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풍경에 놀다 / 송지은


  

하나의 풍경을 읽었다 찬 냉기의 한쪽 모퉁이부터 뜯어내는 봄비의 가느다란 손놀림에 어디서부터가 시작인지 모르는 비 맞은 고양이 울음에

가슴 안에서 빗방울처럼 또박또박 싹이 돋아나는 걸 무심히 들여다보다가 또 다른 카드로 얼굴을 바꾸는 계절의 어디쯤에서

하나의 풍경에 빠졌다 내 몸까지 다 내어주고 버려진 사마귀의 심장을 법당을 급하게 빠져나오다 문살에 찍힌 구름의 숨소리를

발뒤꿈치 갈라진 틈으로 새어나오는 겨울의 쓸쓸한 문장으로 읽다가 바람이 긴 바퀴를 돌리며 어둠을 몰아가는 산 어디쯤에서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고요는 소란을 낳느라 고요를 주저앉히고 버릴 수 없는 것들은 끝내 다른 풍경으로 일어서는데

죽은 쥐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오는 것을 엿보다가 문득 나도 그 삶의 연속무늬 쪽으로 줄을 섰다

교회의 철탑이 모텔 건물에 지그시 그림자를 얹듯이 달이 제 몸을 지우며 죽음이 낳는 새로운 시간을 보여주듯이 풍경이 내 배경이었으므로 나도 풍경의 배경으로 지기로 했다 너에게

 

 

 

 

[당선소감] "시가 되지 않는 시의 함정"

 

언젠가 TV에서 방영된 물병아리 가족이 살아남는 법을 본 적이 있다. 마른 연못에서 더 큰 보금자리를 찾아 헤매는 길은 위험의 연속이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넓은 도로를 지나야 하고 들개에게 쫓기는 모습을 불안한 마음으로 보았다.

하지만 어미는 달랐다. 앞서가다 뒤돌아서서 새끼들을 기다리고 또 앞서가다 멈추길 반복했다. 도로를 건너고 수로를 건너고 마침내 큰 저수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어미는 어서 와라, 이리 오라고 재촉하거나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앞서가서 말없이 지켜보고 기다릴 뿐.

내게는 시가 그러했다. 어미처럼 묵묵히 기다리다 위안의 눈길을 건네주는 존재였다. 그것은 고통이면서 아픈 부분을 치유해주는 내 삶의 진통제였다. 하지만 그 문턱은 호락호락하지 않아 시가 되지 않는 시의 함정에서 오래 머물렀다. 지금도 그 함정에서 벗어났는지 알 수 없으나 건조한 겨울에 눈이 있듯이 먹빛 가슴에 가끔은 초록으로 퍼지는 파장을 볼 수 있다.

겨울 하늘은 차고 푸르다. 추위를 잘 견디지 못해도 혹독하게 날을 세우는 이 계절이 나에겐 희망이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존재하리라 믿으며 함께 글공부했던 동기들이 내 이름을 잊어버리기 전에 다시 부를 수 있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한라일보사에 고마운 마음 올린다. 글의 바다에 밀어 넣어주신 은사님들. 나보다 더 크게 기뻐하는 형제와 친구에게도 느낌표가 되는 시로 보답하고 싶다.

아직도 내 삶에 풍경이 되어 주시는 팔순의 어머니, 이제는 지하에서 둥근 웃음만 보이는 아버지께 술 한 잔 올려야겠다.


 

 

 

11번가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심사평]  "미적 형상화 시도 탁월"

 

신춘문예란 말 그대로 한 겨울의 눈보라와 삭풍을 견뎌내고 새봄에 피어나는 꽃과 같이 가장 찬란하면서도 권위 있는 등단의 관문이다. 따라서 신춘문예를 통해서 등단하는 작가에게는 지난겨울을 힘들게 이겨낸 치열함, 새봄에 태어나는 참신성, 앞으로 멀고도 힘든 길을 나아가야 할 가능성이 동시에 요구된다.

지역의 신문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통을 가진 한라일보 신춘문예에는 그 이름에 걸맞게 올해 1100여 편의 작품이 시 분야에 응모했다. 그러나 많은 작품들이 일상의 현실에 숨겨진 대상을 치밀한 묘사력과 참신한 비유로 표현해내거나, 인간과 세상의 모습을 개성 있는 언어로 변주해내는 시적 능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지은의 '풍경에 놀다', 송재선의 '발로 읽히는 유서'를 만난 것은 커다란 수확이었다. '풍경에 놀다'는 현실의 삶을 '풍경'의 모습으로 역동적으로 끌어당기거나 체감하여 미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시도가 탁월했다.

시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방식의 감수성과 화법도 두드러졌다. '발로 읽히는 유서'는 삶에 대한 깊은 사유와 고뇌의 흔적이 담겨 있어서 작품을 읽는 동안 계속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시다. 하지만 한 편의 시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자 하고 다소간에 사변적이어서 주제의식이 산만해졌다. 두 작품을 두고 오랫동안 고심을 거듭했으나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은 신춘문예의 의의에 더욱 어울리는 작품으로 송지은의'풍경에 놀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송미선의 '꼬리연', 남상진의 '섬', 조성필의 '물허벅'과 같은 작품들도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앞으로 더욱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허상문(문학평론가)

 

728x90

 

 

