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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펄은 천민이다 / 서상규

 

 

그녀는 불가촉천민이다

육지에서 흘러온 것들을 곱게 삭혀

온몸을 차진 자궁으로 펼쳤다

사리와 조금에 들고 나는 순리로

펄의 기운을 받아 생명들이 윤회한다

바다가 산도(産道)를 여는

썰물로 진흙 펄이 드러나는 때

수억 구멍에서 탄생의 율동이 일어난다

이때 별빛들도 맑은 눈을 떠

갯것들과 동성동본으로 빛살을 반짝인다

만삭으로 차오른 달의 인력에 따라

다산으로 열고 닫히는 개펄

 

어느 날 심장과 심장을 맞댄

육지와 개펄 사이 방파제가 쌓이고

대대로 없던 이름이 새겨진다

뭍에서 흘러드는 유기물이 없으므로

펄이 질펀한 생리혈이 막혀

배란 없는 불임이 깊어진다

바다가 썰물로 옷고름을 풀어도

그녀의 가슴은 열리지 않는다

빈 자궁 속에서 게가 게거품을 물고

조개가 입을 딱 벌리고 아사한다

바다도 산란의 보금자리를 잃어

물고기들을 품고 오지 않는다

하늘에 족보를 둔 신분 낮은 혈통으로

천민(天民)이며 천민(賤民)일 때

그녀는 살아 있었다.

 

 

 

철새의 일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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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생명 순환의 상호작용을 직시한 관찰과 배려

 

인간은 왜 끊임없이 자연생태계 생명 순환의 질서를 무너뜨리는가? 물과 공기 작은 생명들의 연결 순환을 방해하면 언젠가는 공멸의 위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이에 인간은 공멸보다는 공존을 위하여 모든 자연생태계 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시대적 사명감으로 시작한 평택 생태시 문학상이 벌써 제3회를 맞이하였다. 전국규모의 이 공모전에 응모한 사람들은 총325명으로 작 품수는 모두1075편이다. 응모자격을 두지 않고 기성 신인 모두에게 문호를 개방하여 작금의 생태계를 함께 고민해보기로 하였으므로 그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여섯 명의 심사위원들은 예심과 본심의 과정을 거쳐 최종본심에 오른 여섯 명의 작품을 두고 토론에 토론을 거듭하여 당선작으로 서상규 시인의 개펄은 천민이다를 낙점했다.

 

당선작품의 기준으로는 평택 생태시가 지향하는 심사기준에 부합한 인간에 의한 자연생태 파괴, 환경파괴, 생명 순환질서 파괴, 인간 존엄성 상실 상황에서 재생태계 질서회복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연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공생공존을 염려하는 시인들의 외침이 불꽃처럼 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

 

두 번의 평택 생태시 문학상에서는 3명의 입선자를 뽑았으나 제3회부터는 당선자 1명으로 압축하였다. 이는 평택 생태시 문학상 당선작품에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당선작품 서상규 시인의 개펄은 천민이다를 살펴보면 생명 순환 이미지의 흐름이 유려하게 흘러가고 있다. 개펄을 불가촉천민의 천민으로 은유한 발상은 신선하다. 육지에서 흘러온 더러운 것들까지 받아들이고 삭혀내어 펄의 기운으로 새 생명을 잉태한 개펄, 자궁과 산도(産道)를 가진 여인에 비유하고 진행시키는, 어쩌면 낯익은 이야기일수도 있는 이야기를 낯선 표현으로 압도하고 있다. 질펀한 생리 혈이 막혀 배란 없는 불임이 깊어가는 개펄, 바다가 썰물로 옷고름을 풀어도 열리지 않는 시커먼 개펄의 가슴을 예리한 시선으로 찾아내어 염려하고 있다. 개펄은 모태다. 모태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포용과 사랑이 있다. 서상규 시인은 개펄 속에 굼틀거리는 생명의 메시지를 읽어내고 전달한다. 절실함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

 

종종 회자되기도 하는 개펄이지만 서상규 시인의 개펄은 신선한 충격을 첨가한다. 이는 시인만의 독특하고 고고한 시적인식론을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하늘아래 모든 생명들은 모두 천민(天民)이며 천민(賤民)이라는 형이상학적 사유가 시 읽는 즐거움을 더하고 있다.

