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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월의 진눈깨비 / 양인숙

 


그 날, 아버지가 세워놓은 지게가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돌담 밖으로 무너져 내리던 오십년지기 박토의 일생이 희망과 절망이 반쯤 절은 진눈깨비로 흩뿌려졌다. 모두들 떠나버린 시골마을 어귀에 순박한 하늘 한복판을 들여놓으며 넘어진 아버지의 빈 지게 위로 소나기도 함박눈도 되지 못한 회색 구름이 총총 걸린다. 당뇨병으로 수척해진 아버지의 말년, 날마다 야위어가던 퀭한 얼굴에 십일월의 시린 날들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보라빛 상념이 달개비 꽃으로 피어나고 가끔씩 뱉어놓은 무서리에 놀라 고개를 떨군다. 무릎 저린 십일월의 진눈깨비 가슴마다 설움 깊어도 당뇨병 치료에 특효약인 달개비꽃 탕관에 달여지면 돌밭 사이로 하얀 씨앗들이 한숨을 묻고 있다. 중국산 수입 약초 향기에 밀려서 제 값 받지 못한 채 등 굽어 마르던 아버지의 잔기침소리. 희망과 절망의 반쯤 절은 십일월의 진눈깨비가 아버지 허리춤에서 겨울의 마지막 기운을 모아 힘찬 기지개를 켠다.

 

 

 

[당선소감] 詩가 동전 한닢의 사랑 됐으면

태풍 매미가 지나간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모양이다. 올해는 유난히 이웃을 향한 온정의 손길도 더디고 어느 복지기관에서는 모금이 부족하여 난방을 생략한 채 추위를 견뎌내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무겁다. 내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 복도에 걸린 낡은 포스터와 마주칠 때마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아이들의 검은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 포스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져 있었다. “아주 특별한 동전 한 닢의 사랑” 유니세프의 기금 모집을 위한 아이들의 사진 앞에서 늘 부끄러워진다. 적어도 내가 쓰는 시가 특별한 동전 한 닢의 사랑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당선이라는 전화 소식에 기쁨은 잠시였고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시를 좋아한다고 떠벌리고 다녔었던 철부지 시절은 다 지나고 늦깎이에 시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려면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기에. 뼈를 깎는 매서운 추위를 견뎌낸 후 매향이 향기롭다는 옛 선인의 말이 나를 견책한다. 아름다운 시의 정점을 향한 환유의 계단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기만 한데 가야할 아득한 정신의 모험은 나를 매혹시킨다.

 

이제 서툰 발걸음을 시작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신 한라일보사와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며 그 동안 결점과 나태를 극복할 수 있도록 준엄한 가르침을 주신 김승립 시인께도 당선의 영광을 돌리고 싶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게 용기를 준 친구 미정이와 도원이 그리고 묵묵히 습작의 시를 읽어준 남편과 아이들에게도 이 기쁨을 같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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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허세부리지 않은 따뜻한 일상

해마다 그렇지만 올해에도 자갈밭에서 옥(玉)을 고르는 수고를 면할 수 없었다. 어려운 일은, 자갈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골라낸 옥 가운데서 최상품의 돌을 고르는 것이었다. 부지런히 추리고 남은 것이 7편- 그 중에서 다시 3편을 골라, 두 사람이 돌려읽기를 수 차례 한 끝에 마침내 양인숙씨의 「십일월의 진눈깨비」를 당선작으로 낙점할 수 있었다. ‘버린 작품’ 중에는, 당선작을 내고 나서도 몇 번이고 다시 만지작거려야 했던 수작들이 있었다. ‘택시일지’라는 부제를 단 연작 중의 「나의 위치와 속도는 감지되고 있다」도 그런 작품이었다. 서울에서 응모한 작품인데, 입담이 좋고 도시 속에 산다는 것의 실존적 의미를 묻는 주제도 육중하다. 그러나, 방만해지려는 언어를 효과적으로 수습하지 못한 흠이 걸려 읽기가 편치 않았다. 이와 정반대의 예로는, 경주에서 보내온 「저녁」이 있었다. 단 8행의 시였으나, 주옥이었다. 그러나 동봉한 다른 보석들은 불순물을 꽤 함유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대구에서 온 「보리밭」, 충북 음내리에서 온 「나무」, 서울에서 온 「침묵의 말로 꽃을 피우다」, 경남 진주에서 온 「上無住, 溪澗」도 독자 제위께 한 번 보이고 싶은 작품들이었다. 당선작 「십일월의 진눈깨비」는 대단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대단치 않은 이야기를 대단치 않게 이야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이 시에서 내리는 진눈깨비는 따스한 체온을 가졌다. 대단한 이야기를 하려고 허세를 부렸다면, 지금처럼 ‘가슴 찡 해지는’ 시가 못됐을 것이다.


심사위원: 한기팔(시인), 송상일(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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