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제동 삽화 / 김성철
천둥 번개가 치자 공장엔 정전이 찾아왔다
소나기의 망치질 소리가 시작되면
둥 번개가 치자 공장엔 정전이 찾아왔다
늙은 배선이 어김없이 누전 빙자한 어둠을 불렀다
여공들의 환한 치아가 깜빡깜빡 불 밝히고
재단사 김씨는 하늘위로 쌓아올려진
회색원단 눈길로 만지며 납품기일 손꼽는다
창틀 등지고 불어오는 바람
미싱 선반 위로 펼쳐진 꽃길타고 달려간다
손 맞잡은 여공들 바람의 허리춤을 잡고
꽃길 위로 걸어 들어간다
피지 못한 꽃들이며 줄기 오르지 못한 실밥들이
보푸라기 흔들며 반긴다
페달 밟는 미싱공 꽃들에게 먼저 수인사 건네자
웃자란실꽃들 서둘러 뿌리 걷으며
손에 핀 봉제선 위로 올라탄다
때 묻은 손목, 손목들
산수유열매처럼 붉게 흔들린다
재봉중인 꽃술이 실밥을 흔들었으나
접근금지를 알리는 도안선이 유난히 날을 세운다
작업반장의 기침소리와 함께 기지개 다시 피는 형광등
주파수 맞추는 고물전축, 후후 바람 불어 목청 가다듬고
여공들은 와 하며
공장안으로 퉁긴다
봉제동 수출공장
시동 거는 미싱들 서역 향한 길을 재촉한다
실크로드 사막의 모래처럼 날리는 보푸라기
봉제동 여공들은 실크로드를 걷고 있다
[당선소감] "같이 아파하지 못한 나를 원망"
삶은 배반이다. 영화같은 삶은 늘 현실도피중이거나 대인기피증이 심하다. 그 덕에 앓아누웠던 일 얼마나 많았던가?
한동안 부서진 것들만 눈에 들어왔다. 깨진 계단이 그랬고 녹슨 육교난간이 그랬고 어머니의 해진 보험가방 가죽도 그랬다. 닳아빠진 구두 뒷굽 속에 들어앉은 단단한 사내도, 문 닫힌 유곽 속에 핀 꽃도, 가슴 속에서 꽉 깨문 신음만 뱉고 답답해하기만 했다. 형상화되지 못한 것들이 꿈속에서 부유하고 난 늘 축축한 식은땀만 흘리다 깨곤 했다. 손을 뻗어 만지기만 할 뿐, 같이 아파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는 날. 그런 날들.
전화를 받은 게 바로 어머니께서 진통을 시작했던 날과 같았습니다. 당선통보를 받고 눈에 선하게 밟히는 어머니.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낡은 보험가방을 들고 다니십니다. 서른 넘은 아들 녀석이란 게 매번 어머니 가방의 해진 가죽만 바라볼 뿐이지, 가방을 들어드리거나 새로운 가방을 만들어드리지도 못했습니다. 오늘의 이기쁨이 어머니께서 저를 세상에 내보내기 위해 인내하시던 진통을 조금은 덜어드렸을 거라 믿습니다. 또한 하나뿐인 누나와 자형, 그리고 사랑하는 조카 지은·지선에게도 이 기쁨을 전합니다.
이 기쁨 함께 하고픈 사람들 더 많습니다. 산적 같은 석정, 가냘프고 억센 상웅, 아프리카 소사 태관, 눈 먼 안빈, 소설을 위해 불태우는 모군과 유민, 그리고 1기 안도현 선배님부터 23기 오희진까지 모든 원광문학회 선배님, 후배님들. 목포를 지키고 있는 벗 인석, 늘 곁에서 힘을 주는 일영·유미씨, 강연호 교수님,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더욱더 열심히 쓰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 저를 믿고 따라와 주는 공부방 사회선생님을 비롯한 모든 선생님들. 그리고 깨물어 보듬고 싶은 아이들. 효정 별 선필 성범 준형 정곤 성민 성현 은탁. 또한 마음속에 앉은 그녀에게도….
나에게서 떠난 모든 사람들, 아픔 줘서 감사합니다. 좀 더 많이 아파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못난 저에게 죽비를 내리쳐 주신 두 분의 심사위원께 엎드려 고합니다. 더욱더 노력해서 부끄럽지 않게 쓰겠습니다.
[심사평] "민중의 삶 진전된 감각으로 표현"
예심을 거쳐서 본심에 넘겨진 작품들은 대체로 상당기간 수련과 일정한 수준의 솜씨를 보여줬다. 아직도 시인 지망의 열정을 가진 높은 수준의 후보자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한국문학의 미래를 위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응모작들은 최근 시단의 흐름이 반영된 탓인지 전반적으로 크고 무거운 주제보다는 작고 가벼운 일상사를 소재로 한 미시적인 삶의 세계를 천착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짧고 기지가 번득이는 시, 밝고 건강한 시, 서구적 감성의 시 등이 눈에 띄었다.
마지막까지 당선작으로 검토의 대상이 된 것은 '페르세포네의 동굴' '소설(小雪) 일주일 후, 첫 눈' '봉제동 삽화' 등의 작품들이었다. '페르세포네의 동굴'은 신선한 신생의 감각이 두드러졌으며 '소설(小雪) 일주일 후, 첫 눈'은 깔끔하고 완결된 서정적 구조가 돋보였다. '봉제동 삽화'는 봉제공장 여공들의 건강한 삶의 풍경을 소재로 한 시로서 약간 익숙하긴 하지만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었다.
세 편의 작품은 각각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한결과, '페르세포네의 동굴'은 현실에 대한 밀착감이 조금 부족했으며, '소설(小雪) 일주일 후, 첫 눈'은 전체구도의 시적 완결성에 비해 마지막 결말 처리에 있어서 내적 에너지가 약했다. 결과적으로 '봉제동 삽화'를 이의없이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는데, 그것은 이 시가 기존의 민중시와 달리 새롭게 진전된 감각을 긍정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민중시가 지닌 부정이나 분노의 감정을 벗어나서 "여공들의 환한 치아가 깜빡깜빡 불 밝히고" "웃자란 실꽃들 서둘러 뿌리 걷으며/ 손에 핀 봉제선 위로 올라탄다" "실크로드 사막의 모래처럼 날리는 보푸라기" 등의 사실적인 표현들은 노동현장에서의 삶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새롭게 표현해 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같이 응모한 '거미집'이나 '만물상' 등의 작품도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점 또한 선자들의 결정에 참조사항이 됐다. 당선자가 새로운 민중시의 지평을 걸어나갈 것을 기대해 본다.
당선자에게는 아낌없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드리고 아깝게 탈락된 많은 응모자들에게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드린다.
심사위원 신경림, 최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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