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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감을 찾아서 / 안차애

 

 

1

배꼽에서 비스듬히 3cm 위쪽 지점을 깊이 맞뚫어

피어싱(piercing)*한다

생각보다 많은 출혈량은 있었지만

멧돼지 어금니 모양의 둥근 봉 두 개를 마주 꽂아

기쁨을 장식한다

바야흐로 성인식이다

 

어제는 들소 뿔 모양 장신구를

그제는 사슴의 목뼈 모양 링을

며칠 전엔 상아 모양 고깔을

미간에 귓바퀴에 귓불과 입술에 바짝 매달았다

비로소 야생 동물의 더운 피가 쿵쾅거리며 온몸을 뛰어다니고

 

2

사냥감이야 늘 지천이다

혼다 4기통 오토바이로 시속 100km 남짓 달리다 보면

알타미라 동굴 근처의 바람을 사로잡을 수도 있다

지중해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악을 쓰다 느닷없이

오츠크해산 고래 한 마리가 친구 입 속에서 튀어나오는 걸

깔깔대며 잡기도 한다

 

취향이야 늘 바뀌기도 하므로,

오늘밤엔 늙은 아버지의 가슴뼈 밑에 숨어 사는

느린 곰의 촌스러운 진지함을 새삼 사로잡아

혓바닥에 박고 싶다, 아주 기학적으로

 

* 눈 코 배 등 신체의 일부를 뚫어 멋을 내는 장식

 

 

 

 

 

2002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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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한숨·욕지기도 꽃들의 향연'

 

부산일보사의 당선 통보 전화가 왔을 때 나는 빈 교실에 있었다. 하루 전날 방학을 했으므로 교실은 물론 학교 전체가 물속 처럼 조용했다.

 

빈 교실의 적막함과 호젓함이 하도 좋아 본의 아니게 제일 늦게 퇴근하는 선생님, 일요일이나 방학 때 살짝 교실로 스며들곤 하는 선생님이 되었다. 생업의 터전인 교실이 꿈꾸거나 넋 놓고 쉴 수 있는 나만의 별천지로 잠시잠시 변신해주는 그 힘으로 매일을 탈 없이 살아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른도 훌쩍 넘어 찾아 온 시에 대한 짝사랑도 마찬가지다. 엄마이거나 아내 혹은 선생님이거나 이웃집 아줌마인 빤하고 팍팍한 일상을 문득 반짝임으로 속삭임으로 눈맞춤으로 환하게 변신시켜 주는 묘사와 은유의 꽃밭.

 

그 속에서는 내가 매일 먹고사는 한숨도 욕지기도 시장바닥 같은 소란스러움도 더 이상 시끄러운 신파가 아니다. 제 빛 제 발돋움 갸륵한 꽃들의 향연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감사한 이들이 너무 많다.

 

시의 씨앗을 가슴에 심어준 부산의 선배님,시의 떡잎 내는 법과 꽃피우는 법을 '보리 문둥아' 애칭으로 부르시며 일러주신 문학아카데미의 박제천 선생님,더 넓고 풍요로운 시의 꽃밭으로 나가게 해주신 황동규 김창근 두 분 심사위원님과 부산일보사에도 다함 없는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4년 전쯤에 서울의 변방인으로 편입해 아직도 서럽고 안타까운 것이 많은 나에게 고향이 준 너무 큰 격려이다.

 

 

 

 

치명적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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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강렬한 파괴력과 참신한 감각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26편이었다.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인 것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그만큼 어슷비슷한 완성도에만 급급한 작품이 많아 미흡한 바도 적지 않았다.

 

기법은 초현실주의를 내세우려는 것 같은데 무의식을 통한 인간 해방의 세계관이 없는 것, 유독 산문시 형태의 시편들이 많은데도 리듬을 살리기 위한 고통의 흔적마저 없는 것 등이 두드러지게 거슬렸다.

 

비록 높은 수준이 아니더라도 자기 목소리를 찾아 나서는 개성적 순례자가 많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선자들의 공통적인 주문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복천동고분' '화석' '길 아래에 집이 있다' '사냥감을 찾아서' '방음벽' '등대이발관'의 여섯 편이었다. 용호상박으로 자웅을 겨룰 만하였으나, 다들 결승점에서 머뭇거렸다. 틀을 깨뜨리지 않고는 새로운 도전의 기회도 없는 법, 마침내 여러 가지를 참작하여 안차애의 '사냥감을 찾아서'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당선작 '사냥감을 찾아서'는 자칫 규격 일탈의 즐거움에만 그칠 위험이 없는 바는 아니나, 완성품 만들기의 안전 운행에 여념이 없는 대부분의 '괜찮은 작품'들에 역행하는 강렬한 파괴력과 참신한 감각을 높이 살 만했다. 앞으로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크게 떨쳐 일어나리라는 잠재력까지 감안하였음을 참작하여 좋은 작품 많이 써 주길 바란다.