 

함께 보내온 녹조에 물든 강’ ‘산은 다상성이다역시 생태계 생명 순환의 중요성을 유려한 필치로 발려내고 있다. 세편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심사위원들의 낙점을 받아냈다.

 

최종 본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재활용 근처에서의 문답’ ‘어떤 싸움에 대한 기록’ ‘바다의 밥상’ ‘두더지 반 지하 신혼 방’ ‘생쌀 씹기. 모두 만만찮은 기량을 보여주었다.

 

3평택 생태시 문학상에 응모한 모든 응모자들에게 감사드리며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낙선자에게는 위로를 보낸다.

 

- 심사위원: 권혁찬. 김영자. 배두순. 이귀선. 유병만. 진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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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상] 인력시장에서 / 서상규

 

 

때 절은 호주머니 속 동전 몇 닢이

방울경쇠로 짤랑거린다

새벽 별이 핏발 선

눈망울을 굴리며 길을 밟는다

동틀 무렵 어둠의 갈피가 푸르러지며

코뚜레를 꿴 달빛이 고삐를 바짝 조인다

 

날빛에 목이 졸리기 직전의

창백한 수은등 아래

그림자에 묶인 소 떼가

흰 콧김을 내뿜으며 서성거리고 있다

온기 몇 점으로 온정을 나누는 드럼통 속

불길에서 파랗게 돋은 정맥을 끄집어낸다

산맥의 혈이 뻗어 내린

힘줄로 밭을 갈던 한 시절

꿈길을 되짚어 하루 노역을 점친다

 

거간꾼들이 나타날 때마다

저마다 앙상한 골격을 부풀리고

순한 이빨을 드러낸다

누구도 찌른 적이 없는 야성의 뿔을 들이밀며

복종의 표시로 한껏 머리를 숙이지만

풀빛 지폐 몇 장으로 벌이는

흥정은 튼실한 소에게로 향할 뿐이다

 

하루치의 건초에 행운을 되새기는

눈길이 발굽에 차인다

가스러진 터럭 사이를 파고드는 바람에

펄럭이는 살가죽을 여민 몸 속에서

운명을 삿대질하는

알싸한 공복을 다독거린다

 

연장가방에 단단히 물린 지퍼처럼

어금니를 질근질근 깨문다

손등을 짓찧는 망치질로 하루의 기둥을 세우고

시큰거리는 근육으로 시간을 톱질할 수 있다면

굳은살이 아픔 없이 뜯겨나가는 나날이다

 

아침 출근에 바쁜 사람들 틈에서

하루의 시간을 접으며

햇살에 축문 적은 소지를 사른다

생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끄덕

발뒤축을 좇는 그림자의 고삐를 끌며

햇무리에 방울소리를 감는다

 

 

 

철새의 일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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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상] 어머니의 단층집 / 주영국

 


연립 한 칸을 얻어 이사하던 날
어머니는 토끼장 같다며
몇 번이나 옷소매를 들었다 놓으셨다

형이 월남에서 돌아오던 해
나는 사과상자로 층층이 집을 지어
토끼를 키우고 있었는데,
승리의 연호를 그리면서도 형은
몸 어딘가 자꾸만 가렵다고 했다
가끔은 맑은 날, 깨꽃처럼 충혈된 눈으로
남국行 비행운을 가리키며
이국의 방언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열병에는 토끼간이 좋다더라,
어머니는 토끼장을 기웃거리며 내 눈치를 살피셨다

토끼장이 텅 비자 형은 분가를 했다
간, 쓸개 다 잃은 토끼들을 따라
자신이 흙 한 삽 올리지 못한
낮선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부터 오히려 맑은 날 많았는데도
남국으로 가는 비행운 보이지 않았다
뜻을 알아들을 것도 같은
낮선 방언은 어머니가 대신했다

-나는 단층집이 더 좋더라,
문패도 없는 형의 집을 손질하다
어머니, 花妬姸*에 날아온 꽃잎 하나를
다칠세라 서둘러 치마로 받으신다.

