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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악기의 고백 / 김효선

 

 

첫눈이 온다고 했을 때 눈을 감았다

비가 내린다고 했을 때 귀를 닫았다

오후 다섯 시부터

태양은 매일 자신이 죽는 곳으로 인간들을 인도한다*

이 세상에 우연히 없다고 생각해?

 

줄을 튕기면 바다거북의 심장소리와

암소가 내지르는 비명과

산양의 창자에서 쏟아지는 핏물

12월이면 나는 사라진다 수수께끼처럼 휘파람을 불며

나는 공기의 모든 것

 

늦게 오는 눈물이 있다

기다림 끝에 더 긴 기다림이 있을 거라는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다시는 그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달은 사라진다

살점이 아직 무릎 뼈에 붙어 있다

 

죽는 것도 죽지 않는 것도 아닌

잊지도 못하고 놓지도 못하는

이 세상에 영원히 없다고 생각해?

이별할 때 버드나무를 꺾어주었다는

옛사람의 눈빛으로 소금을 켠다

내지르는 비명은 달콤하다

 

17년 땅속에서 버틴 대가는

고작 두 시간동안 치른 정사

네 목소리를 들은 건 일주일이다

물론 옷을 벗고 있었다는 건

너만 아는 비밀

 

* 파스칼 키냐르

 

 

 

 

 

어느 악기의 고백

 

nefing.com

 

 

 

[수상소감] 에 뜬 섬에서

 

왜 하필 일까 생각했습니다. ㅅ과 ㅓ, 그리고 ㅁ이 만나는 이라는 이름이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저는 섬에서 태어나 섬에 살았지만 한 번도 을 궁금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바다 위에 떠 있어 지리학적으로 이라고 했거니 했습니다. 하늘에서 제주도를 내려다보면 이라는 글자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얼키설키 사람들 집이 모여 있고 바다는 마을을 빙 둘러 감싸고 있습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셈이지만 한 번도 바다 위에 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지요. 용암이 솟아올라 뜨거움과 차가움으로 반복했을 시간. 우린 여전히 과거의 시간을 살면서도 미래만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을 자꾸 반복해서 말하다보면 묘한 울림이 옵니다. 짧게든 길게든 한 글자 은 가다가 멈춘 기분이 듭니다. 거기 섦?().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서 있는 섬처럼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처럼요. 그냥 우스갯소리입니다. 흔히 섬은 문학 혹은 문화적으로 소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학에서 고독은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몰입의 가장 큰 핵심은 고독, 절대고독입니다. 그 몰입에서 상상력, 창조의 샘물이 솟아나고 시가 탄생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섬은 고독하기 딱 좋은 환경입니다. 누군가 엎어지면 바닷물이 턱 밑에서 출렁거린다고 할 정도로 제주는 바다와 가깝습니다. 바다는 또 얼마나 고독한 지요. 끝이 없는 심연과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고 있자면 순간순간의 기억과 삶이 물밀 듯이 달려옵니다. 파도와 바다가 한 몸인 것처럼 인간의 육체와 정신도 그 안에 녹아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는 섬에서 시를 씁니다. 어디엔들 상처가 없겠습니까마는 시는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힘이 있습니다. 상대고독을 절대고독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는 가다가 서게 하는 ’, 그 섬에서 꾸는 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와경계 문학상은 어쩌면 이 제게 주는 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고독해지고 조금 더 명랑하게 시를 쓰겠습니다. 섬에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날입니다. 곧 남풍이 불고 바닷물은 잠방거리기 좋은 계절입니다. 바다를 남쪽을 조금 나눠 가진 날이었으면 합니다.

 

 

 

 

[심사평]

 

어디까지나 시인은 작품으로 말하는 존재여야 한다. 또한 좋은 작품을 쓰는 시인에게는 문단의 여러 사항에 묶이지 않고 독자와 만날 기회가 많이 주어져야 한다. 부언하자면 시인은 좋은 시를 써야할 의무가 있고 잡지는 좋은 시인을 찾아야 할 의무가 있다. “창작에 있어서는 엄격한 경계를, 좋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는 경계 없는 잡지를이라는 시와경계의 슬로건 같은 것이어야 한다.

 

이번 제2회 시와경계 문학상 선정은 이 두 가지에 초점을 두었다. 1, 2, 3차 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만나게 된 작품은 성윤석 시인의 흰개와 이태관 시인의 연리지, 김효선 시인의 어느 악기의 고백그리고 임재정 시인의 기차는 미루나무 이파리를 지나네와 기혁 시인의 오란비였다.

 

이 다섯 분의 작품 중 어느 한 분을 시와경계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시적 연륜으로 보나 그간 위 시인들이 펼쳐온 시세계로 보아도 이미 알려질 만큼 탄탄한 자기 세계를 구축한 시인들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최종심에서 만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제2회 시와경계 문학상 수상자로 김효선 시인을 선정한 데는 심사위원의 추천 수와 함께 시와경계의 창간 정신에 부합한다는 점을 들었다.

 

김효선 시인은 2004년 등단 이후 첫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이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도서에 선정되었는가 하면 2018년 제2회 서귀포문학작품상을 수상함은 물론 아르코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그만큼 좋은 작품을 창작해 오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이번 수상작 어느 악기의 고백"존재가 빛나는 순간을 고통 속에서 포착하여 다른 존재로 거듭 승화시키는 안목이 탁월"했다. 풀어 말하자면 너라고 지칭하는 매미의 한 생이 고통스런 의 생으로 치환되어 재생된다. 비유적 주제는 사랑의 탐구가 되겠다. 17년이란 어둠 속 기다림 끝에 오는 삶이란 게 고작 사랑의 절정 2시간과 절박한 울음의 2주간이 다인 매미의 한 생을 통한 사랑의 탐구라 할 수 있겠다.

 

매미의 생이란 게 어쩌면 2, 2시간이란 절정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거나 거꾸로 그 절정의 삶 뒤 늦게 알게 되는 긴 기다림의 카오스 상태를 자연스럽게 연속되는 하나의 어떤 차원으로 이끌고 가는 솜씨를 내보인 것이다.

 

지난 2018년 가을호 김효선의 소시집 비평을 썼던 고성만 시인도 김효선의 시는 내면적 요소가 많다. 언어와 언어를 연결하는 고리가 여리고 섬세하다. 고전과 현대가 아울리고, 외국과 우리나라가 연결되고 뭔가 툭툭 끊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간결한 무늬로 얽혀있다. 결이 고운 시다.”라고 평했다.

 

앞으로도 등단 지면, 지역성 등에 얽매이지 않고 좋은 시 창작을 위해 정진하기를 시와경계도 적극 응원한다.

 

심사위원 이성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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