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표정 / 손진은
두어 달 전 명절 끝날 산책길
인적 뜸한 고향 신작로를 지나다 들었네
점잖지 못하게 왜 그랬어?
여동생을 오빠란 놈이 그렇게 하면 어째?
아침 공기를 잔잔히 물들이는 어떤 중년의 음성
그 오빠는 보이지 않고 하,
누렁이 한 마리가 고갤 숙여
그 말 고분고분 듣고 있는 곁엔
누운 암탉 한 마리
(아마 옛 버릇을 참지 못하고
유순하던 개가 닭을 물었던 모양)
머릿수건을 쓴
그의 아내인 듯한 환한 여인은 또
왜 암 말도 안 하고 아궁이에 장작불만 지피고 있었는지 몰라
가축 두어 마리, 가금 대여섯
키 낮은 채송화 분꽃, 해바라기와 사는 필부인
그 사내 부부의 울타리 너머
꿈결같이 들은 그날의 음성과
실수 때문에
가책 받은 얼굴로 고갤 숙이던
그 착한 개의 표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가 다 죄인인 듯 마음이 저려온다네
알아듣기나 했으려나, 그 말?
메아리 소리가 곱게 울리던 그날 아침
내가 진정 못 본 것은 또 무얼까?
[수상소감] 시, 내가 얼마나 모르는가를 일깨워주는
12월 9일 오전 아홉시 사십오 분, 기말고사 문제를 출제하다 울리는 전화벨 소릴 들었다. 마감을 못 맞춘 원고가 있었구나!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좋은 꿈 꾸셨나요?” 하는 저 편의 말씀과 함께 당선 소식이 건너왔다.
생각의 필라멘트를 당겨올리자 수십 년 전의 푸르던 문청 시절이 따라왔다. 내게서 떨어져 나온 수십 년의 서로 다른 얼굴이 나에게 묻는다. 그동안 무수한 낫질을 통해 길어올린 것이 퍼석한 몇 다발의 환하고 아픈 상처뿐이었냐고, 그 소출에도 잘 먹고 잘 잤냐고?
풍경 속을, 골목과 인파 속을, 내 속을 걷다보면 못나고 비루하고 작은 것들이 내 속마음을 알아보고 속내를 털어놓을 때, 그때마다 아린 내 손가락 끝에 피어난 몇 송이 시!
하는 일이 시를 가르치는 일이다보니, 동서양의 시편과 지혜들을, 젊은이들의 생각을 들여다볼 때가 많다. 그들의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시라는 것이 얼마나 다양한 몸짓과 육성을 하고 있는지, 영원히 따라갈 수는 없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어쩌면 내가 얼마나 모르는가를 알아가는 게 남은 시인의 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이 어쩌면 시를 제대로 대접하는 일이 아니랴?
내 삶의 존재이유인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부족한 시편들에 손을 들어준 심사위원님들께는 더 좋은 시편들로 인사드리고자 한다.
[심사평]
제3회 시와경계 문학상 심사 대상은 2018년 겨울 호부터 2019년 가을 호까지 발표한 ‘신작시’와 ‘특집시’ 그리고 ‘오늘의 주목할 시인’에 발표한 신작시 총 314편을 대상으로 하였다.
심사위원은 시인의 이름을 지운 시작품만을 이메일로 받았다. 블라인드 심사 방식이었다. 1차로 각 10편씩을 선정해 편집실에 보냈다. 편집실에서 총 40편의 시인을 찾아 복기해 본 결과 김명인, 고주희, 남길순, 심재휘, 박소란, 박윤배, 유희경, 이산하, 이승철, 이위발, 이종섶, 장이지, 조성웅, 김광선, 김수우, 김태형, 권애숙, 손현숙, 송경동, 송진권, 윤은경, 이경림, 이영주, 정한용 시인들의 시가 1,2편씩 언급되었다. 그중에서 손진은, 김윤이 시인의 시들은 3번 중복되었다. 논의 끝에 손진은 시인의 시 「개의 표정」을 선정하기로 했다. 심사평은 아래와 같다.
작금의 우리 시가 독자와의 소통보다는 개성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쪽에 매우 경도되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상의 언어 사용과는 전혀 다른 어법으로 좀처럼 독자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언어형식과 함께 시의 의미마저도 그 이해와 수용을 모두 독자에게 맡기는 열린 구조를 지향한다. 너무 열려 있으면 거기가 집안인지 집 밖인지 모르고 독자들은 헤매다가 주저앉고 만다. 이때 소통 부재 혹은 난해를 말했다가는 ‘독해 능력의 부족’을 고백하는 꼴이 되어 쉽사리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가독성 운운했다가는 ‘낡은’, ‘덜 새로운’, ‘개성이 없는’ 쪽으로 분류되기 십상이다.
우리 시단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시에 다가가는 데 큰 무리가 없으면서 읽을수록 그 함의가 새롭고 그 감동의 폭과 깊이가 커지는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거듭 읽을 때마다 시가 다가와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시편이 있었다. 「개의 표정」은 깔끔하게 그려진 한 편의 그림을 보듯, 잘 짜인 짤막한 이야기를 듣는 듯 자연스럽게 읽히며 시인이 마침내 전해주고자 하는 시의 고갱이가 편안하게 잡히는 힘을 지녔다.
집에서 기르는 암탉을 물어뜯은 개를 점잖게 타이르는 집주인이 있다. 그런 일이 그저 일상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아내가 있고 가책 받는 개가 짖는 착한 표정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가축 두어 마리, 가금 대여섯/ 키 낮은 채송화 분꽃, 해바라기”들이 한 풍경을 이룬다.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이루는 둥근 세계가 이 한 그림에 들어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들은 사슬의 관계, 포식과 피식의 관계 속에 있으나 이 그림 속에서 이들은 위계나 등위가 매겨져 있지 아니하다. 암탉과 개의 관계는 남매의 관계로 그려져 있고 이 가축과 가금과 인간 또한 한 가지 생명으로 옆자리에 그려져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죄인인 듯한 마음”을 느낀다고 했다. 나도 저 개처럼 형제를 물어뜯은 적이 있다는 것과 저 개 주인처럼 생명 가진 것들을 같은 높이로 보지 못했다는 뉘우침은 아닐까? 어찌 보면 동체대비의 불교적 자비관으로 읽힐 수도 있는 커다란 함의를 담고 있다.
시적 진실이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그리고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은 진술에 담길 수 있다는 매우 지당한 본보기로서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 김혜영 오홍진 김효선 복효근(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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