* 화투연: 봄에 꽃 피는 것을 시샘하여 아양을 피운다는 뜻의 꽃샘 추위

 

 

 

새점을 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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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전태일의 정신을 현재적 의미로 되살리기

 

해를 거듭할수록 전태일문학상의 응모자 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인간을 억압하는 불의에 맞선 전태일의 정신이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고 있다고 믿고 싶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12명의 작품을 읽으며 심사자들은 전태일의 정신을 현재적 의미로 되살리는 방법은 무엇이며, 특히 그것을 문학의 언어로 드러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 하는 점을 고민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심사자들만은 아닌 듯, 적지 않은 투고작들이 1970, 1980년대의 기억을 복원해내는 데 바쳐지고 있었다. 물론 그 과거형의 되새김질이 환기시키는 것은 결국 오늘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좀더 생생한 현재형의 질문들을 만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렇지만 응모자들이 시를 쓰는 태도가 진지했고 성실성이 돋보여 우려보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서상규의 작품들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을 적절한 비유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인력시장과 소시장(인력시장에서>), 농아부부의 수화와 곱사송어의 역류(<농아부부의 수화>), 노동자의 조끼 등판과 무당벌레의 경계색(<무당벌레의 경계색>) 등은 설득력 있는 유비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작품의 수준이 고른 점이 인정되지만 앞으로 더욱 좋은 시를 쓰려면 산문적인 느슨함이 엿보이는 대목들을 고쳐나가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정진을 기대한다.

 

주영국의 <어머니의 단층집> <장마> <파장> <정읍을 지나며> <길만이> 등은 시적인 완결도가 높고 군더더기 없이 시어를 조직해내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런데 그 유창함이 한편으로는 일정한 상투형을 만들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적 대상에 대한 집중도를 좀더 가지면 상당히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믿는다.

 

김아름의 시편들은 유년의 기억을 섬세한 이미지의 직조를 통해 찬찬하게 그려내고 있다. <신림동, ><신림동, 여름><신림동, 겨울> 등은 일종의 연작처럼 읽히기도 하는데, 그것은 통일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작품 사이의 변별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기도 하다. 기성 시인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는데,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정도로 지나치게 세공하다보면 오히려 시의 핵심을 놓칠 수도 있다는 점을 유념했으면 한다.

이외에도 장이권, 김훈희, 김 린 등의 작품이 일정한 성취와 개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앞으로 시를 놓지 않는다면 분명 좋은 작품을 쓸 것이라고 믿는다.

 

- 심사위원 나희덕 (시인)·맹문재 (시인)

 

 

 

기차, 언제나 빛을 향해 경적을 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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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가뭄에 꾸는 꿈 / 김주관

 

 

가끔 마루 밑으로 추락하는 꿈을 꾸었다.

고샅을 살피는 돌배 감잎이 배들배들한 유월, 헛광 시렁에는 구렁이가 들곤 했는데 마늘쫑 끝대는 탱탱도 하여라, 꼬부라진 불쏘시개 되어 화덕 아래 지글거리는 날, 머리카락과 실파가 닭나무 살처럼 풀어져 진이 빠지면 돌덩이 되어버린 된장을 풀어서 아욱국 끓여 골목길에 뿌리는 거라는데. 설핏한 해거름에 나타난 긴 그림자, 미끈덕한 몸에서는 소름이 착착 목덜미에 감기고, 날숨이 막히고 숨통이 조여와 서늘하기도 했어라. 구슬처럼 박혀있는 고요한 심지, 내 눈에 가쁜 섬광이 꽂힐 때 댓싸리나무 그늘아래에 몸뚱아리를 숨긴 구렁이는 허연 옷 한꺼풀 벗어 말리는 중이었던가. 오솔길 휘적거리며 안골밭둠덩에서 왔으리라. 뻐꾹새 울음은 느릿느릿 콩포기에 내려 앉고 정적은 땡볕에 푹 익다.

밭고랑에 축 늘어진 유방을 말아 올릴 소낙비 기다리다 뒤늦게 벗는 허물이련만 땅강아지처럼 흙에 붙어사는 우리 엄마의 베적삼 냄새를 기억하고 십리 길 꽁무니 따라와 비단 옷 한 벌 갈아입으면 아, 하늘은 붉기도 했어라. 둠벙에서는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한 잠짓이 미지근한 오후의 수면을 데우고 얼굴이 까만 나는 마루 밑으로 굴러떨어져 가위눌린 심장을 쑥으로 문지르고, 엄마는 지킴이 우는 소리 들으려 자주색 하늘에다 대고 가없는 주술을 풀다. 날름날름 낮잠 끝에 찾아온 꿈이 내 머리맡에 깊숙한 또아리를 틀면, 얇은 헛껍데기 위에서 수파리들은 을 찾고 붉은 해는 서산에서 마른 을 태우고.

