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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제 / 성유리(본명 성배순)

 

 

어머니 삼베치마를 입은 가오리연이

꼬리로 허공을 차며 솟구쳤다

네 귀퉁이 지느러미를 파닥이며 연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 떠나고 있었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가슴까지 휑하니 비운 모습이

추워보였다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고 있는 가는 끈만은

서로 놓아버리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우리는 목 아프도록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난 칼을 꺼내 팽팽한 순간을 그었다

사선으로 끊었다

연은 비로소 가볍게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래 보였다

그런 줄 알았다

 

아침 까치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감나무 가지 꼭대기에

연이 걸려 있었다

이슬에 온통 젖어

날 보고 있었다

 

 

 

 

세상의 마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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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기꺼이 내 속으로 몸을 던진 집 앞 논바닥의 그렁그렁 툼벙, 도서관 가는 길가의 돌멩이, 질경이, 민들레, 공설운동장의 그 바람, 어둠, 공허, 이세상의 모든 암컷, 어머니. 내 몸 속을 유영하다 내 손을 따라 나온 그들에게 감사하다.

 

7년 전쯤 시적 진화를 위해 손을 잡아 주신 교수님, 해마다 이때쯤이면 신문을 모조리 사서 내 이름을 찾곤 한다는 문우들, 감사하다.

 

남들 앞에서 조금도 망설임 없이 과대평가 해주던 그이와 사랑하는 아이들, 가족모두에게 감사하다.

 

한때 계절이 오기 전에 미리 익은 건 아닐까 하는 초조함에 몸의 병만 키우며 폭식과 구토를 반복해 왔다. 많이 비뚤어져 있었다. 시골, 이름 없는 들판 한구석에 쑥으로 시들지라도 나팔꽃이 되기는 싫었던 내 자존심을 지켜준 경인일보사에 감사를 드린다. 날개를 달아 주신 심사위원님께 큰절을 올린다.

 

 

 

 

아무르 호랑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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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문사에서 예심을 거쳐 선자들에게 넘어온 100여편의 작품들을 숙독하며 떠오르는 느낌은 작품 수준의 균등화이다.

 

많은 응모자들의 시적 역량이 일정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주관적인 시적정서를 크게 흠잡을 데 없이 진술한 다수의 시들 앞에서 선자들은 시를 지향하는 응모자들의 유행적 안이주의와 대중적 규격화를 우려했다.

 

특히 압축과 절제가 시의 미덕이라는 점을 망각한 산문화 경향을 심각하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범을 넘어 기성시단의 구각을 깨트리는 치열한 고뇌는 신춘문예를 통해 새로운 시인으로 등장하려는 신인에게 으뜸으로 요구되는 덕목일 터, 선자들은 그 결핍을 읽으며 아쉬움을 가진다. 심사의 기준으로 시의 정신적 바탕과 깊이, 그리고 언어적 결정능력의 균형을 염두에 두었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작품들은 박복영의 '풀잎처럼', 김주관의 '송이보고서', 성유리의 '진혼제', 강전욱의 '불국 찾아 가는 길', 하재청의 '공단세탁소', 이명자의 '길이 휘청거린다' 등이었다.

 

이들 작품중 먼저 박복영과 이명자의 작품들이 제외되었다. 기성시인들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져 독창적 개성이 결핍되어 있었다.

 

김주관의 작품은 재기가 넘치나, 수사적 화려함으로 너무 멋을 부린 나머지 언어의 긴장이 부족해 감동을 주지 못했다. 하재청의 작품은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과 건강한 현실의식이 돋보였지만 곳곳에서의 부적절한 표현이 시의 품격을 훼손하고 있었다.

 

강전욱의 시는 독특한 발상과 언어로 선자들의 관심을 모았지만 함께 보낸 시들의 편차가 커 아쉽게 제외되었다.

 

마지막 남은 성유리의 '진혼제'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육친, 죽음, 이별, 인연, 집착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몇 개의 알레고리를 통해 간결하면서도 비범하게 형상화해낸 능력이 돋보였다. 부디 끝없는 노력으로 한국시를 빛내는 큰 시인으로 대성하기 바란다.

 

-심사위원 : 하종오·김명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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