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상] 도둑 산길 / 이성부
신새벽 벼랑에 엉클어진 철조망을 딛고 넘어
칠팔 년 전 내려왔던 산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가지 말라는 길을 가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심하게
가슴 두근거리고 불안하다 죄를 짓는 일이 이럴진대
오늘 하루 산행이 무사할지 제대로 될지
걱정이 슬그머니 배낭을 잡아 끌어내린다
길은 풀섶에 가려져 끊어질 듯 희미하고
나뭇가지들이 제멋대로 뻗어나서
자꾸 앞을 가로막는다 사는 일도 이렇게
갈수록 거추장스러운 것들이 많아진다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내가 훔친 산길이 고요하게 흔들거린다
길이 끝나는 데서 넓은 너덜겅이 가파르다
까마득한 비탈 바위덩어리들을 밟거나 피해 가거나 건너뛰거나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면서 위로만 올라간다
전에 내려왔을 적에는 미처 몰랐는데
너덜 오름길이 이리 팍팍하다는 것 오늘 알겠구나
평생을 쌓아 올린 욕망이 무너져 내린다면
치솟는 꿈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린다면
이렇게 나뒹굴어 널브러지고 눈 부릅뜬 몰골이 될까
이 폐허로 무엇을 만들겠다고 저리 이빨들을 갈고 있을까
세찬 바람에 내 몸이 휘청거린다
여기서 자칫 떨어진다면 저 깊이 모를 어둠 속으로
내가 먹혀들어 가 사라질 것은 뻔한 일
부엉이바위에서 그가 역사 속으로 몸을 던져버린 일도
저 치욕의 끊임없는 광풍이 등 뒤에서 그를 자꾸
떠다밀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결단 다음의 짧은 허공에서 그는 눈을 감은 채
무엇을 보았을까 과연 세상은 아름다웠을까
아아 죽음의 한순간은 생각건대 순결한 것인데
나는 살겠다고 기를 쓰며 바위 모서리를 잡아당긴다
나는 아무래도 시정잡배들과 다를 것이 없나 보다
세계의 마음을 사로잡기는커녕
내 한 몸 추스르기에도 이리 쩔쩔매는구나
길을 찾아 다시 숲속으로 접어든다
사람의 발자국이 얼마나 많이 쌓여져서
이 험한 곳에 이런 차분한 길이 되었을까
이렇게 몇 차례 너덜과 숲길을 오르내리다가
벼락 치듯 비명을 내지르며 달아나는 멧돼지 내외
땅을 흔드는 육중한 덩치의 저 민첩함
그를 따라 흩어지는 얼룩무늬 새끼들 예닐곱 마리
나도 놀라고 두려워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자연은 말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저절로 살아 커서
저희들끼리 살랑살랑 춤추며 노래한다
이것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낀다
허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의 욕심은 끝이 보이지 않아
사람의 뜻대로 개입하고 간섭하고 파괴하고
깊이 들어가 소리와 내음과 흔적을 퍼뜨리면서부터
녀석들은 집주인이 길손에게 쫓겨나듯 터전을 잃어버린다
나는 사람이 만든 죄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잠시나마 녀석들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데서
이 자연에게 칩입자가 됐다는 생각으로 송구스럽다
놀라 도망쳐 숨죽이고 있을 녀석들이 짠하다
발걸음 재촉하여 마지막 너덜에 이르렀다
누군가가 돌들을 쌓아 갈지자로 길을 만들어놓았다
고맙기도 하고 부질없기도 하다
문득 사람 낌새를 느끼며 위를 쳐다보니
시꺼먼 젊은 사내 하나 멈추어 서 있다
나를 내려다보며 인사를 한다 그도 혼자다
나 같은 녀석이 또 있구나 안심하고 몇 마디 말을 나누고
악수를 한 다음 헤어져 간다
오늘 하루 처음 만난 사람이
내가 왔던 길을 내려가며 사람 내음을 보탤 것이다
이제부터가 공룡능선이다*
금지된 산길 구간은 지났으니 붙잡힐 일은 없겠으나
내 마음은 여전히 내가 도둑놈이어서 맑지 못하다
다시 가슴 벌렁거린다
벌써 한나절이 지나갔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쉬엄쉬엄
찰지게**올라가야 한다
* 설악산 마등령에서 무너미고개 사이의 능선, 외설악과 내설악을 가르는 경계선으로, 백두대간 마루금의 한 부분이다.
** ‘차지게’의 전라도 사투리.
[우수상] 투구꽃 / 최두석
사노라면 겪게 되는 일로
애증이 엇갈릴 때
그리하여 문득 슬퍼질 때
한바탕 사랑싸움이라도 벌일 듯한
투구꽃의 도발적인 자태를 그려본다
사노라면 약이 되면서 동시에?
독이 되는 일 얼마나 많은가 궁리하며
머리가 아파올 때
입술이 얼얼하고 혀가 화끈거리는
투구꽃 뿌리를 씹기도 한다
조금씩 먹으면 보약이지만
많이 넣어 끓이면 사약이 되는
예전에 임금이 신하를 죽일 때 썼다는
투구꽃 뿌리를 잘라 잘게 씹으며
세상에 어떤 사랑이 독이 되는지 생각한다
진보라의 진수라 할
아찔하게 아름다운 꽃빛을 내기 위해
뿌리는 독을 품는 것이라 짐작하며
목구멍에 계속 침을 삼키고
뜨거워지는 배를 움켜쥐기도 한다
도서출판 ‘시와시학’이 강진군 영랑기념사업회와 공동 주관하는 제9회 영랑시문학상 본상 수상자로 이성부 시인이 선정됐다. 수상작은 시집 '도둑 산길'이다. 그리고 우수상은 시집 '투구꽃'의 최두석 시인이 선정됐다.
심사위원회는 “산행을 통해 얻은 생명에의 깨달음과 자기성찰을 원숙한 필치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시상식은 다음 달 30일 오후 7시 강진 영랑생가에서 열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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