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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들에 서다 / 이정원


저, 무청 푸르딩딩한 대님만 남은
들판
우수에 잠겨 침침하다
단물로 품었던 속정까지 내주고야
빈 들이 되었다.
산발한 은발로 밭두둑 억새꽃
몇날 며칠 손짓 거듭했어도
내 안에도 썰렁 썰렁 비어가는 들판 있는거
눈치 못채고 있다가
11월이 들녘 끝자락부터 아득 아득 저물어 오면
나도 못내 저물어 땅거미가 되는 것인데
저물다가 문득
自盡하려 곤두박히는 나뭇잎 보았다
재빠른 하강곡선
그속에 잎맥같은 무수한 길이 보였다
뿌리에서 잎맥까지 이어진
길따라 나섰다
감은눈 속으로도 휘영청 열린
길은 이제 들숨에서 시작되고
날숨으로 끝나가고 있다
뿌리가 준비한 거한 목숨들
길 가운데 빼곡했다
텅텅 비워야 겨울은 그 빈 여백에
작은 움 하나를 그리기 시작한다는 깨달음
그 길 어느 도중에야 섬광처럼 왔다
내 비어가는 속 뜰 어디엔가도
형형안 만다라 한폭 쟁여져 있으려나
다시 빈들에 서 본다
冬 安居에 들고 있는 초겨울
저 들판
바람 쓸리는대로 지는 잎새처럼 떨어져
섭생의 가드레일 같은
난해한 눈빛으로 열반경을 읽고 가는
새 떼 한무리
가뭇없는 허공에 銀紙처럼 구겨박혀
일몰이 된다

 

 

 

 

꽃의 복화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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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먼 길 나서며

첫 눈 조신조신 내리더니 축복이었나 봅니다. 그 날 오후의 난데없는 당선 통지는 내게 분명한 이정표였습니다.

잊었는가 했는데 잊은 게 아니고 떠났는가 했는데 떠난 게 아니었는지, 때론 파고 높았고, 때론 깜깜한 그믐의 시절 속에 부대껴 흐르며 살다가 문득문득 사무치는 그리움에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시(詩)였습니다.

늘상 설렘으로 지켜봤던 새해 아침 그 환한 지면에 제 졸시(拙詩)를 올려주시다니, 놓칠 뻔한 꿈 붙잡아 가두게 해 주시다니, 불교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합장(合掌) 올립니다. 이 격려에 힘입어 첫 걸음 내딛었으니 천리길 마다 않고 가겠습니다.

이 기쁨 회향합니다. 유년부터 아직토록 내 시의 도반인 저 햇빛, 거기 잘 버무려진 삼라만상과 종단엔 그 시의 지향점인 우주적 자아에까지. 그리고, 내 서정의 자양이었던 아버지, 어머니 영전에 생전의 불효를 뉘우침과 더불어.

또한, 늘 곁을 든든히 채워주었던 가족과 법우들, 그리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벗에게 온전히 회향합니다. 저 중중무진 법계에까지.

 

 

 

내 영혼 21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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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넓은 세계로 나가기를”

예년의 수준을 훨씬 넘는 많은 응모작 가운데 예선을 통과하여 본심에서 오른 작품들은 강재현 〈청평사 가는 길〉외 8편, 백하길 〈공사장에서〉외 8편, 김승호 〈山家에서〉외 5편, 정하해 〈살아서 관을 짜다〉외 4편, 이정원 〈빈 들에 서다〉외 5편, 홍 범 〈보이를 마시며〉외 4편, 이완 〈나비〉외 5편 장석원 〈낙하하는 것들의 이름을 안들〉외 4편 등이었다.

이 중에서 마지막으로 이은자, 장석원, 이정원, 김승호 네분의 작품이 최종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이은자의 간결성, 이정원의 서술성, 장석원의 참신성, 김승호의 형식적 절제 등이 각각의 장점으로 돋보였다. 그러나 육화된 시적 사유와 투고된 작품의 균질성 등으로 인해 이정원의 〈빈 들에 서다〉와 〈등신불〉 등을 금년도 당선작으로 선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겨울은 그 빈 여백에 작은 움 하나를 그리기 시작한다’는 깨달음이나 ‘풍경에서 뛰어나온 마음들’을 붉은 배롱꽃에 전화시킨 상상들이 이번 수상을 계기로 크고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며, 아깝게 탈락한 많은 분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심사위원 최동호 교수

 

 

 

 

[가작] 山家에서 / 김승호

나무 숲 바람소리 가만히 숨죽이면
못 물은 왜 이렇게 꼬리가 길은지,
돌담에 기대어 있는 산중의 의문 하나를
모악의 산맥같은 돌로 눌러 죽이고
석등 밑에 부려놓은 허리 휜 길 하나
가슴 속 붉게 흐드러진 화염도 밟고 와서
손 호호 불어가며 고봉 쌀밥 공양하고
그림자 가득한 창호문을 닫아걸면
화엄은 깊은 바닷속 늘 깊이 잠겨 있음을
비 끝에 쓸리는 적멸의 이 길을
시내에 모이는 솔 소리에 비내리면
미륵은 우리 곁에서 수행자로 걷고 있다.

 

 

[입선소감] 그리움을 글로 채우며…

산 속 깊은 산가(山家)에서 가지가 앙상한 나무에 등 기대고 있으면 가만히 밀려오는 산중의 외로움, 외로움과 그리움은 늘 함께 했다.

산 위에서나 산밑에서나 내 가슴은 늘 그리움으로 채워져 있었고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였다. 글을 써야하는 이유가 나를 속박했었고 뒤돌아보면 항상 회한만 남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가슴앓이하며 원고지를 채우던 스무 살 때가 내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로 기억된다.

스무 살을 넘기면서 원고지도 버리고 세상 속으로 훌쩍 뛰어 들었지만 언제나 가슴 저 밑은 그리움이 남아 있었다. 또 다시 스무 해쯤을 훌쩍 넘기고서도 그리움은 변하지 않았고, 늦게 서야 다시 시작한 글쓰기의 보상 심리는 상이라도 받는 것이어서 무던히 애를 썼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아내가 곁에서 격려해 주었던 것이 큰 위로가 되어서 좋은 상을 받는 것 같다. 더욱이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입선된 것은 내게 시사하는바가 매우 크다.


선(選)에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더욱 정진하라는 것으로 알고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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