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칸에 앉은 돌부처 / 심은희
생은 울렁거림이다;(누군가 말을 걸어오는지)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건
환멸이란 이름의 멀미다
그만 살았으면 싶은 노인들의 푸념 또는 수작처럼
부끄러움도 없이 늘어진 가로수들이나
심하게 처진 할머니 입꼬리에 걸린 담배처럼 언제라도 툭
떨어질 듯이 과자 봉지를 들고 질주하는 어린 아이를 볼 때면
그것은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기어이 아이의 과자는 축포처럼 공중분해되고
어디선가 날아든 비둘기들은 겁도 없는 상이군인처럼
버스 전용차선으로 뛰어든다 순간 나는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는 어머니의 노동을
떠올렸다 그리고 잠시 비틀거렸는지도 모르겠다
아! 이제 알겠다 콘크리트 벽에 일렬로 달라붙어
초호와 캐스팅을 자랑하는 나이트 클럽 벽보를
무슨 복권처럼 자랑하는 노인들을 볼 때면 왜
까닭 모를 화가 치미는지를
버스는 이내 저 홀로 풍성한 계절을 맞이한 청소차를
아슬아슬 비껴나간다 청소차에서 분명
낯익은 해골 하나가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차가 덜컥덜컥거리며 정류장에 멈출 때마다
짤랑거리며 들어서는 건 언젠가는 내 몸 가장
투명한 부분을 밀치고 들어설 낯선 불행들일 것이다 ; 갑자기 숨이 가빠온다
(아까부터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당선소감] 다시 ''나''를 검열하자...그리고 세상을 돌아보자
기뻤다기보다는 얼떨떨했다. 첫 응모라 큰 기대를 하지 않은 탓에 막상 당선 소식을 듣고는 덜컥 겁이 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시를 쓴다, 쓴다 하면서도 쉽게 세상에 디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준비는 항상 부족했고 시는 언제나 불만족스러웠다. 그걸 참고 고칠 수 있을 때까지 몇년씩 묵혀두기도 하면서 아주 가끔씩 그렇게 시를 써왔다. 돌이켜 보면 어리석게도 시를 썼던 시간보다 시가 도리질치다 달아날까 봐 안절부절 못하던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 시를 쓰려고 했던 적은 없었다. 다만 어렸을 적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시를 쓰겠노라고 우격다짐하던 기억은 있다. 지금 나는 시인이 되기 위한 출발선에 있긴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을 위해 내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지금까지도 나의 화두가 ''나''에게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한 편의 시를 쓰거나 고칠 때 뿌듯한 적인 많았지만 진정으로 행복한 적은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행복한 책읽기가 가능하듯이 행복한 글쓰기도 가능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시대에 시를 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 그럴 수록 철저한 자기 검열을 거쳐 나름의 시세계를 구축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다시금 시를 쓸 용기를 주신 두분 심사위원님과 항상 그리웠지만 제대로 인사 한번 드리지 못한 한신대 국문과-문창과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함께 고민을 나누었던 내 오랜 벗들과 문창 선-후배님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마지막으로 지금의 저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과 언니, 동생에게 진한 고마움과 사랑을 전하고 싶다. 시를 좋아하게 된 것도 영광인데, 시를 쓸 수도 있다는 것은 나에게 가장 큰 행운인 듯싶다.
[심사평] 작품마다 결정적 새로움 부족…당선작 ''젊음의 직핍'' 돋보여
예심자의 진지한 노고에도 불구하고 본심에 넘어온 작품들은 그다지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아직도 시의 말법을 익히지 못한 평균 이하의 시들이 섞여 있는가 하면 사적인 감정의 절제 없는 토로를 서정시로 착각한 작품들도 많았고, 지리한 자기 주장을 역시 반성 없는 지리한 산문 형식에 의탁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은 작품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먼저 ''공터는 만삭이었네''(전혁)는 노래의 유연성이 살아 있는 아름다운 시였다. 1연의 "공터는 어머니들/쉬었다 간/ 자리였네/ 젖먹이들 응석부림에/ 목이 늘어나/ 보유스름한 가슴/ 언덕 드러낸 메리야스"라거나 2연의 "풋풋한 공터의 아이들이/ 휘휘 휘파람 불며/ 어머니들 품으로 되돌아가고/ 만삭의 달이/ 뽀도독/ 힘찬 턱걸이를 시작하는 시간" 같은 구절은 이제는 사라져버렸지만 지난 한 시절의 가난의 탁발한 시적 형상화다. 단, 낡은 내용을 너무 낡은 형식에 수습하고 있어서 오늘의 젊은 시로서는 한계라는 점. 작품마다 뚜렷한 현대성을 성취한 백석의 경우를 고구(考究)해보기 바란다.
''마음의 위기''(김지연)와 ''기념품''(박선영)은 각기 단아한 서정시들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아직 떨어지지 않은 단풍잎은/ 시든 꽃잎을 위해" 내리는 비의 운행이 "계절과 계절 사이" 혹은 "벌어진 계절의 틈"을 벗어나지 못한 채 자족적 공간에 갇히고 마며, 후자는 전자에 비해 시상(詩想)의 전개도 활달하고 시적 대상을 장악하는 솜씨도 볼만하며 이제까지의 꽃과의 대화를 전복하여 ''나'' 스스로 씨앗인 기념품이 되기도 하지만 상상력의 이동에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즉 시에 기운이 생동하지 않는다.
''그 집 앞 능소화''(이현승)와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심은희)는 앞의 작품들에 비해 당선권에 훨씬 더 육박해 있으나 두 작품 공히 어떤 결정적인 새로움을 담보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크다. ''그 집 앞 능소화''는 이른바 ''마음''의 행방을 좇는 시여서 절제되어 있고 고즈넉하나 행간(行間)이 표현된 것 이상의 또 다른 의미를 내장하고 있지 않으며 언어와 언어 사이의 긴장 또한 없다. 긴장이 없으니 시적 울림이 없고 울림이 없으니 좋은 예술품이 거느리기 마련인 소란 뒤의 고요의 그늘이 없다. 모호한대로 생활의 실감에 가장 근접한 작품이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인 듯 싶다. "생은 울렁거림이다;(누군가 말을 걸어오는지)/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건/ 환멸이란 이름의 멀미다"로 시작되는 1연은 젊음 특유의 직핍하는 절규이며, 2-3연의 세부묘사는 죽음을 잊고 사는 오늘의 도시현실에 대한 통렬한 고발로도 읽힌다. 그리고 "낯익은 해골 하나가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는 파격을 선사하고 있는 4연은 이제까지의 모든 현실을 다시 공(空)으로 돌리는 불교적 각성에 이르게 함으로써 이 시가 세속의 삶을 명상의 눈으로 담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표현이 다소 모호하고(하기야 모호성도 현대시의 한 특장이다) 얼개가 좀 삐걱거리긴 해도 환멸과 도시적 삶의 권태까지를 포함하여 생활인의 구체적 실감에 기초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며, 이 작가의 앞날의 가능성에 선자들의 더 큰 기대를 걸기로 한다.
-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이시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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