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풀 / 고은희
1
밀풀에서 꽃이 폭폭 끓는다. 부풀어 오른 밀풀은 겨울과 여름에 유용하다. 문살에 밀풀을 바르고 창호지를 바르고 무성한 숨을 바른다. 덩달아 지붕 위로 하얗고 얇은 첫눈이 내린다
귓불이 떨어져나간 단풍잎 몇 개가 붓살이 쓸고 간 거친 자리에 폴짝 내려앉는다. 겨울 문턱에서 말이 달리고 창호지 마르는 소리가 소복소복 들린다. 그러니까 문풍지는 밀풀이 모른척한 날개, 열렸다 닫히는 문이 구수한 밀풀냄새를 풍기며 날아다닌다.
2
김치는 꽃이다. 사이사이 익어가는 배추김치뿐만 아니라 한 여름 열무김치를 들여다보면 온갖 색이 다 들어 있다. 푹 절인 열무에 홍고추를 썰어 넣고 푸른 실파를 뭉텅뭉텅, 마지막에 흰 밀풀을 넣어 섞어 피는 꽃.
밀풀이 돌아다니는 동안, 풋내라는 밑줄에 문풍지가 달려 나온다. 꽃이 피려고 사각사각 감칠맛이 날 때, 한데 섞이고 어우러져 동지섣달 한겨울을 불러낸다. 밍밍한 국물에서 팽팽한 문풍지 맛이 나게 하는 것, 밀풀이 꽃을 피우는 방법이다
3
살짝만 뜨거워져도 엉겨 붙는 밀풀의 힘,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배 아픈 때가 있다.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 풀죽은 열무가 밀풀을 만나 아삭아삭 기운을 차리듯 김치도 한겨울 문도 밀풀의 요기로 견딘다.
창호지 문에 구멍하나 뚫린 듯
열무김치국물은 앙큼한 맛이다
[당선소감] “구순 아버지 칭찬처럼 ‘장한 시’ 쓰고 싶어” 소실점 끝 불안감 걷어준 낭보 시 곁에 두고 끝까지 견뎌갈 것
당선통보를 받았다. 동시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구순을 향해 구부러진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카랑카랑 들려왔다. 오래전 <농민신문>을 애독하셨던, 농부인 아버지가 짧게 한마디 하셨다.
“장하다!”
장한 시를 쓰고 싶다. 아주 골똘하게 장한 궁리를 해보지만 장한 시 쓰기는 언제나 불안하다. 뻔히 보이는 가설을 붙들고 한밤을 보낸다. 애착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유품 같은 것, 나는 시를 애착한다. 내 허물을 간단하게 들키는 때가 허다하지만 시를 곁에 두고 끝까지 견디겠다. 새벽과 어둠을 함께 겪은 남편과 평생 팔 걷을 준비가 되어 있는 정화, 준혁, 준호에게 사랑을 전한다.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으로 인연을 맺은 조재학, 백성, 노수옥, 김순자, 이수니, 김영한, 이인, 강스텔라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매달 만나 합평하고 수다 떠는 일은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소실점 끝에 몰려 있던 불안을 순식간에 걷어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감정의 진폭이 잔뜩 묻어 있는 맨발의 체온이 따뜻해진다.
특효약 같은 시의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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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밀풀, 고전적이고 담백한 작품…감칠맛 나는 언어 돋보여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 발휘…‘앙큼한 맛’ 담긴 시 써주길
모두 276명의 응모자 중 예심을 통과한 20명의 작품을 받았다. 20명의 작품은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접수번호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임시 묶음 책 형태였다. 다산 선생이 ‘문장은 사람의 꽃이다’라고 했던가. 꽃밭에서 단점을 찾아보려고 며칠 혼났다. 다들 나름 빛났다.
두 심사위원은 각자 다섯편을 추려 최종 합평회서 만났다. 세편이 일치했고 다른 두편도 눈여겨봤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미소를 나눌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작품은 ‘대설주의보’ ‘달팽이’ ‘밀풀’ ‘만가’ ‘해당화’였다.
시대의 아픔을 노래한 ‘만가’는 동봉한 다른 작품에서 설명적인 시 구절이 더러 드러나, ‘꽃잎을 까보면 충혈된 눈동자’ 같은 감각적인 이미지가 살아 있는 ‘해당화’는 앞부분의 긴 나열이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있어, 먼저 미련을 접었다.
남은 세편을 올려놓고 한편을 결정하려고 하자, 단점은 가려지고 장점들만 부각됐다. ‘대설주의보’는 언어의 절제미를 보여준 산뜻하고 정갈한 작품이었으나 당선작으로 선하기에는 좀 소품이 아닌가 싶어 망설여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달팽이’는 함께 응모한 작품들 전체가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더 애착이 갔다. 공사장 절벽에 매달린 노동자와 달팽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노동자의 삶을 잘 그려내고 있으나 과연 이 시가 새로운가를 문제 삼아 볼 수밖에 없었다.
당선작으로 결정한 ‘밀풀’은 고전적이고 담백한 작품이다. 작품을 형상화하는 능력과 언어를 감칠맛 나게 다루는 솜씨를 높이 봤다. 앞으로 ‘잘 풀어줘야 잘 붙는 힘’을 언어의 세계에서도 발휘해 ‘앙큼한 맛’ 나는 시 많이 써주길 바란다. 당선자를 축하하며 당선을 잠시 미뤘을 뿐인 응모자님들에게도 위로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곽재구, 함민복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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