편이 접수됐고 국내는 물론 미국을 비롯해 캐나다와 아르헨티나 등지에서도 응모해 해외 동포들에게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시상식은 16일 곽재우 장군 탄신 457주년 다례식과 병행해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휘하 17장령과 무명 의병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충익사 경내에서 열릴 예정이다.

 

한편 천강문학상은 의령군이 의병장인 천강 곽재우 홍의장군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충의정신 함양 및 문학의 저변확대와 우수 문인 배출은 물론 인물의 고장인 청정 의령의 가치를 전파하기 위해 제정한 문학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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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물풀 / 백점례

 

 

불볕 터진 들녘 너머 풀떨기 못물 아래

따라지들 몰려들어 스크럼을 짜고 있다

물길이 빠져나가다 멱살 잡혀 누워있다

 

골풀의 부추김에 울컥 솟은 부들이며

핏줄 푸른 마름 곁에 웃자란 생이가래

한평생 반듯한 자리 올라설 수 없었다

 

부푸는 소문의 늪 뻗쳐 오른 결기마저

시간이 지나가면 너겁이 되고 만다

숨었던 실뱀 한 마리 심란하게 지나가고

 

흔들리는 그 바닥도 우주임을 알았을까

수렁에 빠진 무릎 수면위로 기어올라

한켠에 노랑어리연 발 씻으며 웃는다

 

 

 

밀물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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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우리 문학 속으로 의령 정신을 스며들게 하려는 의령 고을의 정성

 

時調 383現代詩 2,393편이 응모되었다. 기성(旣成)-신인(新人)을 망라한 이번 응모를 보아 여전히 우리는 詩歌를 좋아하는 백성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宜寧郡은 작은 지자체이다. 그러나 宜寧이란 고을은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미래를 열어가게 하는 정신을 심어주는 선각자(先覺者)들의 고향이다. 엄청나게 응모한 時調-現代詩들이 이러한 宜寧을 향한 흠모(欽慕)의 정을 담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물론 宜寧 고을이 베풀어준 후의(厚誼) 때문이란 생각도 든다.

 

천강문학상이 모양새만 갖추자는 치례가 아니라 우리문학 속으로 의령정신을 스며들게 하려는 宜寧고을의 정성(精誠)이 파격적인 상금의 규모를 보더라도 잘 드러난다. 이 또한 宜寧이 나라사랑의 보금자리라는 고을의 자긍심에서 연유한다는 확신(確信)이 사무친다. 이러한 생각을 이번에 응모한 진지한 작품들이 보여주었다. 따라서 천강문학상은 지자체마다 다투어 여는 축제의 한 모서리가 아니란 사실을 증험(證驗)해주어 심사에 임하는 자세를 여미게 했다.

 

예심을 거친 모든 작품들이 다 잘 만들어져 꼼꼼한 심사를 요구했다. 作詩의 기교(技巧)는 모두 저마다 수준에 닿아 <기교의 꼼수>가 없이 풋풋하고 싱싱하게 <말하는(言之) 작품>을 택하는 쪽에 무게를 두고 심사해 갔다. 그 결과 유현주 씨의 시조 [감자를 묻다], 정일남 씨의 현대시 [구절리], 강명수 씨의 현대시 [배추벌레], 김승훈 씨의 현대시 [마블링], 김정아 씨의 현대시 [바람속의 잠], 이공 씨의 현대시 [성지순례], 백점례 씨의 시조 [물풀] 등등이 최종심에 올랐다.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 중에서 시조 [물풀]을 이의 없이 대상으로 정할 수 있었다. [물풀]은 시조 넷을 한편의 연작시조로 묶어 말의 울림을 잔잔하게 저미어간다. 그래서 [물풀]은 닫힌 마음속을 열어주는 호소력이 헷갈림 없이 눈길과 동행하고 있다. [물풀]에서는 어느 것 하나 외따로 있는 것은 없다. 서로 새삼스레 옹기종기 갈마들어 하나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물풀]이란 세상은 <모두 다 웃는다.>. [물풀]은 조용조용 갈마들게 하여 시조의 참맛을 술술 풀어내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어 고맙다.

 

[성지순례]는 뇌관에 불을 붙이기 직전 같다는 아슬아슬한 순간포착을 디카로 찰칵찰칵 한 쪽 씩 찍고 넘어가듯이 말해가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 시인은 늘 손해 보는 편이 아닐까 싶다. 딱 부러지는 말이지만 어쩐지 불안하게 하는 층계 같을 때가 있음을 알아챈다면 [성지순례]의 전반부 가파른 시상(詩象)들로 넘쳐나게 열병(閱兵)하지 않았을 터인데 싶어 아쉽다.

 

그러나 [성지순례]詩象詩象을 치열하게 접근시켜 마음가기()를 상큼하게 하는 선뜻함이 강렬하다. [성지순례]는 틀에 박힌 삶을 한번 짚고 넘어가게 하는 현대시의 장기를 보여주고 있는 창창한 이다. 대상과 견줄 수 있는 로 손색이 없다는데 이의가 없었다.

 

기성시인을 뿌리칠 신인이 등장하기를 바랐지만 그런 이변(異變)은 없었다. 물론 신인 작품들이 예선을 통과한 것만도 대견하고 대단하다. 아무래도 신인들은 티를 내게 마련인 모양이다. 작품 속에 빠지면 안 되는 줄을 잘 몰라서 제 작품 속에서 익사해버리는 신인들이 참 많았다. 이런 형편은 다른 데서도 심사할 때마다 매번 겪는 아쉬움이다.

 

신인은 늠름하게 흐르는 말하기(言之)의 강을 강변에 서서 유유히 구경할 줄 아는 뒷심이 왜 필요한지 작시(作詩)할 때마다 연습하기를 바란다. 그럴수록 시인이 되는 길이 넓게 열리게 됨을 알아챘으면 한다. 그렇지만 기성시인들의 틈바구니를 무릅쓰고 작품들을 응모한 시인들의 작품들은 대담했고 풋풋했다. 이분들은 분명 다음 기회엔 작품으로써 한소리 하리란 예감이 들어 의령(宜寧)고을 천강문학상(天降文學賞)은 갈수록 창창하리란 믿음이 앞섰다.

 

- 심사위원 尹在根(한양대 명예교수), 이광석(시인), 김복근(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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