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사 가는 길 / 임곤택
숲에서 나온 길이 나를 앞질러
동백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뼈를 묻을 곳을 찾는 늙은 동물처럼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쉼이 없었다
저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산 그림자와 함께 산을 넘은 바람은 숲에 머물고
알 수 없는
사실 조금은 알 듯도 한 무엇을 보았던지
상기된 꽃잎들이 연이어 숲을 나오고
나를 보더니 흠칫 놀라며 총총히 길을 건넜다
나무들이 울부짖듯 노래를 부르고
위태롭게 펄떡이던 잎들 위로
오랫동안 공중을 떠돌았을 시퍼런 영혼들이
막 새 몸을 얻어 힘겹게 반짝이고 있었다
모든 것은 명백해 보였다
동백숲으로 사라진 길은 돌아 보지 않았고
동백꽃만 검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당선소감] 삶의 전의를 상실한 채 깊은 절망, 천길 낭떠러지 앞에 핀 희망의 꽃
여기서 두어 걸음만 더 나갔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이었다.
나는 그게 두려웠다. 내가 믿던 몇몇 잠언과 자기암시의 형태로 붙잡아두었던 희망이 잔인하게 철회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죄도 없이 아프기 시작하던 차였다.
도선사 아직 잔설 덮힌 나무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전혀 다른 새 시작을 이제 준비해야 하나.. 이제서야 무언가 알 듯 한데.. 비로소 詩도, 삶도 내게 조금씩 틈을 보이기 시작한 것 같은데..
이미 내 마음의 등과 배가 서로 바싹 맞붙어, 내 영혼은 흑갈색 미이라. 벌써 몇 해를 모래 바람 속에 헤맨 뒤였다. 세상은 그런거였다. 회색의 구름 속에 알 듯 모를 듯 거개가 운이거나, 아니면 나도 모르게 미리 다 정해져 있는 듯 했다.
나는 철저하게 길 위에 있었다. 항상 어딘가로 향해 걷고 있었지만 그나마 길가의 노견 때론 질퍽하고, 때론 먼지 뒤집어 쓴 풀꽃들이 마음 편한 그런 길이었다.
간혹, 정말로 아주 간혹, 새로운 빛을 발견했단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감당할 수없는 기쁨과 어지럼증에 잠깐 정신을 잃곤 했다, 하지만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땐 낯익은 예전의 그 빛에 다시 눈이 부셨다.
절망의 바로 앞, 만신창이의 몸에 누더기를 걸치고 선 천 길 낭떠러지, 구멍난 신발 앞에 피어 있는 작고 예쁜 꽃 한 송이.
희망은 그런건가 보다. 사람을 죽지 않을 만큼 늘씬 패주고는 이제 모든 전의를 상실할 때쯤, 바로 그때쯤 한번 씨익 웃어주는 건가 보다.
부족한 글을 예쁘게 보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앞으로 간결하면서도 선명한, 그리고 항상 넓게 살피고 깊게 고민하는 시를 쓰고 싶다.
부모님과 우리 가족, 그리고 후배 의혁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이제부터’라고 다짐하며, 다시 한번 뽑아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심사평]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구성 깊이 있는 주제 형상화 돋보여
불교신문 신춘문예라는 특징 때문인지 응모된 시(시조) 작품의 대다수가 불교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 가운데 대다수가 불교적 세계관을 작품 속에 내재화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제재로 다루어진 것들이었고, 불교적 관념만 생경하게 노출되어 있을 뿐 한 편의 정제된 시작품으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적지 않은 작품이 만만치 않은 시적 역량을 보여 주어 심사의 괴로움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남은 작품은 ‘대구머리 찜을 먹으며’(최숙자), ‘고물상 장씨’(금이정), ‘대흥사 가는 길’(임곤택) 등 세 편이었다. ‘대구머리 찜을 먹으며’는 일상적 소재를 통해 인간의 내면적 고통과 삶의 애환을 가다듬은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대구머리 찜의 묘사와 일상적 삶의 반성의 교직이 작위적인 데다가 다소의 감상기가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고물상 장씨’는 배냇병신인 고물상 장씨의 삶과 폐품이 되어 고물상에 버려진 물건을 대비시킨 상상력과 단순한 비유법에서 느껴지는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고물상 장씨의 배냇고물인 왼팔에 얽힌 사연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고, 재생을 꿈꾸는 사물과 인간의 욕망이 긴밀한 조응을 이루지 못했다. 이와 함께 ‘고물캉’과 같은 어휘가 시적 긴장감을 이완시켜 놓았고 “고물상을 동그랗게 에워싸던 불빛도 차츰 사그러진다”를 독립연으로 처리한 것도 애매했다.
‘대흥사 가는 길’은 첫눈에도 잘 다듬어진 작품임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별 군더더기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짜여진 구성과 평이한 어휘와 조사(措辭)를 통해 생사의 반복적 순환과 그 경이로움에 관한 깊이 있는 주제를 형상화한 솜씨가 녹록치 않았다. 이 작품이 주는 ‘잘 정제된 작품’이란 일차적 인상은 신춘문예 응모용이란 혐의를 주는 게 사실이지만, 작품을 이만큼 잘 만들어낼 수 있는 기량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과 함께 투고한 작품이 보여주는 고른 수준을 시 당선작으로 뽑는다.
앞으로 신인으로서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갖추면 좋은 시인이 되리라 믿으며, 더욱 정진할 것을 부탁드린다.
심사위원 장영우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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