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없는 방
이 독특한 공간에서 밤마다 나는
벽에 문을 그린다
손잡이를 당기면 벽이 열리고 밖은 아직 까만 평면
입구부터 길을 만들어 떠나는
한밤의 외출이다
밤에만 살아 움직이는 길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은
문을 닫고 잠들었다
나도 엄마 등에서 잠든 적이 많았다
엄마 냄새를 맡으며 업혀 걷던 시절엔
갈림길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
나의 발은 늘 여유로웠다
어둠에서 꿈틀대는 벽화는 불면증의 사생아
내가 그린 길 위에서 걸음은 몹시 흔들렸다
걸음을 디딜수록 길은 많아졌고
엄마 등에서 내려온 후로
모든 길에는 냄새가 있다는 걸 알았다
열린 벽, 문 앞에 멈춰 냄새를 맡는다
미리 그려둔 여름 길섶
펄럭 코끝에 일렁이는 어릴 적 낯익은 냄새
오늘은 그만 걷고 여기 가만히 누워
별을 그리다 잠들 수 있겠다
하늘에 업힌 밤
오랜만에 두 발이 여유롭다
[수상소감]
어릴 적 나는 성경책을 읽으시는 어머니 곁에 엎드려 집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읽었습니다. 생각으로 넘나들 수 있는 세상이 점점 커졌습니다. 그러다 크고 넓은 강 앞에서 멈추었습니다. 나는 강을 건너기 위해 커다란 돌을 짊어지고 돌다리를 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강을 건너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강물은 나의 행동과 상관없이 흘렀습니다. 돌다리에 주저앉아 한참동안 강물이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천강문학상’으로 다시 돌다리 하나를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만큼 더 깊이 강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시를 쓴다는 건 강을 건너는 게 아니라 강물에 나를 적시는 일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시 힘을 내어 강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가족들에게, 감사를 전할 모든 분들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어머니, 어제는 나이 드신 어머니의 떨리는 손을 오래 잡아드렸습니다. 어머니의 체온은 세월이 지나도 주름지지 않고 그대로였습니다. 그런 시를 쓰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 부끄럽게 쓰이지 않도록 늘 같은 마음으로 시를 쓰겠습니다.
[심사평]
시는 불꽃이요, 한 벌의 의상이다. 시는 비교적 단일한 것으로 이해되는 시상을 노래한다. 시는 시적 대상을 다른 대상에 견줌으로써 그 대상에 대한 해석의 폭을 확장한다. 유비(類比)가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시가 진술의 형태를 갖더라도 시는 주견을 강조하지 않는 장르이다. 시적 화자의 위치를 낮춤으로써 시적 대상을 추켜세우는 것이 시의 미덕이다. 비교적 단일한 것으로 이해되는 시상을 노래하는 것이기에 서사 구조를 회피하려는 성향을 갖게 되고, 또 시상 전개에 있어서는 구조화가 중요하게 된다.
제 4회 천강문학상 시 부문 공모에는 총 300명의 작품 2171편이 접수되었다. 뜨거운 열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작품의 질적 수준도 매우 높은 편이어서 심사 과정은 녹록하지 않았다. 빈틈이 없이 차분하고 조심스럽게 심사는 진행되었다. 물론 공모작품들을 살피면서 아쉬움도 있었다. 첫째는 가족과 관련한 시가 많았다. 대개는 가족 구성원과의 이별로 인한 비감, 그리고 지나간 과거에로의 아련한 회귀와 재생 같은 것이 주류적 심상을 이루었다. 둘째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일이나 마음의 형편을 노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 인해 산문화되는 경향이 다분히 많았다.
예심을 통과해서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은 스물아홉 분의 시편들이었다. 오랜 숙고 끝에 세 분의 응모작을 두고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김춘순, 임세한, 최은묵 세 분의 작품들이었다.
김춘순님의 시편들은 독특한 자기 발언력을 갖고 있었다. 시적 대상과 세계에 대한 독자적인 육성을 들려주었다. 시적인 사건들을 대개는 통증으로 이해하는 성향을 보여주었다. 가령 <화농의 봄>에서 만개한 ‘꽃’은 신생의 생명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화농’으로 인식된다. 그렇다고 삶의 비극성을 발언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김춘순님의 시는 상상력의 탄력성을 잘 보여주었지만 특별한 시적 진술을 발굴하려는 의욕이 너무 강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임세한님의 시편들은 농촌 서정에 기반을 두면서도 모성애적 보살핌을 주로 노래했다. 작물이 뿌리내린 공간은 어머니의 자궁과 태에 비유되곤 했다. 가족의 관계를 중심으로 해서 펼쳐지는 그의 시는 따뜻했다. <눈 오시는 날>이 현시하는 서정성은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다만 막연한 애상에 빠지는 경우가 있어 감정의 낭비를 조절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천강문학상 시 부문 대상의 영예는 최은묵님에게 돌아갔다. 최은묵님은 활달한 상상력과 트인 수사를 보여주었다. 작품들의 수준도 높낮이나 차이가 없이 한결같았다. 풍부한 창작 경험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했다. 대상작 <밤 외출>은 ‘업다’라는 행위를 변주한 작품이다. 어릴 적 엄마의 등에 업혔던 기억에서 이 시는 탄생한다. 그리고 그 업힌 기억은 평온과 자유로움의 그것으로 노래되고 있다. 이 시의 백미는 시의 후반부이다. 별을 바라보는 화자가 있다. 화자가 별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화자는 능동적인 위치에 있다. 그런데 이 시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화자가 되레 밤하늘에 업히는 입장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지상과 하늘이라는 두 공간, 그리고 주체와 객체라는 두 입장을 역전시켜 버린다. 이런 변전은 읽는 이에게 어떤 인식의 새로운 열림과 그로인한 쾌감을 경험하게 한다. 심사위원들은 최은묵님의 이러한 능력을 소중한 것으로 평가했다.
간발의 차이로 수상자가 되지 못한 분들이 많았다. 낙담하지 말고 계속 정진하길 바란다. 수상자들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앞길에 문운이 함께 하길 바란다.
- 심사위원 김후란, 시인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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