피운다는 것은 / 송지은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어둠이 찰 지게 들어있는 방에서 꽃은
게으른 손목에 잡혀 나오지 못하고 있다
물이 스민 계절은 부풀고
어디에도 합류하지 못한 이력서 같은
천리향 나무 잎사귀 몇 장이
형광등 불빛에 말라 떨어지고 있다
손톱만한 잎사귀의 먼지를 닦아내면
바람이 지나간 흔적이 있다
목마름을 견디며 버틴 푸른 힘줄이 보인다
비정규직 자리에 새 흙을 끌어와 분갈이를 한다
온도가 상승하면서 나무에 물이 오르면
꽃잎 하나가 어둠을 빠져나와
봄의 이마에 붉은 웃음을 낙점하고 확대한다
살아있는 동안은
누구에게나 꽃피울 자리는 있다
피운다는 것은 쓰러지기 위한 눈부신 허무
향기를 피우고
곰팡이를 피우고
바닥의 통증까지 밀어올리고나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도둑처럼 사라진다
피우는 것들은 모두
어둠을 본적지로 두고 있다

 

 

 

 

[당선소감] 홀로 깨어 있다는 것, 외롭지만 행복 사람의 마음에 기대는 글 쓰고 싶다

 

두통과 함께 날아온 당선 통보는 한동안 나를 혼돈의 늪에 밀어넣었다.


집 앞의 오래된 버드나무가 새로운 계절을 받아들일 때마다 분명 이럴 것이라는 생각과 겨울 하늘에서 우는 단말마의 새소리도 촉촉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도심을 벗어나 흙을 밟고 산 지가 3년이 되었다.


자라던 풀들과 곡식들이 안식이거나 소멸한 자리에 홀로 깨어 있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나 또한 홀로 깨어 있어서 행복하다. 생각의 뼈를 세우고 감성을 마름하는 일들은 고난이자 내 삶의 의무이므로 멈출 수는 없다.


두통은 느닷없이 찾아왔지만 시는 늘 나무늘보처럼 움직였고 나는 오래 기다려야 했다. 멀리 혹은 높은 곳에 있으면서 가끔은 축지법을 쓰는 너. 기다리는 일로 익숙한 나에게 혼돈이 밀려든 것은 길을 잘 찾아가라는 무언의 메시지일 것이다.


거실에서 각혈을 하듯 잎을 다 쏟아내던 천리향 나무는 화분을 벗어나 앞마당에서 흰 눈을 맞고 있다. 서둘러 오는 봄에는 꽃이 필 것이고 어둠을 거머쥐고 나온 향낭들이 얼마나 많은 종소리를 쏟아낼지가 자못 궁금하다. 그들이 그리는 풍경 속에서 나는 또 분홍색 연속무늬 가슴앓이를 하게 될는지 모른다.


하루 동안 곁에 머물던 편두통이 빠져나간 공간에 내일처럼 기뻐해줄 사람들을 호명해 본다. 그 이름들로 하여 잘 견디었고 넘어지지 않았다고. 그리고 부족한 글에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영남일보에 감사한 마음을 올린다.

 

시의 몸이 아닌 사람의 마음에 기대는 글을 쓰겠다고 정갈하게 다짐을 한다.

 

 

 

맛군

 

deg.kr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지급 받을 수 있습니다.

 
 
 
 

[심사평] 시대 아픔 녹여낸 어두운 응모작 많아 당선작, 매 순간 삶 꽃피우는 힘 내재

 

2014년을 영남일보문학상 시 부문 응모작과 응모자 수는 총 1천862편에 389명. 대한민국이 여전히 문학을 귀히 여기는 문학공화국임을 과시하는 놀라운 수다. 전 세계 보기 드문 우리 민족의 문학 열기에 부응하기 위해 심사에 더욱 엄정을 기했다.


남녀노소 고루 보내온 응모작을 당대의 삶과 사회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현상지. 올해 응모작은 어두웠다.


혁명도 사랑도 순정도 없는 시대를 살아내는 아픔들이 그대로 현상돼 나왔다. 특히 ‘비정규직’이 우리 시대의 키워드로 떠오르며 신유목시대 뿌리 뽑힌 이미지가 곳곳에 편재해 있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응모자는 25명. 읽고 또 감상하며,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 끝에 송지은씨의 ‘피운다는 것은’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자잘한 우리네 일상에서 삶의 끝, 간 데 없는 깊이를 천착해가며 우리 사회를 둘러보게 하는 힘, 끝내는 허무일지라도 푸른 힘줄처럼 매 순간의 삶을 꽃피우는 힘이 있었다.


같이 보내온 응모작 ‘벙어리 뻐꾸기’의 한 부분 “울음의 표기법이 달라서 건너갈 수 없는 슬픔/ 가슴을 쳐서 북이 된다면/ 살에 닿는 아픔을 녹여 수수꽃다리 같은 소리를/ 너에게 물려주고 싶었다”에서 처럼 소통과 감동이 있었다. 머리로 짓는 시가 아니라 생살 터지는 아픔을 가슴에서 가슴으로 전하는 그 감동, 진정성의 힘이 있기에 당선작으로 흔쾌히 밀었다.
당선작과 함께 ‘해바라기’와 ‘오랑캐꽃을 위한 광시곡’이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다.


같이 보내온 작품들을 참조하며 면밀히 비교, 검토한 결과 ‘해바라기’는 아직 덜 영글어서, 이에 비해 ‘오랑캐…’는 절실하기는 하나 너무 농익어, 무엇보다 기성시인들의 시법과 시의 구절 등이 자꾸 연상될 정도로 개성이 약한 게 흠이었다.


심사위원 이경철·이산하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