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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 토요일 밤의 세마포 / 정한아

 

여기 구겨진 울음이 찍혀 있으니
자기 멱살을 잡고 자기를 물 밖으로 끌어내는 사람처럼
끝내 그는 자기 밖으로 새어나갈 수 있을까

아직도 그는 고백이 부끄럽고
고백이 부끄럽다는 이 고백이 누가 될까봐
빨간 얼굴 속에 눈 코 입을 묻어놓고
그는 또 묻는다
물음을 벗어나는 일의 가능성과 의미에 관하여
그의 질문과 상관없이 그의 무덤 안에 떠도는 저 먼지 하나하나까지도
남김없이 등록되는 오늘의 치밀함에 관하여

지금은 작성되고 싶지 않아
실현된 계시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아
답을 바라서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이 빨간 망설임 때문에

비로소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소란한
귀먹을 듯한 적요 속에서

끝내 그는 그를 자기 질문에 답으로 내어놓을 수 있을까
그의 얼굴이 그의 입에 먹히기 전에
고백하자면
고백이 그를 그 아닌 것으로 붙박아 놓을까봐
통성(通聲)으로 증언으로 누가 될까봐

먼지는 사람이 되고 사람은 다시 흙이 되지만
아무도 그 전 과정을 지켜볼 수 없으니
그래서 불러보는
과학자, 시인, 하느님
존경해마지않는
나이가 무지하게 많으신 분들이여

될 수 있으면 그의
수치와 졸렬은 무시하시고
그의 빨간 얼굴에서
그의 골격과 날마다 쇄신하는 죄악의 대략과
그의 영혼의 방사성 동위원소와 탁도(濁度)와
찌그러진 눈 코 입의 윤곽을 어서 발본해내소서

거기 누가 구긴 울음이 음화(陰畵)로 찍혀 있다
자기를 용의선상에서 제외하지 않으려고
그는 밤새 자기 지문을 외고 있으나

아무래도 낯선 소용돌이여!
이 정황의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자기도 모르게 신비는 어떻게 유출되는가
이제 곧 성사(聖事)가 시작된다

 

 

 

 

 

울프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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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구상 선생 詩에 담긴 ‘비극 아는 자의 명랑’ 기억할 것”

 

크리스마스이브에 수상 소식을 들었습니다. 크리스마스라고 특별할 건 없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을 처리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수상 소감을 쓰는 이 시각에도 그것이 끝나지를 않았지요. 성적 처리 마감 전날인 오늘, 성탄절 아침에 “오늘 안에 보고서를 내지 못하면 한 학기 수업이 도루묵이 된다”는 협박 문자를 적지 않은 학생들에게 보내야만 했습니다.

저도 그런 연락을 받은 일이 있었거든요. 쓴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압도되어서 시작도 못 하고 긴장성 두통으로 목이 뻣뻣해진 상태로 불가피하게 포기하게 되기를 기다리다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전화를 받은 적이 말입니다. 마음은 동물인데 몸이 식물적으로다가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저는, 실은 그런 일이 아주 많았습니다.

어제 받은 수상 소식이 어째서 가장 두려운 그런 마감 독촉과 비슷하게 여겨진 것일까요. 저는 상을 받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돌아보면 그런 독촉 전화들은 결국 아주 다행스럽고 고마웠지요. 당근을 받았는데 채찍을 맞은 듯 구는 것은 겸허하지 못한 일입니다.

심사위원 여러분과 제 부끄러운 시를 읽어주신 모든 독자 여러분, 쓰러진 당나귀를 때려준 모든 채찍들에 감사합니다. 시 따위와 담 쌓고 살지만 마음에 시의 씨앗을 품고 있는 훨씬 많은 분들께도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구상 선생님의 영원에 대한 희구와, 지상에 대한 연민과, 무엇보다 그분이 시에 구구절절 남겨놓으신, 비극을 아는 자의 명랑을 잊지 않겠습니다.

 

 

 

 

어른스런 입맞춤

 

nefing.com

 

 

 

[심사평] “자본주의의 문제 제기…현실과 진실의 極點 향해 폭주”

 

올해 2회를 맞이하는 영남일보 구상문학상 본심은 2016년 12월부터 2018년 11월 사이에 출간된 7권의 시집을 대상으로 하였다. 등단 10년에서 20년 차에 이르는 중진 시인들의 시집은 현재 한국 시단의 흐름을 압축해 놓은 듯 다채로운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어 시 읽기의 즐거움을 흠뻑 느낄 수 있게 했다.

이 즐거움은 심의 과정에서는 곤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수상작으로 부족함이 없는 탁월한 시집들이 많아 선택의 괴로움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한아의 두 번째 시집 ‘울프 노트’를 구상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기에는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것에 대한 탐구 혹은 탐닉, 감각과 감정에 대한 과도한 집중, 내적 필연성이 부족한 시적 기획 등 최근 시단의 우려스러운 현상에 대한 반발이 일부 작용하기도 했다.

정한아의 ‘울프 노트’는 사회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의 묵직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제기하면서도 새로운 시적 장치와 발화 형식을 가동하고 있다. 텍스트들의 풍부한 상호성이 새로운 목소리와 스타일을 만들어 내고 있고, 놀이와 사유가 어우러져 있으며, 그 저변에는 한국사회의 추악한 ‘죄’들을 해부하는 예리한 메스가 감추어져 있다.

특히 ‘울프씨’ 연작은 독특한 캐릭터와 극적 양식을 채택해 단순한 실험성을 넘어 시적이며 정치적인, 더불어 시적이어서 정치적인 시의 탁월한 예를 성취하고 있다.

이 시집은 폭발하는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다는 듯 현실과 진실의 극점(極點)들을 향해 폭주하면서도 아주 서정적인 일도 동시에 하고 있다. 김수영의 요소가 섞여들어 있는가 하면, 누구의 독자도 제자도 공조자도 아닌 ‘시인 정한아’의 단독 시적 투쟁이 철저히 관철되면서 독보적인 시세계가 구축되고 있다.

부서지고 썩은 현실의 지옥에서 정한아가 빚어내는 시들이 “녹슬지 않고 구부러지지 않는 강철”(‘대장장이의 아내’)의 시로 계속 연단되기를 빌며, 정한아 시인에게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장석남, 나희덕, 김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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