 

 

 

 

 

[우수상] 간고등어를 구우며 / 박수호

 

 

남해 따뜻하고 맑은 물에 살찌우고

동해 푸른 물로 사랑 키웠네

내 생 또한 만남과 배신, 이별로 황량함이 가득했네

거친 바다 숨소리에 놀라지 않고

같이 몸을 섞어 깊어지고

들리지도 않는 소리도 듣게 될 때까지는

모진 세월 흘렀지

한때 깊은 산사 선방 뜨락의 고적과 여유를 즐기고 싶었으니

봄 바다 따스한 햇볕 아래 子罕編(자한편)을 읽다가

그 높은 뭍에 올랐네

어차피 가야 한다면

희미한 흔적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면서도

뒤척이다 바다 쪽으로 돌아누우면

바다의 해소 기침 소리

자꾸 등을 파고들었어

이제 안동 유가에 불려 나가

양반의 풍모를 배워

이름 얻었으니 안동 간 고등어라네

무엇이 되려 하였는지는 묻지 마시게

소금에 절여져 한결 깊어진 내 눈빛을 보게 되리

언젠가 나는 내 몸을 떠나고

몸은 나를 버릴 것인 즉

그대 식탁에 오르면

거두어 주시게

저녁 밥상에 놓여 있는 내가 얻은 이름 하나

 

 

 

 

 

[우수상] 달팽이 / 최선민

 

 

집 한 찌를 제 알몸으로 간단하게 채우고 있는 이것은

어쩌면 이 넓은 벌판과 마을에 있는 모든 것을

통째로 조금도 바꾸고 싶지 않은 살림으로 가졌는지 모른다.

개울, 마당, 뒤울안 어디에나 이미 와 있는

늦은 듯한 시간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보려고

뭐든 제자리에 가만둔 채

자칫 그르쳐질 수밖에 없는 집

수선화 한 포기가 피어나기에도 비좁은 집은

갖고 있기 쉬운 몸 하나만으로

빈틈 없이 채우고 있는 걸 보면.

 

때로는 집만 동그랗게 세워져 있을 뿐

발걸음 소리는커녕 물 만지는 소리도 나지 않고

울타리의 막대기까지도 더듬이가 되어

이슬 숭얼숭얼 꿰고

쫑긋 서 있는 걸 보면.

 

여길 못 떠나는 나는 꾹 참고 내색조차 않는 것의 속말이 되어 있을까

하루 종일 이곳저곳 물 따라 흘러 다니다가도

느닷없이 나 새파랗게 풀잎에 치밀고

마르지 않으려고 떨며 우거지고

가슴 조이며 돌에까지 숨죽여 있고.

 

 

 

 

 

[우수상] 햇살 소포를 받다 / 서상규

 

 

꽃자리의 주소를 찾기 위해

총기 밝은 눈썰미로 물집이 잡히도록

햇살소포가 어지간히 에돌았나보다

솟대처럼 까치가 이정표 노릇을 하던

한옥 기와로 잎새 엮은 은행나무집 번지에

수직으로 솟은 새 건물의 지형도

사각의 덫을 드리운 그늘 속

눈썹 젖은 영산홍 한 그루가

옹색한 몸피로 하늘은 우러르고 있다

박쥐문양이 도안된 우표에

한철 빗줄기의 물결무늬와

단풍빛깔 물든 바람결

얼음 켜 돋아난 소인이 찍혀있다

지난봄에 보낸 소포를 받는다

별빛 도드라진 연필심 자국이 빼뚤빼뚤한

천사의 발신지 주소에

틀니를 드러낸 그믐달 미소가 정겨운

낯선 이름 석 자의 살빛 그리움

하늘자락으로 겹겹이 포장된

무량한 속 마음결을 풀어나간다

물관이 차오르는 두레박질에

연둣빛 잎새의 눈물샘이 부풀려진다

마지막 한 꺼풀 수평선을 벗겨내자

태양이 떠오르듯

어머니가 바리바리 싸서 보낸 빛 사태

살아생전 해독하지 못했던

사랑의 암호문 상형문자가

교감의 절정으로 또박또박 읽힌다

피돌기로 반지는 햇빛서체 한 자 한 자

애벌레가 탈피하듯 속눈썹 경련에

꽃잎 날개가 화르르 펼쳐진다

 

 

 

 

철새의 일인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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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시 수주문학상 운영위원회는 15일 오후 2시 부천시청 회의실에서 제6회 수주문학상 시상식을 가졌다.

