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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踰里에서 / 장만호

 

 

함부로 살았다, 탕진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대에게 말할까 말까, 사랑하는

어머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석달 열흘

한 줌의 마늘과 쑥을 드시고도,

강림하지 않는 아버지를 우리가 기다릴 때

그대를 만나고 미아리나 수유리 저녁을 만날 때

간혹 희망은, 뽑지 않은 사랑니처럼

아팠다, 생애의 묽은 죽을 반추하거나

희망과 혁명을 바꿔 부르기도 했지만,

집 근처 국립묘지의 무덤과 무덤들

푸르고 단단한 입술들이 일러주던 또 다른 피안은

시대의 낙엽들 되돌아 갈 길을 묻고 있었다

그렇게도 읽을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징검다리였다

삶은 금간 항아리 같았다

성급한 이해가 한 생애를 그르쳤으므로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잇몸인 물과

행간에서 깊어지는 한숨 같은 우물들

읽을 수도 재울 수도 없는 세상을

탕진할 것 하나 없는 시절을

한 켤레 벙어리 장갑처럼, 함부로

나는 살았다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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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이제는 많이 늙으신, 계속 늙어가실 어머니에게 이 기쁨을 드려야겠습니다.

 

봉문(封門)하고 산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 속에 있지 않으려고, 스스로 빚어 올린 항아리에 갖혀 지내며 시를 읽는 밤이 있었습니다. 예민해진 귀는 작은 소식에도 멍멍해졌습니다. 간혹 누군가가 그리워지기도 했지만 그 이름 부르지 않았습니다. 상처라는 걸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곱게 키우던 새를 날려 보내며 세상의 조롱 속에서 한껏 자유롭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깨달음도 없이 나는 나가고 싶어졌습니다. 문도 창도 길도 없는 항아리 속에서 나오기 위해, 굳은 마음을 깨기 위해 나는 그 마음과 같이 넘어져 굴렀습니다. 계속 굴러가 시장에 이를 때까지…….

 

'큰 현명함은 시장에 숨는다'라는 말을 생각했습니다. 비록 작은 현명함도 못되겠지만, 상대를 용인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거래하며, 그 거리에서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며 말들을 엮어 꽃을 만들며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 송이씩 나눠주고 싶습니다.

 

이 당선의 기쁨이 그런 힘으로 치환되기를 바라며 부디 내 시가 깨달음의 경지로 떨어지지 않기를, 그래서 계속 삶 속에서 기우뚱거리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종암동 시절의 식구들, 문창반 선후배님들, 고전기타부의 사람들, 인생의 모든 스승들과 뽑아주신 선생님들, 애정으로 가르쳐 주신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무서운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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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들이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너무들 비슷비슷하다. 유행처럼 생긴 대학의 문예창작과나 각종 문학강좌 탓이 아닌가 싶다. 시란 어차피 남과 다른 시각 없이는 쓸 수 없는 것, 이런 시각은 손기술의 훈련만으로 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감각적으로 세련된 시들이 적지 않으면서도 큰 울림을 주는 시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도 이번 심사를 하면서 느낀 점이다.

 

하지만 최승철('눈 덮힌 돌''목도장이 있는 골목' ), 이현승('근황''모과'), 장만호('수유리에서''겨울잠' )의 시는 크게 돋보인다. 최승철의 시에는 생활의 음영이 짙게 배어 있다. 특히 '목도장이 있는 골목'의 분위도 시를 재미있게 읽히는 데 한몫을 한다. 표현을 공연히 모호하게 하여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게 만드는 버릇은 고쳐야 할 것 같다. 이현승의 시는 남과 비슷하지 않은 시로서 매우 개성적이다. '근황'이 가장 좋았는데 이만큼 유니크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한데 수준에 미달하는 시가 여러편이다.

 

장만호의 시는 우선 읽기에 편하다. 자연스럽고, 그 나름의 리듬도 갖고 있다.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회한이며 안타까움, 그리움이며 깨달음 같은 시적 내용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남의 것이 아니고 진짜 자기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억지로 만든 시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이 점은 매우 값진 것이다. '수유리에서'가 가장 빛나는데,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같은 비유도 시에 생기를 더한다. 밝고 환한 분위기의 '원정'(園丁)은 생명감으로 충일해 있고 완결성에 있어서도 돋보인다. '청어'(靑魚)도 그가 시를 재미있게 쓸 수 있는 자질을 가졌음을 말해주는 균질감 있는 시다. 우리는 그가 시인으로 출발할 준비를 충분히 끝냈음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주저하지 않고 '수유리에서'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 심사위원 유종호,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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