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흰죽* / 변희수
불편해지면 죽을
끓입니다
식사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가볍게 훌훌 넘기고 싶다는 말
어제의 파도는 우물우물 삼켜도 된다는 그 말
그게 잘 안 돼요
부드럽게라는 말이 목에 걸려요
당분간 절식이나 금식
이상적인 처방이라는 건 알아요 미련이 생겨서
나는 죽을 먹습니다
맑고 흰죽을
한 숟가락 또 한 숟가락
돌아서서 코를 풀었죠
조금 묽어졌다는 뜻이지만
눈물은 짜니까
빨간 눈으론 돌아다닐 수 없으니까
그런 날은 손바닥마다 노란 가시선인장꽃
울지 않은 척 했어요
얹혔을 거라고 수군거릴 때마다
이 고비는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생각에 걸려
어제도 오늘도 삼키죠 백번도 더 생각하죠
죽이고 죽이다 보면 또 다시 죽
이렇게 맑고 흰죽
목이 메여요 달랑 죽 한 그릇인데
눈이 부셔요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몸속을 돌아다니는 물기가
어제의 죽이라 하겠지만
밤마다 복닥복닥 탕! 탕!
죽 끓이는 시간이 또 다시 찾아오고
죽은 조금만 쑤어도 넘치게 한 솥이에요
후회도 한 솥 미움도 한 솥이어서
나는 먹고 또 먹을 테죠
다행이다 싶지만
맑고 흰,
무명의 시간들
좀 서운해요 돌아서면 고프고
어떻게든 달래고 싶은데
받는 게 이것 밖에 없는 이 속이
내 속이 그렇다는 거죠 지금
* 4.3 사건 피해자인 진아영 할머니는 턱과 이가 없어 평생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병과 영양실조를 달고 살았다.
[심사평]
역사를 가정해서 말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하여 말한다면 어떨까? 가령 4 ? 3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 제주 땅에 극도의 비극적인 역사는 출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통곡과 반목과 질시의 고통스런 아수라의 세계 역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역사는 이미 일어난 과거 사실이므로 당연히 되돌릴 수 없다. 더불어 이념의 대립과 충돌의 소용돌이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희생양들의 아픔과 슬픔도 지워질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안쪽과 바깥쪽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수시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있다. 그것을 걷어내지 않으면 미래는 암울할 뿐이다. 흔히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는데, 더는 참담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나간 4 ? 3의 역사를 똑바로 직시하고 현재와 미래를 살아가는 거울로 삼아 마땅하다. 이번에 시행되는 <제8회 제주4 ? 3평화문학상>도 그런 취지에서 시행됨은 물론이다.
이번에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면밀히 살펴보는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이 공통점으로 느낀 견해를 몇 가지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작품에 투영된 작가의 시선들이 대체적으로 4 ? 3을 피상적이거나 관념적으로 보는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뿐 아니라 4 ? 3의 현장성이나 리얼리티를 천착하는 과정에서 4 ? 3의 역사성이나 정신적인 측면이 간과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또는 과잉된 수사의 현란한 사용 등으로 독자(심사위원)와의 소통을 어렵게 하는 작품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4 ? 3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소 왜곡된 시 쓰기가 이루어진 경우도 없지 않았다. 앞뒤가 맞지 않은 비유를 사용하거나 난해한 시 쓰기가 시적 진실을 가려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 가운데 더욱 문제점이라 할 수 있는 점은 응모작품들이 다루는 소재나 내용, 의미 등이 일정한 틀 안에 갇혀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어떤 한계성을 극복하는 노력과 작품의 생산이 요망된다. 이제 4 ? 3문학은 제주만의 4 ? 3, 또는 흔적에 국한된 4 ? 3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보다 세계사적인 범위로 의미를 확장해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위에서 말한 내용 모두를 해결하거나 충족시키는 작품은 물론 아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은 시「맑고 흰 죽」을 당선작으로 선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모았다. 이 작품은 4 ? 3사건의 피해자인 진아영 할머니에 대해 그리고 있다. 그녀는 턱과 이가 없어 평생 소화불량으로 인한 위장병과 영양실조를 몸에 달고 살았다 한다.
이 작품은 ‘죽’을 통해 불편한 몸을 떠올리고, 그 불편함을 야기한 사건을 되새기면서, 그 사건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을 쉽게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하에서, 주어진 삶을 힘겹게 가누어나가는 한 인간의 애잔한 안간힘을 그려내고 있다.
죽을 먹을 수밖에 없지만, 언제나 ‘부드럽게’라는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삶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죽’은 ‘죽이고 죽이’는 비극적인 사태를 떠올리는 매개체이면서 언제나 목 메이게 하는 것으로 가장 절실한 삶의 영양소이다. 음식을 통해 쓰디쓴 역사의 맛을 되새기는 절실함이 가슴을 울리게 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이상국, 이하석, 김광렬
제8회 제주4.3평화문학상 수상자로 시 부문 변희수 시인과 논픽션 부문 김여정 작가가 결정됐다.
제주4.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은 지난 20일 제주4.3평화기념관 대회의실에서 4.3평화문학상 시상식을 개최하고, 두 수상자에게 상패와 각 2000만원의 상금을 수여했다.
제주4.3평화문학상 운영위원회(위원장 현기영)가 주최하고 제주4.3평화재단이 주관한 이번 시상식은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해 수상작가와 가족을 비롯해 현기영 운영위원장, 송승문 4.3희생자유족회장 등 20명 내외의 최소인원만 참석했다.
양조훈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제주4.3의 지난한 진상규명운동 과정에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 이산하의 시 '한라산' 등 많은 문학 작품들이 4.3의 증언자 역할을 해주었다"며 "제주4.3이 평화와 인권, 화해와 정의라는 인류 보편의 가치로 만개하는데 4.3평화문학상이 가교가 되고 이정표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변희수 시인은 수상 소감을 통해 "4.3사건에 관한 작품을 누군가 계속해서 쓰고 또 누군가 계속 읽는다면 진아영 할머니를 비롯해서 수많은 희생자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것이 문학의 가장 큰 힘이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김여정 작가는 "'그해 여름'은 한국전사에 기록되지 못한 전쟁의 참혹함을 경험한 보광동 사람들의 이야기로 지난 3년여의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막걸리를 마시면서 가슴 속 깊은 곳에 송곳처럼 박힌 이야기를 꺼내서 들려주신 보광동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한편 제9회 제주4.3평화문학상은 오는 7월 중 공모를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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