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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믈리에* / 강혜원

 

 

모든 라벨은 사심이 없지

한결같이 청렴하다네

나 또한 사심 따윈 없으나 무료한 나의 혀는 미지의 회오리를 원하네

 

이를테면 미 개봉 중고를 견디며

숙성과 산화와 변질의 경계에서

스스로를 누설하지 않은 갸륵한 맛

누대에 걸쳐 고단한 오크통을 미워하면서, 미워하지 않으면서

절치와 부심을 곱씹은 병속의 태풍

태풍 속 부릅뜬 외눈 같은 맛

 

제품명- 언젠가는

생산년도 - 잊힌 지 오래

원산지- 산비알 자드락 젖은 눈시울 밭

맛- 대대로 농축된 옹이 깊은 맛

특징- 어딘가에 스밀 수만 있다면 드라이하게 굴욕을 견딜 수 있음

 

맨 아랫간 먼지 쌓인 와인 병의 바디를 껴안듯 닦아 주었네

이윽고 마개가 열리고

아 적빈의 이토록 깊은 빛깔에 사로잡힌 사이

시큼을 벗고, 놓쳐버린 새콤과 상큼을 획복하려는 눈물겨운 심호흡 

 

나는 가장 전문가다운 표정으로

펑펑 축포를 쏘듯 두서없이 웃는 17번 테이블의 브이아이피

오래 묵은 귀빈에게

함부로 묵혀진 이의 비밀을 청아하게 따르려하네 

 

세상의 모든 단맛으로부터 격리된

빈 달빛 비탈진 귀가길

자꾸만 들러붙는 허기의 잔가지를 쳐내며

수도 없이 외치고 삼켰을 형언할 수 없는 이 맛을 

 

* 소믈리에 : 손님이 주문한 요리와 어울리는 와인을 추천해주는 와인 감별사

 

 

 

 

[당선소감] 큰딸의 발걸음 응원해주세요

 

큰딸 구두 680원, 콩나물 50원, 두부 30원……, 30년을 살아낸 늙은 한옥을 떠나오면서 어머니는 책장 서랍 속 몇 권의 가계부와 일기장, 빛바랜 편지 뭉치를 불 속에 던져 넣었다. 당신 속에 일렁이던 뜻 모를 불꽃을 십 원 한 끝 틀림없는 셈법과 쓸쓸한 몇 줄의 일기로 다독였을 어머니.

사라져 버린 그 뭉치 속에는, 성긴 눈송이 같은 밥을 먹고 도무지 펴질 것 같지 않던 가계도를 주머니에 구기고 다니던 청년의 아버지가 삼동의 골목에서 최초이자 최후로 말한 사랑의 고백도 함께 있었다.

귀한 말씀처럼 간직하며 이따금 꺼내 보고 싶었던 그것들을 조용히 태우시던 어머니의 남모를 회한이 오래도록 마음을 에었다. 그러나 그 불길은 꺼지지 않고 그날 이후로 뜨겁게 울고 있다. 때로는 그을음을 피워 올렸고 때로는 꺼질 듯 위태로웠지만 ‘시’의 얼굴로 나를 찾아와 넘실거린다.

겨울은 여전히 깊고 소용돌이를 품고 있는 강물 위로 튼튼한 다리를 놓을 재간이 내게는 없다. 이렇게 더듬거리며, 왜 그렇게 멀고 야속하냐고 악을 쓰며 걸을 것이다. 길이 아득해지는 날엔 모닥불을 피워 놓고 어머니가 내 핏줄 속에 흘려보내주신 눈물 어린 화법으로 곱은 손마디를 녹여 세상에다 대고 오래도록 연애편지를 쓸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건강하세요. 서툴겠지만 행복할 큰딸의 발걸음을 오래도록 지켜봐 주세요. 떨고 있는 어깨를 두드려 일으켜주신 심사위원님과 광주일보사에 감사드린다. ‘푸른 시의 방’ 강인한 선생님, ‘시인회의’와 강정숙 선생님, 정윤천 선생님, 고성만, 조성국, 김행란 선생님, 김재준 선배, ‘터앝문학동인회’와 매서운 나의 독자 은주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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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소믈리에의 삶, 와인의 삶 포개는 솜씨 기발

 

본심에 열여덟 명의 시가 올라왔다. 10대에서 60대까지 각 연령층 사람들이 대도시에서 지방도시에서 시골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자기의 방에서, 시에 골똘했을 모습을 떠올리니 뭉클했다. 본심에 오른 만큼 언뜻 보기에 다 근사했다. 그 중, 시상(詩想)은 기발하지만 아직 밑그림 단계인 시, 상투적인 표현으로 이루어진 시, 말을 대폭 줄여야 할 중언부언 시들을 추려냈다.

이효정, 오정순, 권명호, 강혜원 이 네 명의 시편들이 남았다.

이효정의 ‘손잡이의 시간’은 신선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은하수를 횡단하는 한 무리의 맘모스를 만나면’이나 ‘그리고 오래된 인류의 분실물을/하나 둘 태우고 싶어’ 같은 맥락에 있어서 뜬금없고 표현에 있어서 상투적인 구절이 걸렸다. ‘고서(古書)’는 완성도가 높았다. 판타지가 겉돌지 않고 현실에 고즈넉이 배어들어 있다. 판타지가 주조인 시는 체험이 받쳐줄 때 설득력이 생긴다.

오정순의 시편들은 풍경으로 정서를 풀어내는 솜씨가 일품이다. 매끄럽게 잘 읽힌다. 그런데 좀 늘어진다. 말을 압축하면 탄력이 붙을 것이다. 권명호의 ‘남일상회’는 시골서민의 풍취가 잔잔하고도 유머러스하게 그려진 서정시다. 당선작과 끝까지 겨눠보다가 아쉽지만 놓았다.

강혜원의 ‘어떤 소믈리에’는 소재도 독특하고 표현도 기발하다. 화자인 소믈리에의 삶과 와인의 삶을 포개는 솜씨가 여간 아니다. 기쁜 마음으로 당선작으로 올린다.

심사위원 이성부,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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