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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수목원 / 오형석


 

뿌리의 생각들이 하늘을 이고 있다
이곳에선 오래된 바람이 나무를 키운다
누구나 마음 한구석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씩 갖고 있듯
나무는 잎사귀들을 떨어뜨려 그늘을 부풀게 한다
볕이 떠나기 전에 오래된 바람은 칭얼거리는 나무를 타이르고
흙이 부지런히 물질을 서두르는 동안 뿌리가 생각을 틔우는지
다람쥐들이 가지를 오른다, 햇볕의 경계에서 숨은 그림을 찾듯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이 흘리는 소리를 줍는다
나무의 숨결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바람은 손끝이 저리도록 열매를 주무른다
그때마다 잎사귀들 웃음소리가
숲이 안고 있는 침묵의 당간지주를 흔들었다
나무가 발끝을 세워 마른 솔방울을 떨어뜨리는 사이
지나온 시절 앙다물고 뭉쳐있는 마음의 응어리를 가늠해본다
여물지 못한 생각을 방생해야겠구나
숲에 와서 가슴 한켠에 나무 하나 심는다
열매가 익고 있는 소리들이 새들의 귀를 씻는 시간,
해가 지면 수목원은 고여있던 생각들을 태워
하늘로 오르는 길로 벌건 잉걸을 뿜어 올린다

 

 

 

 

[당선소감]

 

지난 해 여름 끝물, 직장을 옮기기 위해 사표를 던지고서 홀가분하게 제주도를 찾았다. 새로 입사하게 될 곳에 양해를 얻어 2개월 가까이 주어진 휴식은 오랜만에 맛보는 그야말로 꿈같은 시간이었다.

우연히 개인이 운영한다는 야외 박물관에 들르게 됐다. 내륙의 빽빽한 사람들 숲에서 비틀거리며 살아온 나로서는 그렇게 오래 된 나무와 흙들이 방문객을 맞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비로웠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무의 삶이 다 보였다. 바람 많은 이 섬에서 적응하기 위해 어떤 나무는 배를 구부리고 있었고 또 어떤 나무는 아예 곁가지들을 스스로 꺾고 있었다. 내 가족의 모습 같았고 거기 어디쯤 내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묵묵히 숲을 감싸고 돌던 바람의 깊은 마음 씀씀이는 헤아려볼 수도 없다. 다만 그 평온함과 평온함을 너머 그윽한 시간으로 사람을 쓸쓸하게 몰아가던 숲의 냄새는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숲과 잠시 나눈 대화를 제주에 남기고 싶었다.

삶이 다가서는 모습 그대로를 시로 옮길 것이다. 그 발자국이 아름다운 것으로 추억되든, 때로는 감당 못할 괴로움이 되든 모두 내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지면을 허락해 준 한라일보사와 심사위원님들에게 감사드린다. 평생 스승 한 분 모시기 어려운 시절에 격려 아끼지 않으셨던 신대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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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많은 작품들을 읽었다. 문학의 위기 또는 죽음이라는 풍문이 끊임없이 떠도는 세태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아직도 밤을 지새며 자신의 영혼을 백지장에 새겨놓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순수하지 못한 욕망에 의하여 요행을 바라 영혼을 회칠하고 있는 이들도 더러 있지나 않은지 가슴 한 켠이 무거운 심정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정성을 기울인 작품들 못지않게 요령부득이한 작품들과 난삽한 넋두리에 지나지 않는 작품들 또한 많았다는 얘기다.

고금순 김양희 신유야 윤정 오형석 등 제씨의 시편들이 나름대로 주목을 끌었다.


그것들은 각기 안정된 시적 짜임과 탄탄한 전개, 소재 처리의 깔끔함 등을 보여주고 있어 제씨들의 오랜 시작과정을 증거해주고 있었다. 제씨의 시편들은 그러나 동시에 이미지 직조가 불철저한 부분이 있거나 또는 주제의 심도가 약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투명한 표현들의 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혐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김양희의 ‘꿈꾸는 자벌레’와 오형석의 ‘오래된 수목원’이 끝까지 남았다. 두 작품 모두 시적구조가 탄탄하고 이미지의 전개가 자연스러우며 주제의식 또한 뚜렷하여 다른 응모자의 시편들에 비해 얼마간 돋보였다.


그러나 심사란 배제의 원리에 있는 것, 오랜 고민 끝에 김양희의 경우 결말이 너무 확실하고 소박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 오형석의 ‘오래된 수목원’을 당선작으로 밀기로 했다.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김승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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