 

수주문학상은 부천 출신으로 시인이며 수필가인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18981961) 선생을 기리기 위해 부천시가 1999년 제정한 것으로 전국에서 367명이 응모한 2603편의 작품 가운데 대상은 가뭄에 꾸는 꿈’(김주관). 우수상은간고등어를 구우며’(박수호).‘햇살소포를 받다’(서상규).‘달팽이’(최선민) 등이 각각 선정됐다. 대상은 500만원, 우수상은 100만원의 상금을 수여했다.

 

대상과 함께 상금 5백만원을 받은 김주관씨는 곰삭혀 우려내지 못한 졸작을 뽑아주신 심사위원에게 감사드린다고 밝히고 앞으로 수주문학상에 값하는 시를 써 갈것이라는 당선 소감을 말했다.

 

심사위원 김명인(고려대 교수)예심을 거쳐 온 적지 않은 작품들 중에서 고른 수준의 시편을 만날 수 있었으나 단숨에 선자를 사로잡는 응모시를 발견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고 밝히고 전체적인 작품들이 시를 가슴으로 받아 안거나 서정적 밀도를 감염(感染)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정서적 긴장을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고 평했다.

 

김주관 씨의 <가뭄에 꾸는 꿈>섬세한 시어와 걸맞는 시상의 배치로 요요하고 적막한 초여름 한낮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시가 아름다운 것은 잔상처럼 추억 속에 남아있음을 우리 모두의 서정을 되살려 내기 때문일 것이다.”

 

박수호 씨의 <간고등어를 구우며>일상의 경험을 견고한 시의 형식으로 구축해 내는 데 성공하고 있어서 오랜 습작의 연조를 느끼게 만든다. 그럼에도 어딘지 낮익은 정서가 되풀이되는 듯한 인상은 작가가 한 번쯤은 스스로를 냉정하게 되돌아볼 개신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서상규 씨의 <햇살 소포를 받다>작은 발견을 데둘러 말하고 그것을 밝은 시상 속으로 거침없이 포개는 수법이 신선하게 읽혀졌다. 그러나 속도의 가벼움은 흔히 감성에 빠져들기도 하는 법, 장점을 살리되 말에 무게를 실어주고 부피를 갖추게 만드는 일이 작가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했다

 

최선민 씨의 <달팽이>견고한 사유의 힘이 돋보인다. 작가의 남다른 관찰과 사색의 결과 이리라. 체험의 무게를 시에 실어 놓고 그 맥락을 얽어내는 방법을 제대로 체득한다면 선이 굵고 뚜렷한 시적 개성을 확보해 내리라 믿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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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외 4편 / 서상규

 

 

그도 포유류의 유전자로 태어났다

검게 때 낀 옷을 비막(飛膜)으로 접고

막대그래프로 다리를 세워 발자국들이 지나는

지하도 바닥에 거꾸로 매달려있다

생이 뒤집힌 빈 주머니로

허기가 일상이 되어

쥐의 몸통으로 엎드려있다

햇살이 고양이털무늬로 발톱을 숨긴

바깥세상을 피해 그림자의 동굴 속에서

마른 쥐꼬리 같은 손을 내밀고 있다

손금에 절망의 궤적이 음각된

굴레를 드러내놓고 있다

 

마치 잠에 빠진 듯 미동도 없는

그가 꿈속에서 날개를 펼친다

철길에 뻗은 회귀선을 따라

관자놀이에 새파란 정맥을 일구며

유년시절을 향해 날아간다

밤하늘이 따스하게 품은 달빛으로

앙상한 흉곽 가득 양력을 부풀려 닿은 간이역

어둠의 발음으로 쉰 목젖을 감싸며

사투리가 정겹게 흘러나온다

어머니가 청색으로 물든 눈물을 닦아주며

어린 왕자의 귀한 혈통인 양

젖 냄새가 흥건한 가슴으로 안아 준다

태반 속 아기처럼 낮게 엎드린

그도 포유류의 유전자로 태어났다

 

 

 

 

술패랭이꽃

 