 

심사위원 황동규·김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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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잔 앞에서 / 이선희

 

1

이제 그만 엎질러버리고 싶어요 휘저어버리고 싶어요 좀처럼 행굴 수도 없는 목마름, 얼룩처럼 앞치마에 찍혀 있어요 뜨거운 목숨도 아닌데 어쩔 수 없는 꿈도 아닌데 꿈속에서 내가 잠시 기울었다 일어서는 소리 들려요 그 소리 들려요 그 소리 무시로 송곳처럼 쿡쿡 찌르는 아픔알 것 같아요 비어 있는 가슴을 더욱더 긁어대던 더부살이 같은 물살을 알 것 같아요 견고한 언어의 씨앗 다투어 잎 아무는 기척 알 것 같아요 목마른 얼룩 앞치마에 파고드는 저녁나절의 쓸쓸함도 알 것 같아요 내 삶의 그림자였던 보랏빛 실핏줄에 닿던 칼금 지금도 징그럽게 꿈틀거려요 그리움이란 변증법 데리고 꿈틀거려요 나를 떠난 그대는 이미 멀리 있는데 그 무관심도 관심인 듯 짓궂게도 출렁거리는 나 바람이에요

 

2

비트 아래 엎드린 아이들은 황사바람을 털고 있어요 어딘가에 있을 풀밭을 기웃대며 지나간 시절을 꿈꾸어요 먼 풀밭 너머 장다리꽃 사이로 아직 알을 까지 못한 벌레들은 썩은 밀랍을 게워낸대요 벌레들이 잠든 밀랍의 무덤을 지나 무개차가 지나가지요 풀잎 같은 허리 꺾으며 툭툭 마디 끊어지는 소리 들려요 쇠비름처럼 붉은 길의 줄기를 타고 장다리 꽃이 오고 있어요 종알대는 꽃일이 흔들거여요 무수한 발자국이 파놓은 길바닥을 지나 바람은 가고 장다리꽃 속으로 아이 두엇 종알거리는 소리 들려요 아직도 오지 않는 풀밭을 기웃대는 나를 종알거려요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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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일상 속 감정 형상화 뛰어나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열다섯 사람의 시를 읽고 먼저 느낀 점은 무언가 서로들 너무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개성있는 시, 남과 다른 생각의 시가 드물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부자연스럽고 말장난이 심한 시들이 많았다. '자궁'이라는 말은 왜 또 그렇게 많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성적 상상력을 자극하려는 의도로 보이는데,자연스럽지 못해서 오히려 역겨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동언 장혜림 이선희 세 사람의 시는 읽을만 했다. 신동언의 시 중에서는 팔팔하게 살아 있는 감각이 느껴지는 '점자책을 읽으며'가 가장 재미있게 읽혔다. 하지만 선명하지 못한 대목이 있는 것이 흠으로 지적되었다. 이에 비해 장혜림의 ''이나 '동해일기'는 지향도 분명하고 힘도 있었으나 완결성이라는 점에 있어 좀 부족했다.

 

이선희의 시들은 10여 편이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시 공부를 많이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다루는 내용들이 엄청나게 야심적이고 새로운 것들은 아니었지만, 아무나 쉽게 생각해 낼 수 있는 그런 것들은 아니었다. 특히 '찻잔 앞에서'는 우리가 흔히 일상 속에서 느끼는 작은 상실감이나 그리움, 애절함 등을 따스한 시각으로 형상화한 뛰어난 시였다. 균질감도 살만했다. '바람에게'는 소품이라는 느낌을 주면서도 완성도가 매우 높은 작품으로서, 시란 특별한 소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다시 깨닫게 하는 작품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별로 망설이지 않고 이선희를 당선자로 뽑기로 합의했는데, '찻잔 앞에서'를 당선작으로 선택한 것은 낮은 목소리로 노래한 일상생활 속의 회한과 아픔, 기쁨이 큰 감동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앞으로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심사위원 허만하 신경림

 

 

 

 

내 안의 물고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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