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파업 / 오영숙
집이 난파되자 나는 가슴에 얼음 하나 깨고 있었다
햇볕에 풀어져버린 기와집은 아버지를 밀어내고
활자가 부서진 우편함에는 주인 잃은 일련번호들이 빗물에 잠겨 얼룩을 물어 뜯고 있었다
등이 굽은 문짝 사이로 세간들이 퇴행성 관절염에 걸려 전신을 삐꺽거리며 엎어진다
여기 저기서 숨어있던 먼지들이 뛰쳐나와
아버지의 독한 체위에서 잠수한다
허기진 방안을 매운 온기가 가족사진에 곰팡이를 피워내고
내 어린 시절을 떠내려 보냈다
청마루 밑에 흩어진 헌 신발들이 맥박이 뛰고
빈 뜨락에는 녹이 슨 농기구들이 동강 나서 비명을 지른다
한 구석에는 잠을 털고 일어선 우물가에는 절구통이 무게를 잰다
나는 아버지의 흔적을 하나하나 버리고 있었다
춘궁기 / 오영숙
초가집 서까래는 전신을 삐걱대며 소리를 낸다
촘촘히 박힌 돌담, 한 모퉁이가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흙더미 속에서 일어난 붉은 장미 한그루가
햇살을 당기며 울타리를 만들었다 울타리는 안간힘으로
서서 얼굴을 가리고 봄 날을 만났다 풀섶을 헤친
틈 사이에서 못다핀 꽃 한송이가 빗장을 푼다
넓은 마당에는 낡은 의자가 부러져 움츠리고 앉자
슬픈 상처를 달래고 있었다 욕망의 살갖을 태운
얄팍한 브라우스가 창가에 서성이며 잃어벼렸던 암내를
찾고 있었다 암덩어리 끄집어 낸 돌담은 무게 무거워서
길 하나 열어놓고 불그레 취해있는 장미와 물레방아를 돌린다
속살드러낸 이데올로기 길 밖으로 질주한다
[당선소감]
《부모님 영전에 영광바쳐》밤마다 골짜기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여울은 다시 세찬 바람이 되어내 어린 날의 가슴에 그리움의 언덕 하나씩을 쌓아올렸다. 그렇게 내 시의 꿈은 열병처럼 달아올랐다. 때로는 벼루에 먹을 갈고 화선지에 문인화를 저미면서 시를 향한 담금질을 쉬지 않았다. 그리고 당선소식을 접하는 순간 내 작은 어깨 위에 큰바위덩이 올려졌다.
고달프지만 즐거운 이 길을 나는 소중하게 가꾸어 가리라 다짐한다. 잔잔한 파도가 거센 파도 앞에서도 역시 파도가 되는 것처럼 시는 나의 일상이며 생활이 될 것이다. 부딪혀도 깨어지지 않는 모래알로 남을 것이다.
자리를 마련해 주신 국제신문과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언어미학의 맛을 깨우쳐 주신 하현식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드립니다. 먼나라에 계신 부모님 영전에 모든 영광 바칩니다. 그리고 항상 자상한 남편과 내 착한 아들 승준이와 격려해 준 문우들과 더불어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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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선을 거쳐 선자들의 손에 넘어온 작품은 열 분의 것이었다. 시단의 흐름을 일정하게 따르고 있으되, 다 같이 시적 개성이 무엇이며 새로움이 무엇이며 현실이무엇인가를 알고 썼다고 할 수 있다.
왜 시가 새로워야 하고 개성적이어야 하는지를 재론할 필요는 없다. 새롭지 않으면 새로운 신인이 등장할 필요는 없다.
선자들은 위와 같은 시각에서 열 분의 작품을 꼼꼼히 읽고 검토하였다. 그런 과정을 두 시간쯤 거쳐 우리의 손에는 이영옥씨의 작품과 석미화씨의 작품, 오영숙씨의 작품들이 남았다.
이영옥씨의 작품들은 여섯편 모두 고통스런 삶이 가지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있다는 점이 남달랐으며, 석미화씨의 작품은 당선작으로 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강구에서」의 「전어들이 가을을 몰고 다닌다」거나 「비상등을 켠 안개는 소문처럼」이라는 구절은 시의 맛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이미지들을 투명하게그리고 끈질기게 밀어나가며, 매우 절제된 언어를 쓰고 있는 오영숙씨의 작품들이나타나자 밀려났다. 오영숙씨의 작품에서는 허점도 과욕도 찾기 힘들다. 균형을 취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응모작품 모두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있다.
선자들은 「아버지의 파업」 「춘궁기」 두 편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쉽게 합의하였다. 쉼없이 정진하여 좋은 시인이 되기를 선자들은 바란다.
심사위원 김규태, 최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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