구겨진 지폐처럼 파도가 인다

세월의 바람에 접힌 구김살이

서러운 곡절로 실려온다

아픔을 견디다보면 추억이 되듯

상처의 무늿결을 곱게 펼쳐

한 떨기 꽃을 피운 술패랭이,

보랏빛 그늘을 드리운 얼굴에

술기운이 붉게 번져있다

쌍꺼풀수술로 초승달 눈을

보름달로 열어놓았지만

세상이 그믐달로 더 어두워졌다고

지난 시절의 흉터를 휘갑친다

구차한 목숨을 세우기 위해

지독한 돈 멀미에 휘돌리며

홀씨로 날려 섬까지 팔려왔지만

장보고 같은 남정네가 없었겠느냐

속눈썹 한 짝을 뭍에 떨군

인연의 그리운 한때를

꽃술에서 자아낸 무명실로

이불홑청을 시치듯 박아나간다

명치에 말린 응어리를 더듬으며

한 땀 한 땀 풀어놓는 첫사랑에

홍자색 낯빛을 수줍게 물들이며

분내를 폴폴 퍼트린다

사내의 거친 근육으로 일렁이던

파도가 욕망에 부푼 수작을 그치고

죄지은 듯 잔잔해진다

꽃향기에서 이는 파동이

가파른 어깨에 나비의 우화를 깨운다

몽환에 휩싸인 날갯짓으로

술패랭이 꽃품에 간곡하게 안긴다

그녀의 섬이 포근하다

 

 

 

 

마의태자

 

검은 상복처럼 입성에 때 낀

태자가 왕조의 노을빛에

긴 그리메를 늘인 채 걷고 있다

성골의 후예임을 드러내는

불거진 광대뼈와 첨성단 위에 뜬

북극성처럼 형형한 눈빛

은행나무가 단풍든 금관을 씌워주며

알알이 익은 눈물방울을 떨군다

천년 사직을 일으키소서

백성들을 굽어 살피소서

땅바닥에 그림자를 엎드려 통곡하는

가로수들이 한 발 한 걸음마다

곱게 물든 낙엽을 깔아준다

군왕은 눈물을 보이지 않는 법도에

가슴 속에서 성덕대왕신종이 울립니다

만 백성을 지키지 못한 죄인입니다

어찌 하늘을 우러를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깊이 숙인 걸음에 옥쇄가 찍힌다

왕조를 하직할 게 아니라

왕권을 부흥시키겠다는 결의가

발자국에 돋을무늬로 되살아난다

머리 푼 바람이 태자의 큰 뜻을 읽고

서라벌로 파발마를 달린다

햇무리를 두른 환두대도의 칼날을

어둠이 칼집 속에 고이 품는다

밤하늘에서 폭포가 용틀임하듯 쏟아지는 

황금달빛의 물보라가

선왕들의 별자리를 새겨놓는다

혈맥이 뜨겁게 파동치는 지문으로

역대 왕의 이름을 짚으며

노숙자사내가 금강산골짜기 같은

서울역 지하도의 유배지에 든다

 

 

 

 

오이꽃

 

느낌표로 자란 오이 끝에

바짝 마른 꽃잎이 붙어있다

일생의 굴레를 두른

꽃자리에 어머니가 보인다

 

넝쿨로 뻗어 올라간 비탈에

밭 한 뙈기를 일군다

잎새의 호미질로 김을 매는

광합성에 땀방울이 돋아나

거름으로 발효되듯 뚝뚝 떨어진다

밭이랑이 뼛속 저리게 뻗은

지친 몸으로 노을을 끌고 와

초저녁별로 밥을 짓는다

달빛 분화구 같은 허기로

식구들이 밥 한 그릇을 비울 때

멀건 숭늉으로 끼니를 때운다

자식들의 열매꼭지가 자랄수록

목숨을 세우는 삶이 등을 짓누른다

강파른 세월의 궤적으로

마른 살에 주름이 늘어난다

관절이 닳은 무릎의 통증에

아무도 몰래 잠을 설치며

낮달같이 고된 일에 매달린다

변성기의 굵은 목청으로 여문

자식들이 푸른 화살을

세상 밖으로 쏘아 올린다

 

정수리의 백회혈(百會穴)에 뜬

어머니 별자리에서 번지는

오이꽃향기가 몸속 구석구석을

충만한 기운으로 밝힌다

 

 

 

 

푸른 논을 보다

 

