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천동 본가입납(本家入納) / 이명
태어나 최초로 걸었다는 산길을 돌아
푹신한 나뭇잎을 밟으며
청주 한 병 들고 능선을 밟아 내려갔니더
누님이 벌초를 해놓은 20년 묵은 산소는
어둡고 짙은 주변의 빛깔과는 달리 어찌나 밝은지
무덤이 아니었니더
봉긋하게 솟아오른 아담한 봉오리
그랬니더, 그것은 어매의 젖이었니더
진초록 적삼을 살짝 풀어 헤친 자리에 속살이 드러나고
빛이 쏟아져 나왔지요
나는 그만 아기가 되어 한참동안 보듬고 쓰다듬고
얼굴을 파묻었을 때는 맥박소리가 들려오고
숨이 턱 막혔었니더
내가 오는 줄 알고
미리 나뭇잎으로 길을 덮어두고
아삭아삭한 소리까지 그 속에 갈무리해 두었디더
나는 낙엽을 밟으며 산등을 넘고
어매는 그 소리에 옷고름을 풀었겠지요
적삼 속에서 영일만 바다가 아장아장 걸어 나오고
해안선이 출렁거리고
몽실몽실한 백사장이 예전과 같았니더
이 젖의 힘으로 여태껏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환하게 한 세상 살고 있고
하늘 가득 씨앗들이 날아오르고
파릇파릇 아기 부처들이 자라나고 있었니더
[당선소감] 천의무봉을 꿈꾸며
뜨거웠던 지난 여름 어느 날, 매미가 밤을 새워 방충망에 매달려 울었다. 매미의 눈에는 밤새 흘린 눈물의 흔적이 하얗게 지워져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매미가 몸을 흔들고 날개를 퍼덕였다. 춤을 추는 듯했다.
사르나트에서 사정없이 내리치던 죽비를 얻어맞은 교진여의 영혼처럼 울음 울던 참매미의 갑작스런 춤사위에서 매미의 깨달음이 보였다. 그렇구나, 그 동안 나는 나를 들여다 본 세월이 없었구나. 그리고 어디에서라도 진실로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없었구나. 나는 비로소 정면으로 내 앞에 서 보았다. 시를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 동안 나는 ‘내 껍데기’와 싸웠을 뿐이었다. 서서히 나를 알아가는 순간, 세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시에 눈 뜸이 내 눈을 뜨게 하고 마음을 열어 주었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윤회와 밝음과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눈에 보이지 않던 미물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고 내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시는 내게 그렇게 한 세상을 열어 주었다. 2년여의 짧은 시 공부에서 나는 순수의 하늘과 바다와 들녘을 누비며 자연과 더불어 모든 것을 잊고 오로지 습작에만 열중했다. 그것은 내 삶에 주어진 최초의 자유였다.
지금 이 순간, 시를 지도해 주신 박제천 선생님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오래 전 돌아가신 어머님이지만 한순간도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상을 어머님의 영전에 바친다.
[심사평] 잘 익은 말의 빛깔
아침의 언어는 언제나 눈부시다. 신춘문예의 벽을 넘기 위해 오래고 먼 모국어의 장강을 거슬러 올라온 신인조들이 저마다의 빛깔과 소리와 뜻을 절정으로 뽑아낸 시, 시조는 더욱 그렇다. 시조가 우리의 전통시인 터에 굳이 자유시와 나뉘일 까닭이 있을까마는 지금까지의 현상은 분리해서 공모를 했었는데 불교신문의 경우는 시라는 큰 틀 속에 묶은 것이다.
총 310인의 응모자에 편수로 1000편이 넘는 작품들을 읽으며 느낀 것은 대체로 시의 수준이 고르게 높아가고 있으며 시 경작을 하는 후보층이 두텁다는 것이었다. 다만 시행지가 주는 종교적 선입견 때문인지 불교적 소재나 주제의 작품들이 두드러지게 많았다는 점이다. 그것이 감점 요인이 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의식적인 필요는 없어야 할 일이다.
어렵게 가려낸 결과 ‘분천동본가입납’ ‘순천만의 저녁’ ‘소금꽃’ ‘돌탑을 쌓으며’ ‘대숲이 있는 항아리’를 최종심에 올려놓고 저울의 눈금재기를 해서 ‘분천동본가입납’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도 예술의 한 양식인 이상 시대적 패러다임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몇 해 특히 신인들이 좇아가는 시의 흐름은 우리 시의 정체성에서 멀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당선작 ‘분천동본가입납’은 연어가 모천으로 회귀하듯 어머니의 산소에 가서 “어메의 젖”과 만나는 “풀벌레들이 환하게 한 세상을 살고 잇는” 정경들이 크게 꾸미지도 않으면서 깊고 은은한 가락으로 펼쳐진다. 다시 아기가 되는 화자와 어메와의 해후가 “…니더”의 화법으로 전해주는 잘 익은 말의 빛깔이 오래 묵은 향기로 피어난다. 함께 보내온 ‘추사가 보내온 저녁’이 작품을 끌어올리는 밑밭침이 되었음을 덧붙인다. 더욱 큰 성과있으시기를 빈다.
심사위원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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