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뿔 / 변희수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서면 늘 바람이 거세다
조금만 불어도 윙윙, 사나운 소리를 낸다
공기의 흐름을 막아놓아서라고 했다
바람이 뿔났다, 사실
막힌 곳이 많은 우리 집에도 여러 마리 뿔이 산다
공기의 흐름이 심상찮은 날이면 서로 으르렁거린다
그런 날엔 뿔을 함부로 세우는 바람에
잠시 격리될 뻔 한 뿔도, 제 뿔에 제가 걸려 넘어진 뿔도 있다
막힌 곳이 제일 많을 것 같은 아빠는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모자 속에 뿔을 숨겨 두었다가
상한 줄도 모르고 꺼낸 적이 있다 꼭 중국산 가짜 같았다
뿔 중에서 가장 약발이 센 뿔은 단연 엄마의 뿔이다
엄마는 알래스카 순록처럼 우아하게
뿔을 장식하고 다니지만 한 번 찔리면 오래 간다
TV에서 일 년에 한 번씩 뿔 갈이 하는 순록들을 보았다
순록들은 바위나 나무에 뿔이 떨어져나갈 때까지
벅벅 문지르고 나서야 새로 태어난 것처럼 온순해졌다
통증의 깊이로 까맣게 익어가는 순록들의 눈망울을 보면
아니, 서로 엉덩이에 난 뿔을 뽑아주려다가 상처투성이가 된
우리 집 뿔들을 보면 후시딘 같은 거 필요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끝없는 설원을 헤매다가 온 것 같은 밤이면
아무리 다정하게 얼굴을 맞대고 잠들어도 뿔 근처가 욱신거린다
우연히 한 우리에 갇히게 된 짐승들처럼
뿔과 뿔이 엉키는 악몽을 꾸기도 한다
막다른 곳에 서면 예민해지는 우리 집 뿔들
툰드라의 이끼처럼 납작하게 엎드려 바람의 출구를 살핀다
쓰자마자 벗어야하는 순록들의 아름다운 冠을 생각하며
나는 지금 웃자란 내 뿔을 관리하고 있는 중이다
뿔 대신 쫑긋해진 두 귀,
온순하게 한 철을 보낼 작정이다
[수상소감] 나는 빛을 통해서 완성된다
햇볕을 망사처럼 펼쳐놓은 들판을 걷는다. 눈이 부시다. 나는 어디쯤 왔을까.
궁금해서 늘 자주 뒤돌아보았다. 초속30만 킬로미터의 속도를 거쳐 내게 달려온 이 빛들은 내게 일종의 언어였다. 이 현란함 앞에서,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이 똑똑한 실감들 앞에서 나는 제대로 고개 들 수 없을 때가 많다.
나는 빛을 통해서 완성된다. 내 어깨에 내 머리칼에 닿은 빛은 언제나 나보다 먼저 완성된 시였다. 빛은 사물을 만지고 사물을 감각한다. 눈을 찌를 듯 아찔하게 빛이 스친 순간마다 한 줄의 시가 태어났다. 그러나 그것의 반쪽은 늘 캄캄한 어둠이었으므로 나의 시는 아직도 구름 속에 들어있다.
언젠가 그 어둠이 빛의 다른 언어라는 걸 선명하게 알게 될 때가 있을 것이다.
흐리다고 어둡다고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잠시나마 내게 닿았던 빛들에게 축배의 잔을 바치고 싶다. 고배의 잔을 마실 때도 따뜻한 함을 보여주신 천강문학상운영위원과 심사위원께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나의 가족과 감사를 전해야할 모든 분들께도 선선한 마음을 실어 보낸다.
[심사평] 인간의 삶의 가치를 고양하는 정신을 내포하고 있어야
예심을 거쳐 본심의 대상이 된 작품은 23명의 150여 편이었습니다. 다양해진 현대시의 화원을 보는 듯 자연, 가족, 역사, 일상 등을 소재로 한 다양한 개성적인 몸짓을 접할 수 있어 심사위원들의 눈을 즐겁게 했습니다.
5회째를 맞은 천강문학상의 위상에 걸맞게 상당한 수준의 시편들이 응모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들이 감각적 표현을 통한 이미지 조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주제의식이 전반적으로 미약했습니다. 시적 표현이 묘사로만 집중되어 있어, 시의 정교성은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라는 형식의 그릇은 만들어져서는 곤란합니다. 그 그릇 속에 알찬 내용물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시편들이 담겨져야 할 내용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시적 대상을 자기화해서 육화하는 힘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결과로 보입니다. 이런 경향이 현재 우리 시단의 한 경향이란 점에서 특별한 현상으로 치부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우리시가 언어적 기교만으로는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내기가 힘들다는 점에서 이런 우리 시의 한 경향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었습니다.
응모대상이 된 시편들을 두고 이러한 시적 관점을 취한 이유는 천강문학상이 지향하는 바가 시를 위한 시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가치를 고양하는 정신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은 시에서 필요한 개성적 이미지의 형상화도 필요조건이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주제가 선명한 감동적인 시에 더 점수를 주기로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일차적으로 걸러진 대상은 「원앙무덤」,「디지털 호미」,「도요와 영산댁」,「덤불 설계도」,「뿔」 등이었습니다.
「원앙무덤」은 시적 발상은 살만했지만, 하나의 주제 의식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이 약했습니다.「디지털 호미」 역시 그 발상이나 아날로그 호미를 디지털 호미로 전환시켜나가는 이미지 전개가 재미나는 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언어적 재미가 남기는 주제 의식은 그렇게 감동적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 편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편을 두고, 오랜 논의를 했습니다. 나머지 세편의 시를 응모한 세 사람의 시편들이 앞선 두 사람보다는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요와 영산댁」은 주제의식은 상당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시의 진술이 약간은 직설적이고, 연 구분을 하지 않고 있어 무거운 주제를 한 호흡으로 급박하게 읽어내리기에는 시적 리듬을 고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시는 산문이 아니라 노래라는 사실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은 두 편이 「덤불 설계도」와「뿔」이었습니다. 「덤불 설계도」는 시에서 중요한 언어미학이 제대로 구축되어져 있는 깔끔한 시편이었습니다. 시의 완성도라는 점에서 보면, 나무랄 데가 없는 완벽성을 내보이고 있는 시편입니다. 감각적으로 미세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이미지화하고 있는 솜씨는 상당히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완벽하게 완성된 「덤불 설계도」를 통해 독자에게 건네는 감동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는 언어미학 차원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비해 「뿔」은 작품 중간 중간에 드러나는 요설에 가까운 시적 서술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나,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세련미가 있고, 인생 삶의 문제를 일상의 소재를 통해 쉬우면서도 의미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제를 풀어내는 시적 추진력이 남달라 시의 완성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되었습니다.
그래서 「뿔」을 대상으로, 「덤불 설계도」와 「도요와 영산댁」을 각각 우수상으로 선정하였습니다. 수상자들에게 박수와 함께 한국시의 미래를 위한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정진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아깝게 수상하지 못한 분들도 부단한 탁마를 통해 입선의 기회를 가지시길 기원합니다. 하늘이 내린 깨끗하고 의미 있는 <천강문학상>이 일취월장하여 한국 문단에서 가장 의로운 문학상으로 발전되어가길 기대합니다.
- 심사위원 : 감태준(시인), 남송우(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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