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변* / 배정훈
세죽細竹이 늘어선 마을 어귀
어린 백구가 강동거리며 뛰놀고
주인 모를 고깃배들
붉고 푸른 깃발이 비늘처럼 결을 타고 운다.
수족관마다 산호珊瑚 마냥 쌓인 게들
울긋한 소주 향내와 같이 타는 겨울 바다
더불어 붉어지는 한 세상을 지켜보며
술 취한 어부들
때로는 수줍었고 번잡했던
삶의 그물을 거둔다.
바다야 온전하겠지만
바람 많은 동네에 터 잡고 낚는 세월은 고래처럼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
부네 손등에는 손금이 놓이고
짓지 않아도 될 쓴 근심이 수의壽衣처럼 짜였더라.
창자처럼 이어진 골목들
일렁이는 불빛들
애 끓는 단장斷腸도 한 시절인데
창을 두드리는 주먹 쥔 해풍海風
부대끼는 댓닙 그 새로
바다의 눈시울이 붉다.
* 경북 울진군의 한 지방
[심사평]
올해에는 응모작품수도 예년보다 많고 뛰어난 작품도 많이 눈에 띄어 심사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심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과연 배정훈의 ‘죽변’, ‘별’, 이가은의 ‘이명(耳鳴)’ 등의 작품이 발견됨으로써 심사자들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죽변’은 자칫 평범한 서경시로 떨어질 소재다. 물론 이 시는 한 아름다운 바닷말을 그린 서경시로 읽어도 시를 읽는 즐거움을 충분히 맛보게 해준다. 그러나 이 시의 맛은 거기에만 있지 않다. 아름다운 바닷마을 모습을 통하여, 또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통하여 사람이 사는 기쁨과 슬픔을 보여 준다. 과장된 표현이나 작위적인 비유가 없는 것도 시의 품격을 높인다. 시가 막힘없이 읽히는 것은 그에 걸맞는 리듬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별’은 소품이지만 어느 한 구석 빈 곳이 없는 말끔한 시다. 어쩌면 시는 이처럼 아무 것도 얘기하는 것이 없으면서 많은 얘기를 할 때 더 좋은 시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시는 종종 너무 많은 것을 얘기하려다가 시의 맛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만 이 시가 당선작이 될 때는 신인으로서의 패기가 모자라는 작품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는 있다.
‘이명(耳鳴)’은 아주 유니크한 시다. 시형식도 시어들도 신선하다. 요즘 투고시 중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일정한 전제를 앞에 놓고 연역적으로 그것을 풀어가는 것 같은 형식이거나 그 변형인 것들인데 투고시편중 한 편도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이 투고자가 이른바 시창작강좌의 나쁜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증좌 같아 반갑기도 하다.
내용도 진부한 도덕주의나 속보이는 시민공동체주의 같은 것은 멀리 벗어던지고 있어 신선하다.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아무한테도 구애받지 않고 할말을 다 하는 활달함과 당당함도 마음에 둔다. 당연히 당선작이 될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선자들은 ‘죽변’과 ‘이명(耳鳴)’ 두 작품을 놓고 토의 끝에, ‘이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죽변’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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