막 떠오른 햇살로 촘촘히 짠

밀짚모자를 쓴 지리산이

섬진강의 물빛 흰 고무신을 신고

논두렁에 난 물꼬를 본다

지난밤 별빛의 꽃가루받이에

벼꽃이 하얗게 피어있다

배흘림줄기에서 입덧하듯

알슨 이슬이 청청 매달려있다

햇발에 돋아난 삽날로 고랑을 쳐

수로에 피돌기 기운을 채운다

잎사귀 푸르른 혈청과

물비늘의 백혈구가 무논에 일렁인다

오뉴월 볕이 거름빛으로 발효되어

굵은 땀방울로 맺힌다

지리산이 이맛전을 닦기 위해

모자를 벗은 선한 눈매가

황금이삭의 알곡을 닮아있다

간곡하게 풍년을 기원하며

산모같이 뱃구레를 부풀리는 논배미

뿌리 끝 태동이 잎줄기로 뻗친다

살여울을 일구며 돌아온 은어의

수박 향 비린내가 물살에 실려와

대궁 속 물관을 휘감아 오른다

하루의 충만한 노동으로

햇무리에서 노을이 풀린다

해거름에 꼴을 한 짐 진 아버지

고샅까지 마중 나온 아이의

작은 동산 그림자를 앞세워

천왕봉이 사립문을 들어선다

 

 

 

 

철새의 일인칭

 

nefing.com

 

 

[심사경위]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는 당선자의 응모작품 모두를 당선작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심사과정에서부터 작가의 역량을 보다 광범위하게 평가하여, 당선자를 보다 자신감 있게 세상에 선보이면서, 정말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공모에 당당하게 당선될 만한 수준인지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로부터 평가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번 신춘문예는 공지시 응모작품수를  5편으로 안내했으며, 접수과정에서 5편을 초과하거나 미달한 응모자에게는 보완토록 주문했다. 심사의 형평성 때문이다.

 

응모자수는 많건 적건 올해부터 한국문학방송은 일체 밝히지 않을 방침이다. 그것은 양적(量的) 우월감 과시 또는 단순한 숫자놀음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심에서 거르고 걸러진 5명의 작품 25편이 본심으로 넘겨졌다(2009년에는 10명이 본선에 올랐지만 심사위원들의 부담이 컸을 뿐만 아니라, 평가의 난맥상이 다소 감지되기도 했다. 하여, 이번에는 본선 상정 대상자를 크게 압축하였다). 본심으로 넘어가는 작품들은 응모자 성명 등 인적사항이 완전히 삭제됐다.

 

예심은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이 담당했으며, 본심은 김두한 시인(《현대시학》등단, 문학박사), 박남주 시인(《현대문학》등단), 이송희 시인(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최용석 문학평론가(문학박사, 전 중앙대 강사) 등 초, 중진을 가리지 않고 선발·위촉된 네 분이 맡아 참으로 신중한 평가 자세를 보여주었다. 초진급 위원은 보다 신선한 감각, 중진급 위원은 보다 폭넓고 깊이있는 관조 등으로 심사에 임하므로써 전체적으로 보다 객관적인 심사가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당선작에 대한 작품평이나 낙선작에 의견 등은 별도로 내지 않기로 했다. 한국문학방송의 신춘문예는 타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과 '차별성(개성)'을 어떻게 둘 것인가를 놓고 이번에도 크게 고민했다. 심사방식도 타 매체들과는 좀 달리, 작품마다 '문법·어법·표현의 적절성', '주제와 내용의 일관성', '감동·느낌', '시적구조와 메타포의 깊이', '작품의 신선감·독창성', '작가적 역량·성장가능성' 등을 구체적 평가항목으로 설정하고, 그 항목들에 미리 배점한 가운데 채점하는 방식으로 심사를 진행했다. 그렇기에, 당선작은 그와 같은 항목들에서 고루 높은 평가를 받은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응모자가 누구인지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인비(人秘)키로 한다. 문단에 적지 않게 이름이 알려진 문인들을 포함 기성작가들이 상당수 있기에 그분들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으로, 이러한 방침은 계속 이어갈 것이다.

 

당선은 되지 못했을지라도 이번 신춘공모에 참여해 주신 모든 응모자 제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과 진심어린 감사를 드린다. 다음 기회에도 큰 관심과 함께 도전장을 다시 꼭 던져주실 것을 아울러 부탁드린다.

 

― 정리: 안재동 시인(한국문학방송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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