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이가 있던 자리 /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장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튀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당선소감] 가끔은 화려한 문신으로 누군가에 각인되고 싶다
가만히 손 끝마디를 들여다보면 무엇이 우리의 가슴을 친다. 둥글게 소리가 사무친다. 산과 산이 물결쳐 나가다 다시 안으로 고요히 잦아들고, 거기 도달해야 할 우리의 꿈으로 남는 등고선. 두려운 일은 피가 비치도록 살갗이 닳아 벗겨져 민둥산처럼 아예 울음을 잃는 것이다. 온몸을 낭랑하게 울려야 우리는 허름한 것에서도 낯익은 손자국으로 만나 서로의 가슴 속에서 조용히 메아리로 무늬지는 것이다. 살며 외로워 흔들릴 때, 누구나 다 누군가에 가 닿아 잔잔한 무늬로 남고 싶어진다. 가끔 나도 화려한 문신(紋身)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각인(刻印)되고 싶다. 사실, 잊혀지는 것만큼 서글픈 것도 없지만, 초연히 무심이고 보면, 소멸하는 그 자리는 명징(明澄)하다.
나른한
아침 봄볕
두울둘 감긴 것이
순간,확 풀리며 지붕 위로 튀오르고
휑하니
사라진 자리
허허로운 빈 하늘
<고양이, 욕망이라 불리우는>
나이 마흔이 넘어 문득 옹이가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세상을 다시 보았을 때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 한곳이 환해 보였다. 옹이가 있던 자리는 무욕의 맑은 눈이었다. 소원이 뭐냐고 누가 내게 물으면 무어라 답해야 할지 간혹 막막하지만 여러 바람들 중에 분명 끝까지 변치 않을 단 하나의 바람은 내 생애의 마지막 날 내 사랑하는 이들과 내 사랑하는 것들과 마지막 대면하는 내 눈빛이 말고 깨끗한 하늘빛이었으면 하는 그것이다. 내 아는 이들과 미천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의 고마움을 언제나 맑은 눈에 담고 싶다.
[심사평] 감추지 않는 패기 돋보여
높고 고른 수준의 시들을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러나 규격적인 훈련을 받은 비슷비슷한 시들을 읽는 일은 동시에 다소간 괴롭다. 대체로 즐거우면서도 이따금씩 괴로운 작업 끝에 우리는 이윤훈 씨의 <옹이가 있던 자리>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작품은 시적 완성도가 우수하지만, 그가 당선자가 된 까닭은 역설적으로 <돈황으로 가는 길>, <아씨시 성 프란시스코와 마주하여>,<주인님 전 상서> 등 비교적 완성도가 떨어진 작품들 덕택이다. 거기서 그는 엉뚱한 상상력과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 스타일을 감추지 않는 패기를 내보였기 때문이다. 아직은 연약한 모습이 남아 있는 패기이지만, 더욱 힘을 길러 세상을 보는 시인만의 시각을 키워가기 바란다.
이민, 김미영, 최찬상, 문신 씨 등도 상당한 경지에 근접해 있는데 문제는 자신만의 목소리이며 자기의 언어 발견이다. 가정 속의 일상성, 시어의 상투성, 운율이 결핍된 산문시 애호 현상 등등은 이를 위해 싸워야 할 대상들로서 시인을 동경하는 분들이 깊이 음미해도 좋을 것이다.
- 심사위원 황동규, 김주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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